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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64호] 202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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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알렉산더 대군이 건넌 44㎞ 대협곡 ‘실리시안 게이트’

메르신(터키)=글·사진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silkroad100@gmail.com 2021-06-28 오전 8:49:31

▲ 굴렉산성에서 내려다본 실리시안 게이트. 험준한 산에 둘러싸인 44㎞ 길이의 협곡이다.
‘문명은 도덕에 달려 있다(Civiliza-tion depends on morality).’
   
19세기 미국 사상가 랄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가족·사회·국가를 바탕으로 한 문명은 개개인이 가진 도덕의 수준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에머슨의 지론인 개인주의에 기초한, 미국 민주주의 이념의 기초를 다진 말 중 하나로 평가된다.
   
   도덕은 개인적 차원의 주관적 좌표에 해당한다. 집단은 법으로 통제할 수 있지만, 도덕은 개개인 스스로의 가치 판단 나침반이다. 나침반이 항상 움직이는지, 얼마나 정확히 방향을 잡아내는지 여부가 문명의 우위를 결정짓는 잣대라는 말이다. 도덕 나침반이 아예 없거나 방향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할 경우 백만장자에다 기술대국이라도 문명국이라 부를 수 없다. 이웃 중국은 최적의 반면교사다. 악마는 신보다 한층 더 영리하고 쿨하고 품격 있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악마는 영원히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우월성
   
   인류 4대 문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외우고 익혀온 세계사 공부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4대 문명의 서열이다. 구석기·신석기에서 수렵, 농업으로 이어지는 문명사의 공통점을 열거하는 가운데 4대 문명 전부를 ‘동격’으로 대하기 십상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4대 문명의 수준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상하 우열이 존재하는 인류사다. 문화의 서열은 없지만, 문명의 우열은 분명히 존재한다. 4대 문명에도 높낮이가 있다는 의미다. 우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에머슨이 말한 도덕의 수준이 중요한 요소라 볼 수 있다. 개개인이 가진 도덕의 정도가 어느 지역에서 가장 먼저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발달했느냐는 문제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4대 문명의 최상위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 이유는 문자의 발명이다. 기원전 4000년 수메르인이 처음으로 선보인 설형문자가 도덕의 출발점이란 의미다.
   
   인간의 도덕의식은 구체적인 문자를 통해 진화·발전할 수 있다. 말이나 풍습도 있지만, 문자의 힘을 통할 경우 한층 더 강력하고 정확하며 오래간다. 기원전 2100년 인류 최초의 성문헌법인 ‘우르남무법전(Code of Ur-Nammu)’, 이후 기원전 1750년경 탄생한 함무라비법전 모두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탄생,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법은 인간 개개인이 갖는 도덕의식의 최소 공통분모다. 세계 최초의 메소포타미아 법전 자체가 지역 내 도덕적 수준을 가늠하는 증거라 볼 수 있다. 이집트 나일, 인도 인더스, 중국 황하 모두 4대 문명권 중 하나로 처리되지만, 구체적인 문명 수준으로 본다면 메소포타미아보다 한참 늦고 아래라 볼 수 있다.
   
   
▲ 굴렉산성 입구

   IT 기술에 힘입은 고고학 여행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여행할 때 최대 매력 중 하나는 기원전 역사에 관한 유물·유적을 곳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기원전 3000년이나 5000년 나아가 1만년 전에 형성된 인류 초기 문명 문화의 기원과 흐름을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다. 신화에 매달리거나 국수주의적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물·유적에 기초한 메소포타미아 역사다. 고맙게도 수천 년 단위의 메소포타미아 역사와 그것이 남긴 흔적은 서방 지식인이나 고고학자들만이 아니라 21세기 인간 모두에게 열려 있다. 불과 한 세대 전인 20세기 말까지의 상황이었지만,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이 고대 문명 문화에 접근할 수 있었다. 지식과 돈이 원인이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현지에 가도 뭐가 뭔지 알기 어렵다. 말이 역사 유적지지 보통 오지에 숨어 있듯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포장도로도 거의 없고, 현지에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머물 만한 숙박지나 음식점도 없다. 말도 안 통한다. 그러나 그 같은 흑백필름 시대의 기억은 21세기 들어서는 순간 사라진다. 비약적인 IT 기술의 진화와 글로벌화 덕분이다.
   
