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앞바다 류공다오에 있는 ‘갑오전쟁해전관’. 청나라 북양함대의 함정을 형상화해 지어졌다.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앞바다 류공다오에 있는 ‘갑오전쟁해전관’. 청나라 북양함대의 함정을 형상화해 지어졌다.

서해를 향해 뻗어나온 중국 산둥(山東)반도 웨이하이(威海)에서 배로 20분 떨어진 곳에는 류공다오(劉公島)란 섬이 있다. 국가 5A급(최고급) 관광지로 지정된 이 섬에는 ‘북양해군충혼비’란 탑이 서 있다. 중국 최초의 근대 해군인 북양(北洋)함대 건설 100주년인 1988년 세워진 28m 높이의 탑이다.

류공다오는 1세기 전만 해도 동아시아의 해군력이 집중됐던 곳이다. 지금의 하이난다오(海南島)와 같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양함대의 모항으로, 북양수사제독서(함대사령부에 해당)와 수사학당(해군사관학교에 해당)이 류공다오에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류공다오는 청일전쟁(1894~1895) 때 일본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초토화됐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직접 현판을 쓴 류공다오의 중국갑오전쟁(청일전쟁)해전관에는 바닷속에서 건져낸 북양함대의 전함과 녹슨 함포, 닻 등이 남아 있다.

류공다오에서의 참패 이후 지난 100여년간 중국은 변변한 해군을 갖춘 적이 없다. 중국이 해군기지와 함대 건설에 열을 올리는 것은 북양함대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북양함대는 1888년 청나라 말 실권자인 북양 대신 리홍장(李鴻章)이 주도해 만든 함대다. 독일 조선소에서 건조한 철갑선 정원(定遠)함과 진원(鎭遠)함을 주력으로 하는 북양함대는 ‘동양 최강’이란 평가를 들었다.

1886년 정원함과 진원함을 앞세운 북양함대가 일본 나가사키(長崎)항에 입항했을 때는 일본 조야(朝野)가 긴장했다. 나가사키에 상륙한 청나라 수병이 위세를 부리며 거들먹거리자 일본 낭인(浪人)들이 청국 수병 5명을 칼로 베는 사건까지 터졌다. 하지만 격분한 리홍장이 ‘함포 사격’을 운운하자 일본 메이지정부는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북양함대 참패가 트라우마로

이후 일본 메이지정부는 함대 건설에 착수한다. 메이지천황도 직접 함대 건설 성금을 하사했다. 메이지정부는 정원함과 진원함과의 거함대포 결전에서 이길 방법은 빠른 기동력과 철저한 준비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철저한 준비는 청일전쟁 때 십분 위력을 발휘한다. 청일전쟁 개전 초 일본연합함대는 서해안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병력수송선인 고승(高升)함을 수장시킨다. 당시 순양함 나니와(浪速)의 함장으로 고승함을 격침시킨 인물이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다. “이순신에 비하면 하사관도 안된다”고 자신을 평한 도고 제독은 훗날 러일전쟁 때 경남 창원의 진해만에 웅크리고 있다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마도와 독도 바다에 수장시킨다. 진해 제황산 꼭대기에는 도고 제독이 이끈 일본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三笠)호의 선교를 본떠 만든 진해탑이 서 있다.

북양함대는 압록강 어귀 대동구(大東溝)에서 벌어진 황해해전(압록강해전)에서도 여지없이 참패했다. 당시 치원(致远)함을 지휘하던 등세창(鄧世昌) 제독은 수장당한다. 함대사령부인 류공다오 앞에서 벌어진 웨이하이해전에서도 북양함대는 일본연합함대의 어뢰정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태평천국군 출신으로 해전 경험이 전무했던 북양함대 총사령관 정여창(丁汝昌) 제독은 음독자살로 목숨을 끊는다. ‘동양 최강’으로 군림했던 북양함대의 패전은 중국 해군을 줄곧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됐다.

