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천불동계곡
설악산 천불동계곡

“단풍은 늦가을 환락이요 빨노란 열정이며 주검 앞 성숙이라. 동장군 지척에 두고 그분이 내려 주신 환타지여라….”

올해도 예외 없이 9월 28일 설악산 대청봉에서 단풍이 시작됐다. 중부권에서 가장 높은 해발 1708m 대청봉을 향해 헉헉 올라가니 대략 1500m 일대부터 붉고 노란 단풍을 만났다. 앞으로 두 달 가까이 벌어질 형형색색 퍼레이드의 개막식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첫 단풍은 이렇게 고생한 등산객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아직 지상세계에서는 전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없지만, 보름쯤 지나면 붉고 노란 기운은 아래까지 내려온다.

단풍은 사실 나무가 겨울나기를 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나뭇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離層·이층)가 만들어져, 줄기의 양분이 잎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엽록소가 파괴된다. 이때 그동안 보이지 않던 다른 색소들이 나타나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안토시아닌’이 많아 붉은 단풍이 되는 당단풍나무, 개옻나무, 붉나무 등이 있고, ‘카로틴’이나 ‘크산토필’이 많아 노랑 단풍이 되는 생강나무, 만주고로쇠, 참나무류 등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흔한 것은 당단풍나무. 중부지방에서 흔히 만나는데, 잎이 9~11갈래로 갈라지고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겹으로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필자는 5년 전까지 단풍에 관심도 없었고 감흥도 적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단풍 빛깔이 발산하는 열정에 푹 빠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단풍 시즌이 되면 모든 국토가 단풍으로 울긋불긋하다. 그중에서도 올가을 꼭 가보면 좋을 베스트 명소를 골라 보았다. 민간 기상업체인 케이웨더에 따르면, 올해는 지구온난화 영향인지 단풍 절정기가 예년보다 1~5일 정도 늦을 전망이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19 위세가 여전하므로 국립공원공단의 비대면 서비스를 활용하거나, 굳이 현장에 가겠다면 백신 2차를 맞고 방역수칙을 잘 지켜야 할 것이다.

설악산 천불동계곡

등산 초급자라도 왕복이 가능한 ‘단풍 맛집’ 코스다.

3년 전 난생처음 천불동계곡 단풍을 구경했을 때 괜히 남을 원망했다. “아니 한국에 이런 곳이 있다는 얘기를 왜 안 해줬나. 젊었을 때 알았더라면 매년 이 절경을 놓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비록 캐나다 메이플로드에 비해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는 않지만, 단위면적당 아름다움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곳곳에 작은 폭포와 연못이 빚어 내는 오색의 향연은 가히 압권이다. 기암괴석이 마치 천(千)개의 부처(佛)가 모인 동네(洞) 같다고 해서 천불동이라는데, 실제 현장에 가보면 ‘여기가 천국의 일부인가’라는 착각이 든다.

천불동계곡은 보통 설악산 소공원(설악동)에 주차한 뒤 비선대까지 3㎞의 평지를 걷고 나서야 시작된다. 비선대에서부터 출발, 완만하지만 줄곧 오르막인 산길을 걷다가 약간 숨가쁜 언덕을 오르면 귀면암에 도착한다. 귀면암에서 중도 포기하고 되돌아가면 후회한다. 귀면암부터 박차를 가하여 천불동계곡의 하이라이트인 오련폭포에 이르면 미니 그랜드캐니언과 미니 메이플로드가 어우러진 장관에 입이 벌어진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골짜기 사이에 5개의 폭포가 연이어 떨어지며 절경을 이룬다고 해서 오련(五連)폭포다. 오련폭포를 조금만 더 지나면 양폭대피소에 도달하고, 거기서 다시 200m 정도만 더 올라가면 천불동계곡의 종점인 천당폭포에 도착한다.

이렇게 소공원부터 비선대까지 3㎞, 비선대부터 천당폭포까지 3.5㎞이다. 즉 소공원에 주차한 뒤 편도 6.5㎞를 걸어야 천당폭포에 도착한다. 왕복으론 13㎞이므로 아주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사진 찍느라 조금 지체하면 왕복 6시간은 훌쩍 가 버린다. 게다가 중간에 잔돌이나 바위가 많으므로 항상 조심해야 한다.

천불동계곡 단풍 투어를 하려면 시기를 잘 골라야 한다. 대략 10월 중순에 가면 단풍의 상태가 가장 괜찮은데, 매일 뉴스를 잘 체크해야 한다.

(설악산에는 ‘미니 천불동계곡’으로 불리는 주전골도 단풍으로 유명하다. 오색약수터에서 시작하여 용소폭포까지 다녀오는 편도 3.2㎞ 코스이다. 이곳은 평지에 가까워 가족 단위로 다녀오기에 적합하다. 천불동계곡을 축약해놓은 아름다움이 자랑거리다. 코스는 쉽고 경치는 빼어나다 보니 10월 20일 전후 성수기에는 주차 전쟁이 벌어진다. 다만 코스 왕복에 2~3시간이면 가능해 관광객들 교대가 잦은 편이라, 아침 일찍 가지 않는 한 차라리 오후 2시 넘어 오색약수터 입구에 도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오대산 노인봉
오대산 노인봉

오대산 노인봉

가끔씩 산을 오르는 초급자라도 충분히 가능한 코스이다.

오대산국립공원 중에서 비로봉 코스에 비해 찾는 사람은 적지만, 호젓한 분위기의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에게는 그만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해발 1000m에 있는 진고개정상휴게소에 차를 세운 뒤 등산을 시작한다. 주차장이 꽤 넓어 마음이 편하다.