   관심이 가는 ‘문명’ ‘문화’ ‘사건’ ‘지역’에 관한 키워드를 구글에 넣는 순간, 수천 년 전 역사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펼쳐진다. 현장 방문을 원할 경우 GPS를 이용한 지름길 도로가 나타난다. 현지에 어떤 유물·유적이 남아있는지도 3D 영상을 통해 한눈에 알 수 있다. 현지로 가는 대부분의 길도 요즘은 포장도로로 이어져 있다. 고대 유물·유적 현장은 글로벌 관광객 유치를 위한 테마파크 놀이동산으로 이미 변신했다. 결국 자동차 한 대 빌릴 정도의 돈이 소요될 뿐, 정보의 부족도 없고 남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 19세기 말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이상의 지식과 정보, 경제력에 기초한 인류 고대사로의 여행이라고나 할까?
   
   실리시안 게이트(Cilician Gates)는 인류 최상의 문명대국 메소포타미아에 주목하던 중 알게 된 역사의 무대다. 지중해 끝 바다에 인접한 터키 항구도시 메르신(Mersin)에서 북쪽으로 100㎞ 떨어진 곳에 있다. 깊고도 긴 협곡으로 유명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해발 1000m 높이 산을 따라 무려 44㎞나 이어져 있다. 협곡 사이에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폭 5m 정도의 좁은 길이 남북으로 연결돼 있다.
   
   
▲ 메소포타미아 지방 곳곳에서 발견되는 알렉산더 대왕 흔적들. 왼쪽은 헬레니즘 시대 번성했던 고대 도시 페르게(Perge)에서 발견된 알렉산더 입상, 오른쪽은 알렉산더 얼굴로 추정되는 석상.

   초기 기독교 수도원 카파도키아로 연결
   
   그리스는 물론 터키 아나톨리아의 지형을 보면 바다 주변은 높은 암벽,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1000m 이상 높은 산들이 버티고 있다. 지중해에서 내륙 중요 도시로 연결되는 평지의 길이 극히 드물다. 실리시안 게이트 주변도 마찬가지다. 반경 1000㎞ 주변에 내륙으로 넘어갈 다른 길이 없다. 폭 5m, 길이 44㎞의 실리시안 게이트가 유일한 통로다. 지금은 일직선 고속도로가 들어서 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험난한 산을 넘나들면서 일주일 정도 열심히 걸어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실리시안 게이트는 성경의 갈라디아서(書)에도 나오는, 1세기경 포교를 위해 사도 바울이 넘나들었던 길이기도 하다. 성경의 고린도후서(後書) 11장23절에 나오는 ‘수많은 강과 도적들의 위험’에 관한 내용은 실리시안 게이트 여행 중 벌어진 바울의 고난을 묘사한 구절이다. 목숨을 건 바울의 포교 덕분이겠지만, 실리시안 게이트의 북쪽은 초기 기독교 수도원으로 유명한 카파도키아로 연결된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낳은 최후의 선물이라 볼 수 있다. 바다를 통한 포교도 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실리시안 게이트-카파도키아-유럽’으로 연결된 육로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파통로다.
   
   실리시안 게이트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서에서 동으로 행군한, 동서대륙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다. 기원전 333년, 23살 청년 알렉산더가 통과했던 길이 바로 실리시안 게이트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36년, 아버지 필립이 암살된 즉시 왕에 오른다. 나이 20살 때였다. 이후 3년 만에 그리스 모든 도시국가들을 휘하에 넣은 뒤 페르시아 정복에 나선다. 실리시안 게이트는 페르시아의 본거지였던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첫 관문이다.
   
   ‘1만’이란 숫자는 알렉산더를 얘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수식어다. 알렉산더 정복사의 핵심은 마케도니아를 주축으로 한 1만 그리스 보병에 있다. 전쟁에 이긴 뒤 신병을 새롭게 보충하면서 전력을 확대해가지만, 기본은 1만 그리스군에 있었다. 동서 정복자 알렉산더의 핵심 동력이 바로 1만명에 달하는 그리스군이었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에 대한 전면 공격은 실리시안 게이트 통과 직후 행해진다.
   
   
   협곡을 뚫고 나간 알렉산더와 1만 군대
   
   실리시안 게이트는 특별한 공간 하나를 지금까지도 보존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산성(山城)으로 불리는 굴렉(Gülek)이라 불리는 유적지다. 대규모 축조에 나선 것은 12세기지만, 멀리는 기원전 10세기 히타이트 시대 때부터 활용된 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협곡 통과 여행객을 위한 숙식용 공간이 굴렉의 최초 용도였을 듯하다. 세금을 받아내고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성의 기능은 히타이트 시대 훨씬 이후의 상황이다. 당연하지만 알렉산더 이후 로마, 비잔틴 군대와 이슬람, 십자군이 실리시안 게이트를 차례로 통과했다. 이와 함께 굴렉산성의 군사적·경제적 의미도 한층 더 커져갔다.
   
