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1일 베니스 카니발에 몰려든 관광객과 시민들. 각종 가면이 등장하는 베니스 카니발은 정적의 겨울 도시를 삽시간에 흥겨운 술판으로 만든다. ⓒphoto AP
지난 1월 21일 베니스 카니발에 몰려든 관광객과 시민들. 각종 가면이 등장하는 베니스 카니발은 정적의 겨울 도시를 삽시간에 흥겨운 술판으로 만든다. ⓒphoto AP

거의 10년간 겨울 베니스 여행을 지속해 왔다. ‘유럽 여행’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베니스에 베이스캠프를 차려놓고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북아프리카 등 주변을 여행하는 식이다. 겨울의 베니스는 일반 관광객이 많지 않다. 관광객이 몰리는 곳은 베니스 중심인 산마르코광장 주변뿐 성수기인 여름에 비하면 도시 전체가 썰렁하다. 그것도 정오를 전후한 1~2시간 동안만 관광객이 몰리고 오후 5시 이후가 되면 도시는 차가운 정적에 휩싸인다. 베니스는 여름철 관광이 제격이지만 살인적인 물가 탓에 겨울철 관광도 매력이 있다. 관광객에 치이지 않아도 되고 여행경비도 여름에 비해 3분의 1 정도로 줄일 수 있다.

‘공화국 베니스’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의해 사라지기 직전까지 지속된 유럽 최대의 열강 중 하나다. 비잔틴제국이 무너지고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하향세로 들어가지만 대략 1000년간 지금의 뉴욕 같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군림해온, 지중해의 패자(覇者)다. 불과 인구 30만에 의해 창출된 1000년 왕국의 흔적은 21세기 베니스 구석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작은 기둥 하나에서부터 조각, 그림, 교회, 창문, 골목, 광장, 어느 것 하나도 흘려버릴 수가 없다. 간단히 말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같은 것이 베니스 전체에 널려 있다고 보면 된다. 베니스의 겨울은 그 같은 역사를 차근차근 훑으면서 알차게 음미해 볼 수 있는 시기다. 일주일이나 한 달 단위가 아닌, 평생을 연구해도 모자랄 인류문명과 문화의 현장이다.

도시는 얼굴로 존재한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도시라면 단 하나의 사진이나 캐릭터로 압축해 표현될 수 있다. 베니스 관련 사진이나 캐릭터는 무궁무진할 듯하다. 가면은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닐까. 호화찬란한 산마르코성당과 주변 광장, 베니스영화제와 비엔날레, 나아가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는 아쿠아 알타(Acqua Alta) 같은 이미지도 있지만 가면이야말로 베니스를 하나로 압축한 캐릭터가 아닐까.

겨울철의 광란, 가면 카니발

매년 2월 초면 외신의 단골 뉴스가 되는 겨울철 베니스 카니발은 바로 가면의 집단행진곡이라고 볼 수 있다. 관광객이 일시에 몰려들기 때문에 좁은 섬 전체가 터져나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면을 쓰는 순간 뭔가 자신감이 생기는 듯하다. 가면 카니발 시즌은 정적의 겨울 베니스를 심야의 술판으로 바꾸는 유일한 시기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피로 범벅된 ‘좀비 가면’도 대거 등장해 한층 더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다.

필자는 베니스의 가면 카니발이 앞으로 한층 더 세계적 이벤트로 발전할 것이라 확신한다. 가면으로 가려진 익명성에 탐닉하려는 현대인의 취향에도 부합하고, 어제에 대한 향수와 기억에 집착하는 인간적 본능에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중세 옷차림으로 선보이는 베니스 가면 카니발은 유럽 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시간 여행’의 대표적 사례다. 내일과 미래가 세계적 키워드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응답하라 1988’에 열광하듯이 어제의 추억도 되살린다. 인간의 머리는 미래를, 가슴은 과거로 향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베니스는 섬이다. 자동차와 무관한 보행자 천국의 좁은 도시가 베니스다. 따라서 여기저기 걸어다니다 보면 관광객이나 베니스 시민들끼리 서로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된다. 베니스, 아니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차오(Ciao)’다. 한국어로 ‘안녕’에 해당하는 말로, 만날 때 헤어질 때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중국인은 차오가 “중국에서 유래된 인사”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아니다.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s-cio vostro)’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된 가벼운 인사다. 필자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베니스인들은 아마 하루에 수천 번 차오를 외치지 않을까 싶다. 커피점에서, 배 안에서, 길을 걷다가, 조깅을 하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차오를 주고받는다. 극단적으로 베니스에서는 이탈리아어를 몰라도 된다. 차오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생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베니스에서는 차오라는 인사를 주고받는 관계라면 친구의 범주에 들어간다. 얼굴은 물론 이름을 기억하면서 차오를 외치면 곧바로 친구가 된다. 바다의 도시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베니스 선조의 개방 DNA 덕분에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편견이 극히 드문 곳이 베니스다. 베니스의 명물인 투명 핑크빛 2.5유로짜리 ‘스프리츠(Spritz)’는 인사용 알코올 음료다. 친구들한테 인사를 건네며 사주는 술이 스프리츠다.

