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중학교 동창이 불쑥 ‘이민’ 얘기를 꺼냈습니다. 이 친구는 우울한 표정으로 “이 나라에 정나미가 다 떨어졌다”고 하더니 “진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대기업 임원인 이 친구는 최근 정부의 이른바 ‘적폐 수사’ 대상으로 내몰려 검찰에 여러 차례 불려다녔다고 합니다. 결국 기소까지 돼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이 친구는 “구속이 안 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서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검찰이 짜놓은 각본대로 수사를 하고 기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 이성적인 항변이 통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평생 회사에서 해온 일을 앞에 놓고 젊은 검사들이 죄를 따져 물을 때 말 못 할 모욕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친구의 항변만 들어보면 검찰의 수사 자체가 무리한 ‘대기업 손보기’로 보였습니다.

이 친구의 이민 각오는 빈말이 아닌 듯했습니다. 이미 이민 갈 나라와 도시까지 다 물색해놨고 현지 답사도 갔다 왔다는 겁니다. 같이 이민 갈 친구들도 모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고른 곳은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였습니다.

그는 쿠알라룸푸르가 “영어 통하고, 물가 싸고, 치안이 좋다”며 자랑했습니다. 골프를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라고 했습니다. 한참 쿠알라룸푸르 자랑을 하다가 그가 덧붙인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다인종 국가인데도 관용적인 사회다. 아마 여러 인종이 섞여 살아가야 하니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문화가 생긴 것 같다. 법과 질서도 잘 지킨다. 우린 단일민족이라면서도 왜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줄 모르겠다.”

결국 이 친구가 조국을 떠날 생각을 품게 만든 것은 우리 내부의 ‘적의’일지 모릅니다. 적과 아군을 나누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적대시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를 따뜻한 관용사회를 그리워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즘 이 나라를 등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 친구만이 아닌 듯합니다. 최근 보도를 보면 한국 국적 포기자가 3만명을 돌파해 최근 10년 사이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고 합니다.

물론 법무부는 ‘행정 처리’가 늘어난 결과일 뿐 실제 국적을 포기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지만 야당들의 좋은 공격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소득주도성장 등 정부의 정책 실패가 국민들이 이 나라를 등지게 만들고 있다고 야당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추락하는 대통령 지지율이 말해주듯이 실제 이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접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듯합니다. 정권 초 응원을 보내던 사람들도 이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경우를 꽤 봤습니다.

정책도 정책이지만 지지자들조차 등 돌리게 만드는 더 중요한 요인은 태도 같습니다. 아집과 적의만 앞세워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세워도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이 정부가 진짜 포용성장을 하려면 태도부터 포용적으로 바뀌어야 할지 모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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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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