   필자가 굴렉산성에 호기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알렉산더 대왕 때문이었다. 협곡은 위에서 공격할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진퇴양난의 공간이다. 굴렉산성에 가보면 5m 폭의 좁은 길 44㎞를 통과한 알렉산더와 그리스군 1만명의 담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뱀처럼 이어진 행진 행렬이 끝없이 펼쳐졌을 것이다. 굴렉산성은 그 같은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협곡보다 100m 위에 들어선 산성이기에 동서로 길게 펼쳐진 길을 ‘입체적으로’ 내려다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사를 탐구하면서 절실히 느낀 점이지만 지정학, 지리학, 지형학, 지질학 차원의 입체적 역사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황산벌전투는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전쟁이다. 이런저런 흥미로운 얘기들도 있지만, 정작 황산벌전투를 구성하는 ‘지(地)’을 기반으로 한 입체적 분석이 전무하다. 전투가 벌어진 곳의 산세가 어떤지, 강은 얼마나 떨어진 곳에 있었는지, 당시 핵심부대의 위치는 어딘지, 말이 움직일 만한 마른 평야였는지, 어떤 지형적 이점을 활용했는지 등등의 궁금증을 풀어줄 자료가 거의 없다. 로마를 비롯한 서방 역사는 ‘지’에 기초한 입체적 역사 이해를 기본으로 한다. 현장 검증이 역사학의 출발점이란 의미다. 굴렉산성에서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하나만으로도 수천 년간 이어온 실리시안 게이트 주변의 입체적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알렉산더와 그리스군 1만명은 그 중심이자 출발점에 해당한다.
   
   굴렉산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오프로드 전용 차량이 필요하다. 이미 25만㎞ 이상 달린 렌터카로 오른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터키인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발 1000m 이상 고원지대여서 굴렉산성 주변에는 해와 구름, 비가 항상 오락가락한다. 아치형의 작은 문 하나와 성벽 흔적만이 산성의 전부다. 성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선 순간 눈 아래 협곡이 한눈에 들어왔다. 21세기 초 건설된 왕복 4차선 고속도로가 협곡 아래에 들어서 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길로, 끝없이 이어진 높은 산들이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 지금이야 평지 도로지만, 알렉산더 행군 당시에는 언덕과 산을 타고 넘는 험지였을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알렉산더 로망스’
   
   메소포타미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알게 됐지만, 알렉산더 스토리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2300여년 전 벌어졌던 젊은 영웅의 행적을 둘러싼 전설과 신화다. 일명 ‘알렉산더 로망스(Alexander Romance)’라 불리는 스토리로, 대부분은 알렉산더 사후에 만들어진 픽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는 그 같은 스토리에 가장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지역이다. 유일신 알라를 믿는 이슬람 지역이지만, 알렉산더에 관한 관심과 신뢰는 남다르다. 부상당한 알렉산더가 이용했다는 온천, 불사(不死)의 몸으로 환생해 바다의 인어로 살면서 영웅의 어제를 찬미했다는 알렉산더의 여동생, 북방 야만인들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방어하기 위해 알렉산더가 만들었다는 성벽 카스피안 게이트(Caspian Gates), 알렉산더가 죽인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가 알렉산더의 이복형제였다는 페르시아의 전설….
   
   굴렉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현지인을 만나 알렉산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알렉산더는 그리스군 1만명과 함께 여기 굴렉산성에 머문 뒤 메소포타미아로 내려갔다. 당시 알렉산더가 남긴 비문도 있다.” 어디에 비문이 있는지 물어보자, 20세기 초 영국 고고학자가 와서 훔쳐갔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실리시안 게이트 통과 10년 뒤 메소포타미아 한복판인 바빌로니아에서 숨진다. 동서 정복에 성공한 이상, 다시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자는 장군들의 요청을 무시하던 끝에 맞은 급사다. 그가 암살당했는지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33살 짧은 인생이지만, 알렉산더는 이후 서방 지도자 모두가 흠모하는 영웅으로 추앙된다. 알렉산더의 평생은 돈과 권력, 내로남불과는 무관한 삶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과 도전, 그리고 정복만이 33살 인생의 전부였다. 청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도덕의 표상’이 알렉산더였던 셈이다. 사상가 에머슨의 말을 빌리자면 ‘문명의 상징으로서의 도덕을 다시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고장 직전의 낡은 렌터카로 굴렉산성에서 내려오던 중 석양에 뒤섞인 엷은 비구름을 만났다. 차가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바람이 밀어닥친다. 알렉산더와 1만 군대의 우렁찬 함성이 초고속 비구름과 함께, 실리시안 게이트와 메소포타미아 곳곳에 퍼져나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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