관광휴양지 칭다오의 또 다른 얼굴

결국 북양함대가 류공다오에서 남서쪽으로 200여㎞ 떨어진 칭다오(靑島)에서 부활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다. 칭다오에는 중국 해군의 3대 함대 중 가장 막강한 전력을 갖춘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다. 칭다오 자오저우만(膠州灣)은 하이난다오 위린항을 능가하는 천혜의 군항이다. 세계 최장의 해상대교(길이 41.58㎞)가 놓여 있는 자오저우만은 입구가 좁은 반면 안은 넉넉해 함정을 정박하고 은닉하는 데 탁월한 입지조건을 자랑한다.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칭다오 역시 중국의 대표적 관광휴양지다. 시내 곳곳에 해군 레이더기지가 있지만 매년 8월이면 ‘동양의 옥토버페스트’인 칭다오맥주축제가 열려 시내가 떠들썩하다. 2008년 8월에는 베이징올림픽 요트경기가 열렸고, 일찍이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도 여름이면 칭다오에서 피서를 즐겼다. 남해함대가 주둔하는 하이난다오와 마찬가지로 관광휴양지와 해군기지가 공존하는 셈이다.

중국 해군이 칭다오에서 북해함대를 키워낸 것은 1960년부터다. 처음에는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4척의 구축함이 전부였다. 하지만 북양함대 패전 후 100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중국은 북해함대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장착한 핵잠수함으로 무장한 최정예 함대로 키워냈다. 지난 2009년 중국 건국 60주년에 맞춰 후진타오 주석이 관함식을 거행한 곳도 칭다오항이다. 당시 한국을 포함해 21개국 대표단이 관함식을 지켜봤다.

현재 칭다오에 함대사령부를 두고 있는 북해함대는 칭다오의 자오저우(膠州)기지와 뤼순(旅順)기지, 후루다오(葫蘆島)기지를 거점항으로 운용하고 있다. 특히 북해함대의 주력이 있는 칭다오 자오저우해군기지는 1988년 새로 정비한 3곳의 방파제와 2곳의 도크, 4곳의 접안시설(부두)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칭다오 남쪽 자오난(膠南)시에 새로 조성 중인 샤오커우쯔(小口子)해군기지 역시 길이 600m의 접안시설 3곳을 비롯해 각각 2㎞에 방파제 2개를 완비하고 있는 것으로 위성사진 판독 결과 확인됐다. 샤오커우쯔해군기지는 하이난다오와 함께 오는 8월 1일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에 맞춰 취역할 예정인 항공모함 바랴그(가칭)호의 유력한 모항 후보로 꼽힌다.

황해·발해 방어가 주 임무

수도 베이징과 톈진의 길목인 황해와 발해를 방어하는 것이 북해함대의 주 임무다. 북해함대는 한반도 유사시에도 가장 먼저 투입될 해군부대로 거론된다. 칭다오에서 대한민국 해군 제2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평택해군기지까지는 직선거리로 570㎞, 제주해군기지가 들어설 예정인 서귀포 강정읍까지는 620㎞에 불과하다.

부지 조성부터 난관에 봉착한 제주해군기지와 달리 칭다오해군기지에 대한 중국민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독일, 일본, 미국에 유린당한 역사를 딛고 일어선 자부심이다. 사실 칭다오를 군항으로 본격 조성한 것은 독일 해군이다. 독일 선교사 피살을 빌미로 1898년 칭다오를 점령한 독일 해군은 청나라로부터 칭다오를 99년간 조차하는 권리를 얻어낸다. 일본 역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칭다오항을 점령했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에는 미 해군이 장제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1949년까지 4년간 칭다오에 주둔했다. 랴오둥반도의 뤼순항을 조차해 남하하려는 소련(현 러시아) 해군을 봉쇄하기에 칭다오가 최적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칭다오 시내 해안가 해군박물관에는 연중 참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퇴역한 구축함, 순양함, 상륙함, 잠수함에 직접 승선해 보려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중국이 해양굴기에 나선 배경이 서려 있는 곳이 류공다오와 칭다오다.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