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개가 없는 집보다 있는 집이 더 많다. 심지어 중장년 남성들이 모여서도 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낸다. 정치인들이 이런 세태를 놓칠 리 없다. 최근에 주요 대선주자들은 앞다퉈 반려견 시설을 찾아가거나, 개와 함께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리고 있다. 이미 ‘애완견’은 ‘개념 없는’ 말이 된 지 오래다. 겉만 보면 영락없이 반려견 전성시대다.

그러나 속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여전히 개를 사람 중심으로 대한다. 심지어 ‘내 마음에 안 들면’ 버리기까지 한다. 특히 휴가철에 그런 일이 많다. 반대로, 개의 미용과 건강을 ‘내 마음에 들도록’ 과하게 챙기기도 한다. 하지만 개를 말 그대로 반려로 받아들이려면 먼저 이렇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개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무려 30여년 동안 10여마리의 개와 함께 살며 그들의 습성을 살펴본 관찰 기록이 있다. 바로 엘리자베스 마셜 토머스의 ‘개들의 숨겨진 삶’(The Hidden Life of Dogs·초판 1993·증보판 2010)이다. 흔히 우리는 주인과 평온하게 어울려 지내는 개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개들만의 ‘숨겨진’ 삶을 내밀하게 관찰한 끝에, 개들은 무리에 속해 개들끼리 어울려 지낼 때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말로는 초판이 ‘인간들이 모르는 개들의 삶’(2003)으로 소개되었다가, 이번에 증보판이 ‘개와 함께한 10만시간’(2021)으로 이름을 바꿔 나왔다. 저자는 개 1마리와 1시간을 보내면 1시간, 2마리와 1시간을 보내면 2시간… 이런 식으로 계산하여 이 책은 줄잡아 10만시간 이상의 관찰 기록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증보판의 우리말 제목이 유래한 것이다.

인류학자이자 작가인 저자는 우연히 지인의 시베리안허스키 수컷을 잠시 돌봐주기로 했다. 마침 저자는 암컷을 기르고 있었다. 암수는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수컷은 주인이 가는 줄도 몰랐다. 특히 수컷은 밤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때 저자는 불현듯 개들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도보나 자전거로 개를 쫓아 나서자, 개도 굳이 저자를 따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저자의 관찰은 시작되었다.

허스키 암수는 자연스럽게 교미를 했다. 한참 후 수컷은 친구 집으로 돌아가서도 꽤 먼 거리를 더듬어 저자의 집을 찾아왔다. 그 사이 암컷이 새끼 네 마리를 낳았다. 암컷이 잔뜩 웅크리고 새끼를 감추고 있는데도 수컷은 곧바로 암컷의 출산을 알아채고 음식을 토했다. 그것은 늑대가 새끼에게 음식을 토해 주는 바로 그 습성이다. 그리고는 거의 매일 두 집을 오갔다.

저자의 집에는 그전부터 기르던 소형견 두 마리가 있었다. 여기에 시베리안허스키 암수와 그 새끼들이 불어났고 이런저런 기회에 잡종견 3마리가 생겨, 모두 11마리가 되었다. 저자는 시차를 두고 대가 바뀌는 10여마리의 개가 모두 죽거나 사라질 때까지 무려 30여년 동안 그들의 습성을 관찰했다. 그 사이사이에 태어난 새끼들은 주변에 입양되었다.

친구가 사정상 시베리안허스키 수컷을 더 이상 기르기 곤란하게 되었다. 저자가 맡아 기르려고 했으나, 그 개의 외출 습성을 알고 있던 이웃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어쩔 수 없이 수컷은 먼 시골로 보내졌다. 더 이상 수컷을 만날 수 없게 된 암컷은 무리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면서도 활력과 생기를 잃었다. 암컷은 죽을 때까지 끝내 그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의 세계에 이런 낭만적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수정만 바라는 지극히 사업적 성격의 성적 만남도 있다. 한 번은 무단으로 침입한 미지의 수컷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어린 암컷과 강제로 교미만 하고 달아났다. 이로 인해 그 암컷은 불행하게도 서열이 높은 암컷과 동시에 출산을 했다. 그런 강제가 아니었다면 그 암컷은 교미 자체를 포기했을 것이다.

늑대나 개 무리에서는 대개 서열이 높은 암컷만 출산을 한다. 이는 척박한 환경에서 무리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다. 어느 날 저자가 나갔다 돌아오니 서열이 높은 출산견이 서열이 낮은 암컷의 새끼 다섯 중 넷을 이미 물어 죽였다. 그 개는 매우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본능에 따라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물론 개의 기준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열이 낮은 암컷은 겨우 살아남은 새끼조차 키우기 어렵다. 이때 좀 더 서열이 높은 암컷이 그 새끼를 받아들였다. 그 암컷은 결코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약간의 젖이 분비되기까지 했다. 그것은 진심으로 그 새끼를 자신의 자식처럼 여겼다는 증거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서열이 낮은 암컷의 새끼를 물어 죽였던 개도 나중에 다른 개의 새끼를 입양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한적한 전원으로 옮겨갔다. 개들은 집과 숲속을 자유롭게 오가며 지냈다. 심지어 어떤 개는 야생 코요테와 교미를 하기도 했다. 거기서 개들은 평화롭게 무리를 이루었다. 새로 태어나는 새끼들은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시나브로 체득했다. 중성화수술을 통한 부분적 출산 조절은 불가피했으나, 그밖에는 어떠한 개입이나 훈련도 불필요했다.

무엇보다 개들은 무리에 속하기를 원한다. 한 쌍과 그 새끼들로 이뤄진 무리야말로 가장 안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일부가 합류하더라도 차츰 서로의 위치를 정해 안정적인 균형을 이룬다. 이를 통해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게 되는 순간부터, 사회적 질서는 그들에게 든든한 의지가 된다. 함께 굴을 파기도 하고,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개들의 세계가 탄탄해지면 주인에게 무미건조한 친밀감만 보일 뿐 더 이상 순종적이지 않다.

“나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그들의 조건에 맞추어 찾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개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사는 법을 배웠듯이 나 또한 그들 사이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늦은 오후 우리는 햇살을 받으며 드문드문 떨어져 앉거나 배를 깔고 누운 채로 아무 걱정 없이 서로에게 만족을 느끼며 가만히 평온하게 있었다.”

안타깝게도 개들은 노령 등으로 하나하나 죽어갔다. 중병을 앓는 개도 인간의 보살핌을 받기보다는 무리에 머물기를 더 원했다. 별도로 마련해 준 안락한 자리를 버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무리 속으로 향했다. 당뇨병을 앓던 마지막 개는 어느 날 평소처럼 숲속으로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상금까지 걸고 몇 년 동안 흔적을 찾았으나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로써 저자의 30여년의 관찰 여정이 막을 내렸다.

저자는 사회적 동물인 개는 개들끼리 어울려 살 때 가장 행복하다고 역설한다. 그렇다고 모든 개가 무조건 무리에서 지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리 없이 주인과 같이 지내는 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 개는 주인이나 그 가족과 또 다른 무리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이럴 때도 “개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개에게 좋은 먹이와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성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기꺼이 무리의 일원이 되어 보기까지 했다. 마침 우리 법무부도 ‘동물은 물건(즉 동산)이 아니다’라는 조항을 담은 민법 개정안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는 반려문화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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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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