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조성호 교수팀이 개발한 지능형 전자피부 시현 장면. 키보드 없이 타자를 치는 손동작만으로 글자가 입력된다. photo 카이스트
카이스트 조성호 교수팀이 개발한 지능형 전자피부 시현 장면. 키보드 없이 타자를 치는 손동작만으로 글자가 입력된다. photo 카이스트

한국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지능형 전자피부’ 개발에 성공했다. 키보드 없이 타자를 치는 손동작만으로 글자가 입력되고, 사물을 문지르면 그 모양을 화면에 그대로 그릴 수 있는 전자피부다. 사람의 피부에 붙여 동작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손목밴드나 웨어러블 장갑처럼 불편한 실물 기기를 착용할 필요가 없다는데, 이런 기술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노 수준의 전도성 그물망 사용

세계 처음으로 지능형 전자피부를 개발한 주인공은 카이스트 조성호 교수(전산학부)와 서울대 고승환 교수(기계공학부), 미국 스탠퍼드대 제난 바오 교수 등으로 구성된 공동연구팀이다. 전자피부는 외부 신호를 받아들이는 ‘감지 소재’와 신호의 전달·증폭을 담당하는 ‘트랜지스터’와의 결합을 통해 사람 피부 기능을 그대로 모사한 유연한 전자 소자다.

사람의 피부는 수직 압력, 인장력, 진동, 유체의 흐름 등 다양한 감각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상처를 자연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세계의 많은 과학자들은 사람 피부처럼 다양한 방향의 압력을 인식하고, 외부 충격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후에도 원상태로의 회복이 가능한 전자피부를 개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전자피부의 제작 관건은 외부 감각을 감지하는 센서와 이를 유효한 데이터로 처리할 수 있는 회로다. 또 이런 것들이 이를 전송하는 통신회로와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사용자의 편안한 착용감을 위해 실제 피부처럼 부드러움과 신축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개발된 전자피부는 전자 소자의 크기가 커서 사람 손에 부착하거나 손가락 관절의 움직임을 측정할 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또 수많은 관절 조직에 대응해야 하는 인체 특성상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생성해야 하는 정보도 방대해 실제 활용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활용을 넓혀가는 기술에 비해 시장성이 별로 없었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팀은 패치 형태가 아닌 나노 수준의 전도성 그물망을 활용했다. 이번 전자피부의 핵심 기술이다. 전도성 그물망이란 전도성 선들이 얼기설기 그물망 형태로 얽혀 있는 구조로, 늘어나거나 휘어져도 전도성이 유지되는 점이 특징이다.

연구팀은 전기가 잘 통하는 전도성 액체를 피부에 직접 뿌려 나노미터(㎚·10억분의1m) 단위의 그물망을 사용자의 피부(손)에 자동으로 직접 인쇄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전도성 그물망 소재로는 100㎚ 두께의 은나노 와이어를 사용했다. 은나노 와이어는 금으로 도금되어 있어 생체 친화적이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손 위에 전도성 그물망을 인쇄하면 사용자의 손 움직임에 따라 그물망이 늘어나면서 전기신호가 발생하고, 이 정보가 블루투스 장치를 통해 인공지능(AI)으로 전송된다. 손 피부와 매우 밀착돼 있어 단 한 개의 인쇄된 그물망(센서)으로도 움직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연구팀은 이 같은 전기신호의 발생을 관측했고, 이때 획득한 정보를 무선 전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연구팀은 전송된 다양한 전기신호를 AI 프로그램이 스스로 비교하고 학습해 사용자의 움직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손등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신호들은 미묘하게 다르다. 그 신호들을 구별하고 실제 행위를 추론할 수 있도록 AI 알고리즘에 반복 학습시켰다는 게 카이스트 조성호 교수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움직임과 ‘꾹꾹’ 누르는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훈련에는 몇 번의 반복 학습만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메타러닝(Meta Learning) 기법이 활용되었다. 어떻게 학습해야 성능 좋은 AI가 나오는지 배우게 하는 기법이다. 그 결과 사용자가 특정 손동작을 몇 번만 반복하면 실물 기기를 직접 조작할 때와 똑같이 가상공간에서도 다양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키보드 없이 글자를 치는 손동작만 하면 PC에 글자가 입력되었다. 타이핑 속도 면에서 아직 한계가 있지만, 전자피부 범위를 손가락 전체로 확장하는 등 기술 수준을 높이면 매우 빠른 타이핑까지 정확히 구현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특정 물체를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물체의 모양이 화면에 그려지는 등 다양한 가상현실(VR) 플랫폼 기술 구현이 가능했다. 적은 정보만으로 움직임을 인지하기 때문에 일반 PC나 스마트폰에서도 구현이 가능하다.

 

메타버스 더 리얼해질 듯

논문 교신저자인 서울대 고승환 교수에 따르면 전도성 그물망 소재로 쓰인 은나노 와이어는 일부러 문질러 없애지 않는 한 계속 기능이 가능하다. 비용도 저렴해 필요할 때 뿌렸다가 지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전자피부와 최신의 AI 기술을 결합한 첫 사례인 연구팀의 연구 성과는 전기·전자 분야 국제학술지 ‘네이처 일렉트로닉스’에 게재됐다.

전자피부는 인간에게도 로봇에게도 유용하다. 사람의 피부에 부착해 사용하면 기존의 전자피부보다 훨씬 더 미세한 나노미터 단위의 인체 움직임까지 감지할 수 있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AR)은 물론 더욱 현실과 흡사한 메타버스에도 활용이 가능하다.

메타버스(metaverse)는 ‘범위나 한계를 넘어서다’라는 뜻의 ‘메타(meta)’와 세계·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가상현실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사회·경제적 활동까지 생활의 모든 분야가 구현되는 온라인 공간이다. 가상현실·증강현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차세대 인터넷 시대를 주도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면서 게임, 엔터테인먼트, 음악, 콘텐츠 산업 등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확산하고 있다. 특히 메타버스 시장이 성장하면서 인체의 움직임을 측정해 원하는 목적에 맞게 가상공간에 투여하는 기술이 가장 중요해지고 있다.

원격의료 분야의 활용도 기대된다. 전자피부를 피부에 붙이면 인체 움직임 측정은 물론 혈압·혈당·혈류량·산소포화도 등의 건강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는 게 가능하다. 따라서 환자 상태에 따라 미량의 약물을 적시에 투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근육이 뒤틀리는 것을 감지하면 내장된 나노 입자가 터지면서 약물이 피부로 투여된다.

로봇 분야에서도 다양한 용도의 혁신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고령화 사회에서 로봇이 가족과 간병인 역할을 대신하려면 인간의 피부처럼 부드럽고 따뜻해야 한다. 로봇이 사람처럼 된다는 건 고통을 포함해 온갖 감각을 느낀다는 것. 그 시작은 피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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