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오래전 문 대통령과 봉하마을의 평상에 같이 앉아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막 출범한 2003년 2월 말쯤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노 대통령의 형인 건평씨가 국세청 인사 개입 논란을 일으켜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때였습니다. 건평씨를 만나러 봉하마을의 집을 찾아갔는데 집주인은 온데간데없고 평상에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과 이호철 민정비서관이 우두커니 앉아 있더군요. 주변에 기자들이 한 명도 없어서 ‘이게 웬 떡이냐’며 같이 평상에 앉아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온화한 미소만 지은 채 거의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이호철 비서관은 말을 꽤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비서관은 “아직 청와대 조직이 세팅도 되지 않았는데 형님이 사고를 치셨다”며 궁시렁대더군요.

그날 ‘목욕하러 갔다’는 건평씨는 날이 거의 저물 무렵이 돼서야 신발을 끌면서 나타났습니다. 건평씨의 표정은 문재인 대통령을 보더니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군요. 세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걸 쫓아 들어가려고 할 때 문 대통령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기자님은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날 집 안이 들여다보이는 창밖에 붙어 서서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거실 풍경을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물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풍경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문 대통령이 엄격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는데 그 앞에 앉아 있는 건평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더군요. 딱 사고친 학생을 훈계하는 선생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문 대통령이 연장자인 ‘형님’도 어려워하는 엄격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 기억을 불러낸 건 이 글을 쓰는 마감 날 지켜본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때문이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이 추구해온 정책을 옹호하더군요. 신년 기자회견장에서는 김예령 경기방송 기자가 문 대통령을 향해 돌직구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실 경제 상황이 얼어붙어 있고 국민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현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고 변화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근거는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순간 대통령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 질문에 “30분 내내 말씀드린 사안”이라며 “필요한 보완은 해야 하지만, 정책 기조는 유지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고 답했습니다. “새로운 답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고도 하더군요.

문 대통령은 이날 각종 지표와 수치상 ‘어설픈 실험’이 망치고 있음이 분명한 기존 경제 정책을 계속 밀고나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지난해 기자회견과 달리 ‘경제’와 ‘성장’을 많이 언급하긴 했지만 수정 요구를 받고 있는 ‘소득주도성장’ 등 기존 정책 기조에 대해서는 비판을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자영업자가 죽어나가고 일자리가 없어져야 대통령이 실물경제의 어려움을 알지 모르겠다”며 허탈감을 호소한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이날 기자회견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문 대통령의 엄격함이 고집불통 이미지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대통령이 귀를 닫으면 국민들은 마음을 닫습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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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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