베니스에서는 한 군데 술집이나 식당을 자주 찾으면 자연스럽게 친구를 갖게 된다. 필자의 경우 ‘차오 친구’의 대부분은 ‘오스테리아(Osteria)’에서 만났다. ‘오스테리아’란 품격 있는 레스토랑(Ristorante), 캐주얼한 트라토리아(Trattoria)를 잇는 이탈리아풍 싸구려 술집이다. 레스토랑은 정장 차림의 웨이터가 주문을 받는 고가의 음식점, 트라토리아는 가족이 모여 장사를 하는 맛 중시의 중가(中價) 식당, 오스테리아는 미리 만들어 놓은 간단한 안주와 저가 와인을 파는 선술집이다. 깨끗한 테이블이나 화려한 장식과는 거리가 먼, 베니스 나아가 이탈리아를 120% 만끽할 수 있는 토속적인 장소다.

최초의 여성 외국인 곤돌라 사공인 독일인 알렉산드라 하이.
최초의 여성 외국인 곤돌라 사공인 독일인 알렉산드라 하이.

‘차오’ 한마디면 누구나 친구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음식점과는 거리가 먼 오스테리아를 발굴해 매주 서너 번 들르자 차오 친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올해 초 기준, 필자의 차오 친구는 무려 50명에 이른다. 친구를 늘리게 된 것은 술에 강한 한국인의 DNA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차오 친구가 제공하는 스프리츠를 한 번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18잔의 공짜 스프리츠가 지금까지의 최고 기록이다. 사실 스프리츠는 탄산수와 얼음을 섞은 저알코올 음료이기에 많이 마셔도 별로 취하지 않는다.

오스테리아를 오가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필자가 사귄 베니스 차오 친구들의 주량은 평범한 이탈리아인들에 비해 월등하게 강하다. 아예 대낮부터 본격적으로 마신다. 바(Bar) 주변에서 서로 권하면서 마시는 인사용 스프리츠와 와인이 기본으로 5잔 정도다. 보통 4명이 한데 어울려 앉으면 프로세코(Processo), 화이트와 레드 와인 각각 두 병씩, 전부 6병을 마신다. 안주는 해산물 튀김이나 하나에 1~2유로 하는 타파(Tapa) 스타일의 음식이 주종이다. 오스테리아는 남성 손님이 대부분이다. 술로 돈을 버는 곳이긴 하지만, 손님들의 주량이 대단하다. 다른 도시의 오스테리아도 다녀봤지만 베니스가 남다르다. 이유를 안 것은 오스테리아에 ‘출근’을 한 지 2주 뒤쯤이다. 이른바 ‘곤돌리에리(Gondolieri)’가 주당들의 정체였다. 곤돌라를 모는 남성 사공이다. 필자의 단골집 오스테리아는 베니스 곤돌라 사공의 아지트였다. 유난히 덩치가 크고 팔뚝이 굵어 배를 타는 사람으로 짐작은 했지만, 곤돌라 사공 전용 선술집이란 사실은 몰랐다.

곤돌리에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베니스에서 가장 강한 체력을 가진 최고의 술꾼들이다. 베니스 곤돌라협회 사무실도 오스테리아 근처에 있다. 필자의 단골 오스테리아는 곤돌리에리들이 출근이나 퇴근에 앞서 한잔하는 장소였다. 베니스의 술집이나 음식점들은 곤돌리에리에게는 술값이나 음식값의 절반만 받는다고 한다. 곤돌라협회가 제공하는 할인쿠폰을 들고 오면 반값으로 깎아주는 시스템이다.

아마도 곤돌라는 가면에 이어 베니스를 대표하는 캐릭터일 듯하다. 베니스에 갔다왔다고 하면 곤돌라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할 것이다. 곤돌리에리의 노래를 실은, 산마르코광장을 배경으로 한 곤돌라 여행 사진은 베니스 여행 1호 인증샷이다. 사실 필자는 지금까지 곤돌라를 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배멀미를 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가 11m나 되는 배를 시간당 100유로를 내고 타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리의 에펠탑, 서울의 남산타워,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에 오른 적이 없듯이 곤돌라도 일부러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필자는 차오 친구인 30대 곤돌리에리에게 “아직 곤돌라를 한 번도 탄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기분 나빠할까 걱정했지만,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곤돌라로 먹고살지만, 사실 곤돌라는 너무 비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 졸업식이나 생일 때 부담없이 이용했지만, 이후 달라졌다. 아마 베니스인 가운데 평생 곤돌라를 안 타본 사람이 70%는 넘을 것이다. 손님 중 이탈리아인은 거의 없다.”