주차장에서 해발 1338m인 노인봉까지는 길이가 4.1㎞. 결국 그 길이에 고도는 338m만 올리면 되는 코스이니 경사는 순한 편이다. 등산 초입부에 등장하는 고위평탄면은 영국의 황무지 무어(moor)를 연상시키는 평원이어서 인기가 높다. 다만 고위평탄면을 지나면 깔딱고개 나무데크 계단이 나오는데 쉬엄쉬엄 통과하면 큰 어려움이 없다.

노인봉 직전 마지막 1.5㎞ 정도는 완전 평평한 산길이 계속되면서, 여유 있는 마음으로 컬러풀한 단풍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대체로 오대산은 빨간 단풍보다는 노란 단풍이 많은 편. 올해의 경우 10월 10일 전후가 가장 멋질 전망이다.

정읍 내장산
정읍 내장산

정읍 내장산

한국 제일의 단풍 명소. 등산이 아닌 단풍 구경이 목적이라면, 매표소에서 내장사까지 완전 평지를 잘 걷기만 하면 된다.

엄청난 주차 전쟁을 치른 뒤 매표소를 지나 차량 도로 혹은 무장애 관찰로를 따라 걸으면 ‘단풍의 백화점’에 왔다는 실감이 든다. 이후 연못이 나타나고 그 가운데 세워진 정자인 우화정(羽化亭)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는다. 조금 더 가면 일주문이 나오고 내장사에 이르는 300m의 단풍터널 구간을 천천히 걸어간다. 일직선 길인데 단풍나무 108주가 있다고 하며, 아름드리 활엽수들이 양쪽에서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걷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지만, 매표소에서 내장사까지 4㎞가 안 된다. 매표소에서 내장사 입구까지는 유료 셔틀버스가 운영되는데, 왕복으로 이를 탄다면 단풍 구경을 한다는 의미가 없고 대신 노약자라면 편도는 이용해 볼 만하다.

(내장산국립공원에는 속하지만, 행정구역이 전북 정읍이 아니라 전남 장성에 있는 백암산 백양사도 단풍의 아름다움에서 뒤지지 않는다. 특히 쌍계루를 배경으로 단풍과 함께 물에 투영되는 모습을 찍으려고 매년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조금 힘들게 발품을 팔아 약사암까지 올라가 백양사를 내려다보는 경치도 단풍 핫플레이스로 꼽히고 있다. 아기 손바닥을 닮은 애기단풍이 백양사 일대 단풍의 특징이다.)

순창 강천산

대부분 평지로 잘 걷기만 하면 되는 코스이다.

단풍 시즌이면 매일 수만 명이 방문하는 곳이라, 내장산을 향해 “단풍 명소 1등 자리를 내놓으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다만 군립공원인 점이 조금 아쉽다.

단풍 시즌 주말 낮에 아무 생각 없이 가면 강천산 진입구간에서 2~3시간 대기할 수도 있다. 극강의 주차 전쟁을 치른 뒤, 단풍이 불타오르는 매표소에서 출발한다. 시원하게 물줄기가 떨어지는 병풍바위를 거쳐 강천사를 지나고 구름다리 현수교를 통과하여 구장군폭포까지 이르는데 3㎞가 조금 넘는다. 걷는 길 양쪽으로 메타세쿼이아 길, 대나무 숲 등 볼거리가 다채로워 전혀 지겹지가 않다. 지상 50m, 길이 75m의 현수교는 짜릿하지만, 현수교 초입부까지 올라가는 계단의 경사가 살짝 힘든 편이다.

강천산 단풍은 지역 특산물인 순창 고추장에 빗대 고추장 단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애기단풍 빛깔이 고추장에 절여 놓은 듯하다는 의미다.

강천산 단풍은 11월 초순 무렵이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속리산 세조길

역시 90% 이상 평지여서 그냥 잘 걷기만 하면 되는 코스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저수지, 목욕소, 세심정을 거쳐 복천암까지 약 3.2㎞의 산책로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암에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왔고, 피부병에 걸렸을 때 요양차 속리산을 왕래했던 길이라고 해서 세조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근 수년간 국립공원이 집중적으로 개발, 단장한 코스다. 전 구간이 소나무 숲이나 저수지 주변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마지막 일부를 제외하면, 코스 전체가 포장도로와 테크 등으로 평평하게 구성되어 있어 남녀노소 편하게 방문할 수 있다.

속리산 세조길 단풍은 10월 말이나 11월 초가 제격이다.

고창 선운사
고창 선운사

고창 선운사

거의 평지여서 잘 걷기만 하면 되는 코스다.

전북 고창 선운사 단풍은 시간이 넉넉하다. 느긋하게 11월 중순에 가도 멋진 풍광을 감상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선운사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평지를 계속 걷는데, 멀리는 선운산 도솔암까지 갈 수도 있으나, 보통은 선운사와 그 옆으로 길게 흐르는 도솔천만 구경해도 제대로 된 단풍 관광을 한다. 도솔천의 물 위로 흐드러진 단풍나무의 모습이 비치는데,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와 촬영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선운사 담을 따라 이어진 빨간 단풍의 빛깔이 그리 고울 수가 없다.

이 밖에 계곡과 어우러진 컬러풀한 단풍이 특징인 지리산 피아골,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처럼 농염한 단풍이 자랑인 동두천 소요산, 차로 드라이브하면서 즐기는 대구 팔공산 순환도로, 독특한 사찰 운치를 간직한 계룡산 갑사 가는 길, 대학교 중에는 가장 멋있다는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등도 손꼽히는 단풍 명소이다. 그리고 경기도의 곤지암 화담숲과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등은 학습 차원에서 단풍을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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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섭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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