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이다. 가정은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에 가장 문제적인 존재가 아버지다. 과연 이상적인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은연중에 영화 ‘대부’의 주인공을 떠올린다. 그는 가족이나 조직원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애롭고 공정하다. 반면 외부인이나 적대자에게는 가차 없이 냉혹하고 무자비하다. 이것이야말로 온갖 깡패 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다.

우리는 왜 이런 깡패 영화를 끊임없이 소비할까. 왜 이런 깡패 아빠를 은근히 갈망할까. 이 심각하고도 흥미로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는 명저가 있다. 바로 이탈리아 정신분석학자 루이지 조야의 ‘아버지란 무엇인가’(The Father: Historical, Psychological and Cultural Perspectives·2001)이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해주듯이 인류사적·심리적·문화적 측면에서 아버지 또는 부성(父性)의 탄생과 변화를 거시적으로 추적해본다.

무엇보다 저자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양면적 감정에 주목한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친절하고 공평하고 또 정의로워야 해. 그리고 나를 사랑해야 해. 하지만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때에는 제일 강한 사람이어야 해. 폭력이나 나쁜 방식을 사용해서라도.” 이것이 이 책의 핵심 개념인 ‘부성의 패러독스’다. 여기에 부성의 탄생 비밀도 담겨 있다.

거의 모든 포유류는 암컷의 발정기 동안 경쟁에서 승리한 극히 일부의 수컷만 교미의 특권을 누린다. 대부분의 수컷은 자신의 넘쳐흐르는 정액처럼 쓸모없는 존재로 생을 마감한다. 한편 교미에 성공한 수컷도 교미 이후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따라서 자식에 대한 개념조차 없으며, 아비라는 인식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임신과 출산과 양육은 오로지 어미의 몫이다.

그런데 구석기시대 언젠가 인류에게 대사건이 벌어졌다. 인류는 경쟁보다 협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자연선택의 법칙은 최초로 문명적 규칙에 역전당했다. 남성은 더 이상 생식을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에 맞춰 여성의 발정기도 사라졌다. 마침내 남녀가 언제나 평화롭게 성적 결합을 향유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성적 결합을 넘어 자연스럽게 정신적 유대감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남성은 성적 관계 이후에도 여성과 함께하며 자식을 책임지는 존재로 변모했다. 마침내 ‘아버지’가 탄생한 것이다. 이제는 멀리 나가 사냥을 한 다음 사냥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귀가나 귀향은 남성의 내면에 강렬한 원초적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부성은 자연적 본능이 아니라 문명적인 산물이다. 하지만 원초적 남성성이 완전히 소멸되기는 어렵다. ‘남성들의 영혼 저 깊은 곳에는’ 본능적 충동과 문화적으로 훈련된 의지가 여전히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이처럼 부성 또는 아버지는 내면적으로 갈등적인 존재다. 바로 그것이 ‘부성의 패러독스’의 내재적 근거가 되고 있다.

언제부터 일부일처제와 부권사회가 확립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신화를 통해 보면 그리스 시대는 이미 확고한 부권사회였다. 그리스 신화에는 남신과 여신이 함께 등장한다. 하지만 여신들도 겉만 여성이지, 실제로는 모두 강인한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 이미 여성이나 어머니는 서사(敍事)에서 제외되고 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이런 남성 중심의 서사를 더욱 강화한다.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오로지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 싸우는 영웅이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없다. 반면 또 다른 영웅 헥토르는 가장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가정과 국가의 보전을 위해 싸운다. 이런 문명적 아버지가 원시적 남성인 아킬레우스에 의해 무참히 패배하고 만다.

오디세우스는 진일보한 아버지상이다. 그는 충동적인 남성성을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자제력을 발휘하여 일을 도모할 줄 안다. 결국 그는 외부의 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치고 가족과 가정을 무사히 탈환한다. 한마디로 그는 원시성과 문명성을 겸비한 영웅이다. 그리하여 부성의 패러독스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이것이 그가 아버지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이런 서사는 그 이후 문학작품은 물론 철학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자가 아버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생각이 1000년 이상 이어졌다. 한편 로마 건국 서사시인 ‘아이네이스’의 주인공은 국가의 존속과 계승을 위해 충동을 철저히 억제하고 고도의 책임감을 발휘한다.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 시대보다 한층 더 엄격한 부성이 확립되었다.

중세사회는 기독교가 지배한 사회였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하늘의 아버지를 절대시하고 피붙이 형제애보다 신앙의 형제애를 중시한다. 이리하여 중세의 부성은 로마의 엄격한 부성보다는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부권은 여전히 확고했다. 바로 신분제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삶과 직업은 고스란히 자식에게 계승되었다. 거기서 아버지는 당연히 스승이자 모델이었다.

근대로 진입하면서 아버지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흔들렸다. 르네상스를 거치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고무되었다. 무엇보다 계몽사상과 정치혁명의 여파로 일체의 권위가 부정당했다. 부권도 역사상 최초로 ‘부정적’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는 일터로 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자식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교육은 국가가 맡았다.

오늘날의 현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아버지는 가정의 중심적 지위를 상실했고 자식들에게 모델이 되기도 어렵다. 오직 돈을 벌어다가 가족을 부양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부권의 몰락을 통해 억압적인 가부장제가 철폐된다고 환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성이 문명의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순기능도 결코 무시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실제로 오늘날 부성의 부재 시대를 맞아 사람들은 왜곡된 형태로 부성을 갈망한다. 청소년들은 강한 또래에게 이끌려 범죄에 휘말린다. 또한 ‘대부’를 비롯해 수많은 깡패 영화들이 열광적으로 소비된다. 거기에는 한결같이 부성의 패러독스를 강렬하게 자극하는 서사가 장치되어 있다. 이처럼 부성을 파괴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 현대인의 모순적 초상이다.

‘아버지란 무엇인가’는 부성이 문명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역설한다. 모성이 본능인 측면이 강한 반면 부성은 본능을 억누르고 문명적으로 학습된 결과다. 하지만 남성의 영혼 심층에서는 본능적 야만과 훈련된 문명이 여전히 충돌하고 있다. 따라서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자식이 생긴다고 해서 저절로 아버지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화적으로 훈련이 필요하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무자격’ 어머니보다 ‘무자격’ 아버지가 압도적으로 많다.

저자는 부성의 순기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각자 의지를 가지고 부성을 추구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나 부성도 과거처럼 획일적 모습을 띠기는 어렵다. 당연히 일률적으로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마땅치 않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부성의 부재를 넘어 가족의 부재로 치닫고 있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부성과 ‘또 다른’ 가족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이래저래 인류 문명은 대격변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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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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