엄청난 酒黨 곤돌라 사공들

곤돌라를 보면 다른 배와 다른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들어온다. 사공이 서서 노를 젓는 모습과 배의 외양이 검은색이란 점이다. 앉지 않고 서서 노를 젓는 이유는 무대가 강이 아닌 바다라는 점에 있을 듯하다. 물살이 약하고 흐름이 완만한 강의 경우 앉아서 배를 저을 수 있다. 파도가 치고 물살도 빠른 바다는 서서 힘껏 노를 저어야 한다. 강보다는 바다의 사공이 한층 더 힘들고 노련미를 요구한다. 곤돌라가 검은색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수 목적이다. 방수용 재료 속에 검은색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는 사치 규제에 따른 행정조치의 결과다. 1609년 베니스공화국의 법령으로 곤돌라의 외양을 검은색으로 하라고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17세기 초는 베니스의 부와 힘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다. 곤돌라는 당시 부자들의 전용 자동차와 같은 존재였다. 원래 베니스 운하를 오가는 수송용 수단에 불과했지만, 부자들의 경쟁으로 캐딜락 같은 고급 보트로 변했다. 돈자랑을 하는 과정에서 황금으로 도색을 하고 갖가지 사치품도 배에 매단다. 인간의 탐욕을 막는 과정에서 청빈과 금욕의 상징인 검은색이 도입된 것이다.

곤돌라는 베니스의 얼굴인 동시에 베니스를 대표하는 역사의 상징이다. 곤돌라 사공은 이탈리아 전체가 알아주는 안정적인 고소득 직업이다. 북한이나 쿠바에서 택시운전사가 최고의 인기직업이라고 하지만, 곤돌라 사공은 베니스에서 알아주는 특급 직장이다. 2015년 기준으로 베니스 내 곤돌라 사공은 425명이다. 베니스 사공은 원한다고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인 만큼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만 면허증을 얻어낼 수 있다. 노 젓는 실력만이 아니라 구석구석에 숨은 베니스 운하에 관한 지식과 곤돌라를 구성하는 280개 부품의 기능, 베니스의 문화와 역사, 이탈리아어는 물론 외국어 구사 능력과 노래 실력까지 테스트한다. 베니스 최대 파워를 자랑하는 이익단체이자 노동조합인 곤돌라협회와 로마 중앙정부가 함께 주관하는 총체적 ‘인문미학적’ 시험에 통과해야 곤돌라 사공이 될 수 있다. 매년 치러지는 시험에는 이탈리아만이 아닌, 유럽과 미국에서도 몰려든다. 5년 전에는, 20대 후반의 일본인 응모자가 최종단계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졌다는 뉴스도 들었다.

‘독일인 곤돌리에라’ 소식을 안 것은 지난해 말이다. 이탈리아어 접미사로 남성은 ‘i’가, 여성은 ‘a’가 붙는다. 곤돌리에리가 남성, 곤돌리에라는 여성 사공을 의미하는 말이다. 독일인 곤돌리에라는 베니스 역사상 최초로 곤돌라 테스트를 통과한 외국인으로 40세의 알렉산드라 하이(Alexandra Hai)다. 무려 20년간 시험에 계속 응모했다가 마침내 외국인 1호 곤돌리에라가 된 의지의 독일 여성이다. 이탈리아인으로 여성 1호 곤돌리에라는 2010년 이미 탄생했다. 독일인 여성에 대한 곤돌라 허가증은 지난해 12월 로마 법원을 통해 처음으로 발급됐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붙었다. 곤돌라협회와는 무관한 곤돌리에라다. 베니스 곤돌라협회는 공적기관이 아니다. 따라서 회원자격은 스스로 판단한다. 독일인 곤돌리에라를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베니스 곤돌라협회의 최종결정이다. 따라서 알렉스 헤이는 개인 자격으로 베니스에서 곤돌라 일을 할 수 있을 뿐, 곤돌라협회가 갖고 있는 시설을 쓸 수도 없고 베니스 곤돌라 전통을 잇는 존재도 아닌 것으로 치부된다. 옷도 다르고, 곤돌라 전용 접안시설이나 수리시설도 사용할 수 없다. 왕따처럼 외톨이로 손님을 맞는 것이다. 독일인 관광객 덕분에 손님은 끊이지 않지만, 마음고생은 어림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곤돌리에리 친구에게 곤돌라협회가 언제쯤 외국인에게 문을 열 것인지 물어봤다. 답은 간단했다. “절대 안 된다(Never)!” 더불어 한마디 덧붙였다. “3년 전 중국 부자가 찾아와 산마르코광장 내 건물을 하나 사겠다면서 엄청난 돈을 제시했다. 이탈리아를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산마르코는 안 된다는 답을 들었다. 베니스 시내 매장 중에는 중국·방글라데시·알바니아·몰디브인이 운영하는 곳들이 있다. 전 세계 모두에게 상점 운영권을 개방한다. 그러나 산마르코광장 매점은 베니스인만이 운영한다. 곤돌라도 마찬가지다. 개방적인 자세로 나아간다는 것은 지킬 것을 제대로 지킬 줄 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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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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