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는 특별히 기획한 것도 아닌데 우연찮게 세 개의 기사가 비슷한 주제를 관통해버렸습니다. 조윤정 기자가 쓴 탈북 국군포로 고 허재석씨 스토리와 유민호씨가 터키에서 인터뷰한 한국전 참전용사 이제트 귄 얘기, 그리고 런던통신에 실린 권석하씨의 영국 현충일 참관기입니다. 세 기사의 포인트와 결은 다르지만 모두 ‘전쟁과 희생, 그리고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터키 참전용사 이제트 귄과 국군포로 허재석씨는 모두 한국전에서 인생의 격랑에 휩쓸린 사람들입니다. 허씨는 고향 정미소에서 일하다 꽃다운 20대에 군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에 포로로 붙잡혀 반세기를 북한에서 광부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북한을 탈출해 70대에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북한에 남은 국군포로 동료들의 참상을 고발하고 우리 정부의 송환 노력을 압박하기 위해 자신이 겪은 일들을 수기 형식으로 출간했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버렸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증언으로 인해 북에 두고 온 아들이 고문을 받다 죽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지난 11월 2일 세상을 뜬 허씨에게 아마 한국전은 평생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을 겁니다.

올해 92세인 터키인 이제트 귄씨에게도 한국전은 평생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터입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터키 군인들이 단 하루 만에 한 전투에서 40%가 목숨을 잃었다는 건 이번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바로 이제트씨가 용케 살아남은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벌어진 전투 얘기입니다. “아군 한 명당 10명의 비율로 중공군이 몰려왔다”는 이 전투에서 이제트씨도 허리에 파편을 맞았지만 치료 후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는 70년 전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사선을 함께 넘나들던 전우들을 절대 잊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터키의 많은 참전용사들이 귀국 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렸고 술과 마약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뜬 친구들도 많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인터뷰하러 터키의 작은 마을까지 찾아온 유민호씨의 손을 잡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는데 이 노병에게 한국과 한국전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유민호씨는 저에게 “터키 퇴역군인연합회 소속 노인들이 꼬깃꼬깃 보관해뒀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인터뷰에 따라왔다”고 취재 후일담을 전했습니다. 이 터키 노병들의 마음에 아마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참전용사인 허재석씨와 이제트 귄씨를 ‘어쩌다’ 소환했지만 영국인들을 그렇지 않나 봅니다. 지난 11월 11일 치러진 영국의 현충일을 지켜본 권석하씨의 소감이 그렇습니다. “영국인들은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 같다”는 짧은 말에 현충일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그들의 유별남이 담겨 있습니다. 올해도 전국 수십만 곳에서 자발적인 행사가 열렸다는데 현충일을 빨간날 정도로 알고 있는 우리와는 행사의 질과 규모가 무척이나 다릅니다. 그들은 왜 100년도 더 지난 1차 대전 참전용사들까지 수시로 불러낼까요? 기사에 소개된 한 영국 언론인의 칼럼 대목이 정답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자유와 삶의 방식(our way of life)을 보호하기 위해 한 봉사와 희생을 기억하는 날’. 현충일 영국인들이 가장 많이 되새기는 문구가 ‘우리들이 잊지 않기 위해(Lest we forget)’라는데, 과거를 잊어서는 현재가 없다는 걸 그들은 너무나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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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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