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장마철 우중(雨中) 산책을 하다 보면 빗속을 달리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얼굴은 땀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물기에 흠뻑 젖고 머리에서는 김이 나지만 다들 얼굴은 괴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우중에 한강변에서 목격되는 달리기 매니아들의 표정에서는 오히려 뭔가에 취한 듯한 기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른바 ‘러너스 하이’를 느낄 때의 표정이 저런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달리기 매니아들을 보면 항상 드는 의문이 왜 인간은 뛰느냐는 겁니다. 중독성이 가장 강한 운동 중 하나가 달리기라고 하지만 달리기에는 그 정도로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달리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나 역시 달리고 싶은 충동이 자연스럽게 일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싱가포르에 출장갔을 때 달리기가 도시를 일깨우는 듯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클락키의 한 노상카페에 앉아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석양을 등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석양을 배경으로 달리는 무리가 점차 커지는데 도심의 빌딩에서 운동복과 운동화 차림의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와 달리는 무리에 속속 합류하더군요. 갑자기 쏟아져 나온 러너들이 신기해서 현지 교민에게 물어봤더니 “여기 사람들은 하루 일과만 끝나면 저렇게들 뛴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열기가 밤으로 향하는 도시를 야성의 분위기로 일깨우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왜 달리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지만 달리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해석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이른바 ‘본 투 런(Born to Run)’이라는 겁니다. 크리스토퍼 맥두걸이 쓴 같은 제목의 책을 보면 ‘본 투 런’의 세계는 깊고도 오묘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라라무라(달리는 사람들)라고 불리는 멕시코 협곡에 사는 타라우마라족의 얘기를 합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인류의 생존 수단이었던 달리는 전통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에렉투스는 동시대를 살았던 네안데르탈인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근력도 약하고 덩치도 작았고 추위에 대한 적응력도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유일하게 잘한 것이 바로 달리기였다고 합니다.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이들이 네안데르탈인을 누르고 마지막 생존자가 된 비결이었다는 겁니다.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침팬지에게는 달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아킬레스건이 없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달리기 능력이 진짜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오는 마감 날 난데없이 달리기 잡설을 늘어놓는 것은 빗속에 나가서 뛰고 싶을 만큼 요즘 주변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져서일 겁니다. 내우와 외환이라는 말이 쉽게 와닿는 요즘입니다. 쉽게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불안감이 모두를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달리기 매니아들은 항상 달리기가 만병통치약이라는 듯이 말합니다. 크리스토퍼 맥두걸도 앞의 책에서 이렇게 썼더군요. ‘달리기에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기쁨과 두려움이 모두 들어 있다. 우리는 두려울 때도 달리고, 기쁨에 취해서도 달리며, 문제에서 도망치려고 달리고, 즐거움을 찾아서도 달린다.’

이번 주말은 비가 와도 나가서 달려봐야겠습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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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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