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 사람들은 지난 몇 년간 모두가 둘러앉아 ‘언젠가는 우리가 (집권당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하는 일이 왜 반드시 언젠가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어떤 역사의 법에도 한 정당이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1906년 자유당은 선거에서 최대의 압승을 했다. 그러고도 10년이 채 안 되어 정당으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 이후 한번도 집권을 해보지 못하고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보수당의 운명이 자유당과 같이 될지 여부는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겸손과 능력에 달려 있다.”

2005년 영국에서 출간된 ‘잉글랜드 보수당의 이상한 죽음(The Strange Death of Tory England)’이라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영국의 보수당은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 세 번째 패배를 당한 후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355석 대 198석이라는 참담한 총선 성적표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데 죽음의 경고까지 날아온 셈입니다.

대처리즘을 앞세워 1970년대 말부터 18년간 장기집권한 관록의 보수당을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은 ‘블레처리즘(Blatcherism)’이었습니다. 41세에 노동당 역사상 가장 젊은 당수에 오른 토니 블레어가 보수당의 정책을 ‘훔쳐와’ 짬뽕한 것이 블레처리즘입니다. 토니 블레어가 제창한 ‘신노동당(New Labour)’ ‘제3의 길(The 3rd Way)’을 두고 영국인들은 블레어와 대처를 합쳤다는 의미에서 블레처리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블레처리즘을 앞세워 노동당은 보수당의 놀이터였던 중도 표밭을 휘저었습니다.

이후 보수당은 어떻게 살아났을까요. 결국 토니 블레어의 처방을 똑같이 베낀 것이 소생의 길이었고, 그 길을 앞장서서 연 사람이 혜성처럼 등장한 데이비드 캐머런이었습니다. 44세에 당수에 오른 캐머런은 “기존의 보수당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존의 당을 해체하는 수준까지 간 뒤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른쪽에 박혀 있던 당을 가운데로 끌고 나왔습니다. 블레어가 한 것처럼 여성, 환경, 복지를 내세우며 노동당의 정책을 과감하게 베꼈습니다. ‘원칙이 없는 기회주의자’라는 혹평이 쏟아졌지만 캐머런은 서민의 행복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면서 ‘사회정의’라는 단어조차 금기시하던 보수당에 중도우파의 색깔을 입혔습니다. 결국 진보언론에서조차 ‘진보적인 보수(progressive conservatism)’ ‘진짜 보수 같지 않은 보수(no right wing enough right)’라는 호평이 나오면서 당 지지율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캐머런은 2010년 총선에서 노동당과 중원에서 다시 맞붙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왔습니다.

이제는 교과서에 실릴 만한 영국 양대 정당의 회생기를 다시 되풀이하는 이유를 잘 아실 겁니다. 한국의 보수당이 처한 현실 때문입니다. 얼마 전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던진 말은 사실 잔인합니다. ‘존재 자체가 민폐’ ‘좀비’라는 극언은 ‘그냥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습니다. 좋게 받아들이면 ‘죽어야 산다’는 말인 셈인데 자유한국당 내에서 기득권을 버리고 죽는 사람, 죽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아 보이질 않습니다.

마감 하루 전날,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죽음을 불사한’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사는 길인지, 죽는 길인지가 사뭇 궁금해집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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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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