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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8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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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숨가쁜 인생길 닮은 소백산 죽령 고갯길에도 이것이…

글·사진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2021-05-20 오전 8:38:40

▲ 소백산 죽령 고갯길의 사과밭. 죽령은 말안장처럼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소백산을 넘어가는 죽령(竹嶺) 고갯길. 고개를 올라가는데 숨이 가쁘다. 심장 펌프질은 가빠지고 숨 쉬기는 어렵다. 숨 쉬기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살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대장부 4대 과목이 감방·부도·이혼·암이라는데 이 4가지는 숨 쉬기 어렵게 만드는 고갯길과 같다.
   
   어떻게 이 고개를 넘어간단 말인가 하는 한탄을 죽령 고갯길을 넘어가면서 했다. 숨이 가쁘니까 주변 풍경은 눈에 안 들어온다. 아니 눈에 들어와도 가슴에 들어오지 못한다. 가슴에 들어와야 인생길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매김할 것 아닌가. 중간중간에 아름다운 추억의 장면이 많이 저장되어 있어야 노년이 되었을 때 추억할 거리가 있다.
   
   죽령고개는 해발 700m 정도 된다. 소백산 정상의 높이가 대략 1300m쯤 되는데 죽령은 그보다도 600m가 오목하게 낮다. 마치 말안장처럼 이 고갯길만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충북 단양에서 경상도 풍기로 넘어가는 길이다. 반대로 풍기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 안동에 살던 퇴계 이황 선생은 서울을 왔다 갔다 할 때 대부분 이 죽령고개를 넘어갔다. 조령(鳥嶺)도 가끔 넘어 다녔지만 그보다는 죽령길로 주로 넘어 다녔다. 거리가 더 짧기 때문이다. 한겨울에는 오르막이 완만한 조령이 더 낫겠지만, 그 외의 계절에는 좀 더 가파르더라도 거리가 훨씬 가까운 죽령으로 넘어 다녔다. 퇴계 선생이 서울에서 출발하여 안동 도산까지 가는 귀향길을 재현하는 행사팀을 따라서 죽령을 넘어 보았다.
   
   전라도나 충청도는 죽령과 같은 높은 고갯길이 없다. 고갯길이라고 해봐야 200~300m 높이다. 산이 높은 경상도에서 충청, 경기, 전라도로 넘어가려면 유독 높은 고갯길을 넘어야만 했다. 하늘재, 이화령, 죽령, 조령이 모두 큰 고개에 해당한다. 영주에서 영월 쪽으로 넘어가는 고치령, 마구령도 700~800m 수준이다. 이것도 역시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길이다. 경남 함양 쪽에서 전라도 장수로 넘어오는 육십령고개도 만만한 고갯길이 아니다. 높은 고갯길이다.
   
   100년 전까지 한국 사람들은 고갯길을 걸어서 넘어 다녀야만 하였다. 산이 많았던 한반도 지형은 봇짐을 등에다 메고 산을 넘어야만 하는 조건이었다. 조선시대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여행객은 두 종류였다고 보인다. 하나는 보부상, 즉 봇짐장수들이다. 또 하나는 과거시험 보러 가는 선비 수험생들이다. 특히 죽령과 조령은 과거시험 보러 가는 시험 준비생들도 많이 넘어가는 고개였다. 다른 고갯길은 주로 보따리를 멘 보부상들이 넘나들었던 고갯길이다.
   
   보부상들은 어떤 짐들을 들고 다녔을까. 옹기 장수는 옹기를 메고 다녀야 했을 것이고, 소금 장수는 소금을 지게에 싣고 고개를 넘어야 했을 것이다. 옹기를 메고 가다 험한 고갯길에서 미끌어지면 옹기는 다 깨져버렸을 것이다. 소금 장수가 비가 와서 미끄러운 계곡길을 넘어가다 자빠지면 소금 가마니는 계곡물에 빠졌을 것이고 물에 빠진 소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백 리를 넘게 등짐 지고 온 옹기며 소금을 잃어버렸을 때의 낭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20대 초반부터 30살 무렵까지 대략 10년간 보부상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어떤 물건을 지고 다녔을까? 이 분야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한약재를 많이 지고 다녔다고 한다. 한약재는 비교적 가벼운 물건이다. 수운은 이 한약재를 봇짐에 메고 고갯길을 많이 넘어 다녔을 것이다.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하루에 대강 몇 리를 걸었을까. 적어도 50리요, 많으면 100리를 걸었다. 이렇게 걷는 생활을 많이 하면 중년 들어서 무릎관절이 온전했을 리가 없다. 대부분 40대 중반이면 이상이 왔다고 여겨진다.
   
   
   동학 창시 최제우가 넘은 고개는?
   
   죽령 올라가는 길에 풍기가 고향인 사람이 옆에서 같이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겨울에는 바람이 엄청 세게 붑니다. 돌멩이가 들썩거릴 정도로 바람이 풍기 쪽으로 강하게 불어오죠. 죽령고개가 움푹 들어가 있으니까 바람이 이 죽령을 통과해서 풍기 쪽으로 몰려오는 것입니다.”
   
   풍기는 십승지의 제1번에 해당하는 고장이다. 그 유명한 금계포란(金鷄抱卵)의 명당이 풍기에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19세기 후반부터 전국의 풍수도참 신봉자들이 풍기 쪽으로 이사를 왔다. 이북에서도 1894년 동학 이전부터 전국에 난리가 날 것이라고 보고 그 난리에서 살아남자면 풍기의 금계포란으로 이사와야 한다고 믿었다. 이북 사람들이 동학 무렵부터 이주하기 시작해서 왜정 때에도 수차례에 걸쳐 이사를 왔다. 1920~1930년대에도 이북을 비롯한 전국의 비결파(秘訣派)들이 이사를 왔고, 광복 무렵에도 대거 이주를 했다. 10·26사건 때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총격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김계원도 이북에서 내려온 비결파의 후손이다.
   
   십승지에서 풍기를 주목했던 이유를 소백산 고갯길을 올라보니 알겠다. 풍기에서 보자면 서북쪽에 소백산이 버티고 있다. 서북 방향은 겨울에 찬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다. 풍수에서는 이 서북방을 주목한다. 살풍(殺風)이 부는 방향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서북방이 터져 있으면 그 터를 좋지 않게 본다. 이 방향은 나무를 심어서라도 가려야 한다.
   
   조선조에서도 서북 차별이 있었다. 이북의 평양, 평안도 일대가 한양으로 보면 서북방이었다. 한양 정부에서 서북 지방의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던 것이 곧 서북 차별이다. 결국 홍경래 반란의 주요한 원인 제공이 되었다. 아무튼 풍기는 서북방을 소백산이 가려주고 있는 지형이므로 겨울에도 살풍이 불지 않는 살 만한 터가 된 것이다. 십승지의 1번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북방에 놓여 있는 소백산의 존재였다. 그런데 소백산 전체 중에서 이 죽령고개 쪽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는 이야기이다.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니 죽령 바로 밑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지만, 현재 금계포란이 있는 터는 죽령 밑으로 내려온 바람을 병풍처럼 차단해주는 산자락이 포진해 있다. 풍기 내에서도 금계포란 터는 죽령고개의 바람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지점이었다. 단양 쪽에서 올라가 고갯길 거의 정상 부근에 도착하니 여기에도 역시 산신령이 독립적으로 모셔져 있다. 인생의 봇짐을 메고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야만 했던 조선의 민초들이 마음속으로 의지했던 존재는 산신령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지난번 고치령에도 있었던 유형의 산신각이 죽령에도 있다. 유난히 소백산 고갯길에서 산신각이 많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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