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지배선 교수 통설 뒤엎는 새 학설 주장
“인도 불경 한자로 번역한 구마라습이 기파랑”
지배선 교수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지배선 교수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모래 가른 물가에/ 기랑(耆郞)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여/ 일오내 자갈벌에서/ 랑(郞)이 지니시던 마음의 갓을 좇고 있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곳가리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등장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다. 찬기파랑가는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뜻이며, 기파랑은 신라 화랑으로 알려져 있다. 찬기파랑가는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충담사가 지었으며 신라가 탄생시킨 민족문학인 향가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다. 그런데 이 기파랑은 화랑이 아니라 ‘서역의 승려’라는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연세대학교 지배선 교수는 ‘고구려 유민 고선지와 토번 서역사’란 논문에서 “찬기파랑가에 등장하는 기파(耆婆)는 불경 번역으로 유명한 고승 구마라습(鳩摩羅什)”이라며 “따라서 찬기파랑가는 화랑이 아니라 승려 구마라습을 찬미한 노래”라고 주장했다.

지 교수는 망한 고구려의 유민 이정기의 제나라 건국, 고구려인 노예 왕모중의 당나라 황실 쿠데타 등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연구를 심도있게 진행해 온 역사학자다. 그는 “고선지와 서역에 관한 논문을 쓰던 중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며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왔던 기파의 실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2월 28일 지 교수를 만나 ‘기파=서역 승려’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들었다. 서역(西域)은 한나라 때 ‘중국의 서쪽지방’을 뜻하던 말로 쓰였으나 당나라 때를 거치면서 타클라마칸사막~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이란과의 국경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개념이 확장됐다.

- 찬기파랑가가 화랑이 아니라 구마라습이란 서역 승려를 찬미한 노래라고 했다. 근거는 무엇인가.

“지극히 간단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찬기파랑가를 지은 승려 충담은 신라의 대표적 학승(學僧)이다. 기파가 누구인지는 명백하지 않다. 당시의 대표적 학승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 어떤 사람을 막연히 찬미할 수 있었겠나. 관련 내용은 삼국유사를 보면 보다 상세히 알 수 있다. 고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경덕왕은 능력있는 승려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은 신하들은 수소문 끝에 위의(威儀)를 갖춘 자(잘 차려입은 사람)를 데려왔다. 이게 경덕왕 23년(764년)의 일이다. 그런데 경덕왕은 위의를 갖춘 자를 물리쳐 버린다. 놀란 신하들은 다시 수소문 끝에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인 납의(納衣)를 걸치고 삼태기를 걸머진 승려 충담을 데려왔다. 그러자 왕이 크게 기뻐했다는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이는 충담이 불교 교리에 해박한 고승이란 사실을 의미한다. 왕은 겉모습이 아니라 학식에 주안점을 두고 승려를 평가했던 것이다. 왕은 이 남루한 행색의 승려에게 ‘당신이 찬기파랑가를 썼느냐’고 묻는다. 충담이 그렇다고 하자, 왕은 ‘이번엔 나를 위해 노래를 하나 지어달라’고 청한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안민가(安民歌)다. 경덕왕 24년(765년)에 쓰여진 안민가는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길’을 읊은 향가로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도를 담고 있다.”

- 그것만으로 기파가 구마라습이라고 단언하긴 힘들 것 같다.

“구마라습은 유마경이나 법화경처럼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돼 있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다. 학계에선 구(舊)번역의 대가로 구마라습을 꼽고 신(新)번역의 대가로는 현장을 꼽고 있다. 그만큼 구마라습은 불교를 연구하고 수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인 것이다. 구마라습에 관한 대표적 기록으로는 진서(晉書)를 들 수 있다. 이 책 권95 구마라습전(鳩摩羅什傳)에는 ‘구마라습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으로 천축(天竺·인도) 사람’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신강(新疆)인민출판사가 펴낸 장평(張平)의 구자-역사문화심비에는 ‘구마라습의 어머니는 구차국의 임금 구자왕(龜玆王)의 누이동생이며 이름은 기파(耆婆)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구차국은 지금의 타클라마칸 사막 위쪽에 존재했던 고대 왕국이다.) 그리고 진서에는 ‘기파는 라습의 별명이다(耆婆卽羅什之別名也)’라고 돼 있다. 명백한 것은 양(梁·1500년 전 중국 남조시대에 존재했던 국가)나라 때의 승려 혜교(慧皎)가 쓴 고승전(高僧傳)의 기록이다. 혜교는 이 글에서 ‘습(什)의 이름은 원래 구마라기파(鳩摩羅耆婆)였다. 서역에서 이름을 지을 때는 대개 부모를 본으로 삼는다. 습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이고 어머니의 자(字)는 기파(耆婆)였기 때문에 아울러 취해서 이름으로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구마라습을 왜 구마라기파라고 불렀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된다.”

- 구마라습에 관한 보다 상세한 문헌은 없나.

“혜교의 고승전이 가장 상세하다. 고승전 권2 ‘진장안구마라습전(晉長安鳩摩羅什傳)’에는 구마라습은 천축인이며 중국 이름은 동수(童壽)라고 돼 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재상(당시엔 귀족 신분이 세습되고 있었다)이었는데, 라습의 조부는 달다(達多)로 재기가 매우 뛰어났다. 아버지 구마염은 총명하고 기상이 높은 데다 절의(節義)를 갖고 있었지만, 재상의 지위를 잇게 되었을 때 이를 사양하고 피해 총령(秘嶺·지금의 파미르고원)을 넘었다. (구차국의) 구자왕은 그가 세속의 영예를 버렸다는 것을 듣고 경모하여 스스로 성 밖까지 나아가 출영(出迎)하고 국사(國師)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 기록은 구마염이 어떤 연유로 구자국에 오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또 출가한 구마염이 구자왕의 여동생과 결혼(당시 서역에선 승려의 결혼이 가능했다)하게 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구마라기파(耆婆)라는 이름의 동명이인이 있었을 가능성은 없나.

“사고전서(四庫全書·청나라 건륭제 때 그때까지 나온 중국의 주요한 책을 모아 출판한 총서)에 등장하는 사람 중 기파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구마라기파가 유일하다. 이는 당시의 풍습과도 관련이 있다. 고대 중국과 고구려에서는 평민이 왕처럼 지체가 높은 사람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일례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중국 역사서는 연개소문을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연(淵)자가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의 연(淵)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을 의미하되 발음은 다르게 하도록 연(淵)자를 천(泉)자로 바꿔 적은 것이다. 이 같은 당시 풍습을 고려한다면 지체가 높았던 구마라기파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썼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기파’를 키워드로 해서 컴퓨터로 검색해 봤지만 기파라는 이름을 사용한 다른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

- 기파랑의 ‘랑(郞)’ 자는 화랑에 대한 존칭의 표현 아닌가.

“기파랑의 ‘랑’은 사내아이에 대한 존칭어다. 원래 중국에서 사용되던 표현인데, 이것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까지 흘러들어갔다. 일본에선 아직까지도 사내아이의 이름에 ‘랑(郞)’자를 넣어 존중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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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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