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 밑바닥의/ 내 발을 보는/ 오늘 아침의 가을’.

하이쿠 작가 요사 부손(与謝蕪村)의 작품이다. 온천 마을의 시간은 멈춰 있는 걸까. 에도시대 중기(中期)의 감성을 문득 가을 하코네(箱根)에서 느꼈다.

하코네는 일본 간토 지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온천마을이다. 서일본에서 동일본으로 가는 관문에 위치해서인지 에도시대에는 숙박을 할 수 있는 온천 마을로 유명했다.

하코네의 가장 큰 장점은 ‘접근성’이다. 도쿄 신주쿠역에서 급행열차 로맨스카(Romance Car)를 타고 1시간35분을 달리면 하코네유모토역에 닿는다.

단풍이 한창인 11월 둘째 주, 로맨스카에 올랐다. 로맨스카는 전 좌석이 지정석이다. 웹사이트에서 미리 예약한다면 맨 앞 차량의 전망석에 앉을 수 있다. 통유리 너머의 풍경을 감상하며 에키벤(駅弁·철도역에서 파는 도시락)을 먹는 것도 괜찮겠다.

하코네유모토역에 내려 곧장 안내센터로 갔다. ‘요시이케 료칸(吉池旅館)’이라고 행선지를 밝히니, “셔틀버스도 있지만 걸어가도 좋은 거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미쓰비시 창업주 집안의 별장을 료칸으로

요시이케 료칸은 하코네의 수많은 료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으로 꼽힌단다. 중심가에 위치해 있기도 하지만 수질이 좋고 정원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끓인 물을 사용하지 않고, 원천수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가케나가시’ 방식을 고수한다. 원천 자체를 6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일본의 료칸 중에는 온천수에 끓인 물을 섞거나, 온천수를 끓여서 내보내는 곳도 있다.

체크인을 한 후 직원을 따라 객실로 향했다. 경사진 땅에 맞춰서 짓느라 내부 구조가 다소 복잡하다. 1층에 해당하는 료칸의 2층에는 노천탕이 딸려 있는 특별실 4개가 모여 있다. 3층부터 6층까지는 다다미방만 있는 일반 객실이다.

특별실마다 이름을 붙였다. 각각 ‘도오리(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 네무(자귀나무), 목세에(물푸레나무), 센료(죽절초)’. 객실 문을 여니 단정한 다다미방이 보인다. 그 너머는 여름의 자취가 물러나지 않은 가을의 정원.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방에서 3만3000㎡(1만여평)의 정원으로 바로 나갈 수 있다.

한편에 놓여 있는 슬리퍼를 신고 푸른 관목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돌과 나무와 연못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는 일본식 정원의 전형이다. 오솔길 옆의 연못에는 팔뚝보다 더 큰 잉어 수십 마리가 노닐고 있다. 심심했던지 사람이 다가가자 앞다투어 몰려온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뻐끔거리는 입이며 색색가지의 무늬를 구경하다 보니 왜 잉어가 일본에서 애완동물로 대접받는지 알 것도 같았다.

연못의 징검다리를 건너 흙길을 걷다 보니 일본 전통 가옥이 나온다. ‘국가등록 유형문화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미쓰비시그룹을 창업한 이와사키 가문의 별장이었던 건물이다. 1904년에 지어졌다. 별장이 료칸보다 먼저 지어졌으니 말하자면 이와사키 별장의 정원 내에 료칸이 있는 셈이다. 요시이케의 정원만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단다.

료칸은 그야말로 ‘휴식’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다다미방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간소하게 놓여 있다. 무늬 없는 벽에는 수묵화만 한 점 걸려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의 휴식에 빠질 수 없는 오락거리인 텔레비전도 한편에 놓여 있다. 그날그날의 방송 편성표도 빠질 수 없다. 호화스러운 무늬의 도자기 재떨이도 눈에 띈다. 담배를 즐기는 숙박객에게는 그 존재만으로도 해방감을 주지 않을까.

옷장 안에는 유카타와 양말, 간단한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놓여 있다. 료칸 안에서는 어디를 가든 똑같은 유카타를 입고 똑같은 양말에 똑같은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것 또한 ‘휴식’의 일환이다.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게 얼마나 편한 것인지 료칸을 나서며 깨달았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가이세키 요리.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가이세키 요리.

시각과 미각의 성찬, 가이세키 요리

료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가이세키 요리’다. 가이세키는 원래 선종의 승려들이 수행을 하며 허기와 추위를 달래려 돌을 데워서 가슴에 품곤 했던 것을 뜻한다. 이후 다도에서 차를 대접하기 전에 약간의 음식을 먼저 내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즘엔 료칸에서 내오는 정식 요리를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 때문일까. 식사 시간이 되면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무릎을 꿇고 음식을 나를 것 같지만, 요시이케 료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다. 숙박객들은 건물 내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한다. 지배인인 이케다씨는 “료칸마다 차이는 있지만 최근엔 방으로 음식을 나르는 방식이 점점 없어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뷔페식 식당을 운영하는 료칸도 있지만, 조용히 쉬면서 식사를 하고 싶다는 손님이 많기 때문에 뷔페식으로는 운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저녁으로 나온 가이세키 코스는 열두 폭 병풍 같았다. 요리 하나하나가 음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흐트러짐 없는 테이블 세팅과 어우러져 약간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단순히 ‘맛있다’는 말보다는 ‘시각과 미각의 협주(協奏)’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2박 이상 묵는 손님에게는 매일 저녁 다른 코스 요리를 내온다.

식사 후 방으로 돌아가니 이불이 깔려 있다. 가만히 창문을 여니 후드득 빗줄기가 보인다. 전용 정원 옆에 있는 노천탕으로 들어갔다. 온천수가 잔잔히 흐르는 소리를 배경으로 빗소리가 들려온다. 밤의 어두움을 뚫고 나뭇잎 위의 물방울이 반짝인다. 전 사회적인 어리광을 조장하는 말이라 여겨 되도록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 단어지만, 이 순간만큼은 쓰지 않을 수 없다. 바로 ‘힐링’. 이곳이 에도시대에 ‘치유 온천’으로 유명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온천물에 잠겨 있자니, 도시 생활의 묵은 각질이 노글노글해진다. 이불 속에 들자 곧장 아침이었다.

비 그친 정원을 바라보다 온천물에 발을 담갔다. 하룻밤 새 정이 든 걸까. 따뜻한 물이 왠지 구슬프다. 도시의 거리로 돌아갈 발이다. 가을 아침 온천에 발을 담갔던 부손도 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의 하이쿠가 이유 없이 애잔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구나.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하이쿠를 읊으며 방을 나섰다.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

나눠 가진 가을 덕에 남은 계절이 외롭지 않겠다.

키워드

#여행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