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 상원 건물에는 ‘브루미디 회랑’이라는 명소가 있습니다. ‘미국의 미켈란젤로’로 불리는 화가 콘스탄티노 브루미디가 그린 벽화가 수놓아진 긴 복도입니다. 여기에 그려진 벽화의 소재는 미국을 빛낸 인물들과 이벤트들입니다.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과 증기선을 발명한 존 피치, 로버트 풀턴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1863년 벽화를 완성할 당시 브루미디는 앞으로 있을 미국의 영광을 위해 적지 않은 공간을 후대 화가들용으로 비워 뒀는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장면,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이 이 공간을 채워나갔습니다.

오래전 가봤던 미국 국회의사당과 브루미디 회랑을 떠올린 것은 마감날 워싱턴에서 날아든 충격적인 뉴스 때문입니다. 이날 이번 대선이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해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원들이 긴급히 대피하고, 시위대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날 들어온 외신 사진을 보니 미국 국회의사당이 맞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숙하던 민주주의의 전당이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더군요. 자욱한 연기 속에서 뭔가를 외치는 트럼프 지지자들은 광신도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트럼프가 이겼다’는 팻말을 든 시위대가 깃발을 흔들면서 벽을 기어오르는 의사당 외곽 사진을 보니 혁명의 분위기까지 느껴졌습니다. 미국 정치인들도 이날 사태를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반란’으로 규정하는 분위기입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공화당 소속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선거 결과에 대한 논쟁이 민주 공화국이 아닌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후진국)에서처럼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런 반란은 우리나라의 평판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미국 교포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을 보니 이날 직원들에게 반차를 허용하는 직장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미국 국민들이 받은 충격도 상당하다는 걸 짐작하게 합니다.

이번 사태를 불러온 책임은 두말할 것도 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져야 합니다. 그는 이날도 시위대들을 ‘애국자’라고 부르면서 시위를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아예 대놓고 1면 기사 제목을 ‘트럼프가 사주한 폭도들 국회의사당 난입’이라고 뽑았더군요. 오죽했으면 이날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트럼프의 입을 봉쇄하는 조치까지 취했을까 싶습니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이 떠안은 시한폭탄인 셈입니다. 트럼프가 백악관을 떠나기까지 남은 2주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면서 탄핵론도 다시 불붙는 분위기입니다.

이번 사태는 결국 트럼프의 ‘증오 정치’가 부른 막장극이라 할 만합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게임의 룰을 무시해온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불러온 참화치고는 피해가 너무 커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로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위태로워질 수 있는지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앞서 언급한 ‘브루미디 회랑’의 남은 벽화 공간에 이번 사태를 기록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습니다. 미국의 영광만 남길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위협받은 치욕의 순간도 벽화로 남겨야 두고두고 교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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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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