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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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과의 전쟁에서 새로운 탄약이 등장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2001년 5월 28일 자는 이 문구로 표지를 채웠다. ‘기적의 표적항암제’ 글리벡이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타임’의 문구는 과장이 아니었다. 글리벡은 암세포를 정확하게 공격해 백혈병의 한 종류인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10년 생존율을 86%로 끌어올렸다. 이때까지 쓰였던 인터페론은 10년 생존율이 10%에 불과했다. 평생 면역억제제를 써야 했던 골수이식 10년 생존율도 60% 수준이었다.

글리벡이 출시된 지 23년, 그동안 만성골수성백혈병 표적항암제 8종이 새롭게 나왔다. 신약들은 공격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며 2세대, 3세대로 진화했고 이제 4세대에 진입했다. 4세대 신약 개발의 목표는 14%인 사망자를 최대한 살리는 한편, 약 복용을 중단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표적항암제 질주의 맨 선두에 한국인 의사가 있다. 김동욱 의정부을지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다. 김 교수는 만성골수성백혈병 분야에서 세계 최고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특히 표적항암제 연구·개발에서 국내는 물론 글로벌 제약사들이 앞다퉈 그를 찾는다. 그는 2002년 글리벡 국내 도입을 이끌어 공급심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글리벡 국내 치료 기준을 제시했다. 또한 국산 표적항암제 슈펙트 개발에 크게 기여해 표적항암제 약값을 획기적으로 낮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교수는 또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와 함께 스프라이셀, 타시그나 등 2세대 표적항암제 임상시험을 진행했고 최근에는 4세대 신약 애시미닙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김 교수는 현재 국내 바이오 기업과 함께 4세대 표적항암제를 개발 중이다.

김 교수가 현재 치료 중인 환자는 약 2200명. 국내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 약 8000여명 중 25% 이상을 김 교수가 진료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김 교수는 2011년부터 현재까지 유럽백혈병네트워크 멤버로서 세계 백혈병 치료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멤버 35명 중 아시아인은 최근 추가된 중국 베이징대 교수 1명을 제외하면 김 교수가 유일하다.

백혈병은 혈액세포에 발생한 암을 말한다. 비정상적인 백혈구가 과도하게 증식해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의 생성을 억제함으로써 패혈증, 빈혈, 출혈 등을 일으키고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한다.

백혈병은 세포의 기원에 따라 크게 골수성과 림프성으로 나눈다. 골수성과 림프성은 다시 급성과 만성으로 분류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백혈병 발생 비율은 급성골수성백혈병이 50%를 넘고 급성림프성백혈병이 20~25%, 만성골수성백혈병이 15%, 만성림프성백혈병이 1~3%다. 이들 백혈병 4종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암이라서 치료법도 다르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의 발생 비율은 15%에 불과하지만 실제 환자 비율은 전체 환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표적항암제 등장으로 장기 생존 환자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초년 교수 시절 4종 백혈병 환자를 모두 진료했지만 환자가 많고 한 가지 질환만 집중적으로 연구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만 진료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86년 가톨릭대 의대 전공의 시절 김춘추 혈액내과 교수에게 선발되어 백혈병을 주전공으로 택했다. 김춘추 교수는 1983년 국내 최초로 백혈병 환자 골수이식에 성공한 백혈병 분야 선도자였다. 김 교수는 스승에게 골수이식법을 직접 전수받으면서 새로운 이식 방법 개발에 몰두했다.

 

형제·자매 외 골수이식을 최초 성공

“당시 백혈병 5년 생존율이 10%도 안 됐기 때문에 골수이식이 생명을 구할 거의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그러나 치료법 개발 초기에는 형제·자매 간의 이식만 가능해 외동이거나 형제·자매가 적은 환자는 골수이식을 받을 수 없었다.”

김 교수가 11년 만에 해답을 찾았다. 1994년 형제·자매가 아니라도 골수이식을 할 수 있는 비혈연 간 골수이식에 성공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이후에도 연구를 거듭해 유전자 불일치 조혈모세포이식을 국내 최초로 실시했고, 이후 외과 교수들과 함께 만성골수성백혈병과 말기 간경변을 모두 가진 환자에서 세계 최초로 골수와 간 동시 이식에 성공했다.

그러나 김 교수의 관심은 골수이식이 아닌 다른 데에 있었다. 전공의 2년 차였을 때 혈액줄기세포 22번 필라델피아 염색체 이상이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주요 원인이라는 사실이 해외에서 발견된 이후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유전자 연구로 혈액암이 악화되는 기전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질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김 교수는 한양대 유전학교실 백용균 교수, 카이스트 유욱준 교수 등에게 염색체와 유전자 분석법을 배웠고 1997년엔 ‘골수이식과 분자혈액학의 산실’이었던 미국 프레드허킨스 암연구소와 워싱턴 주립대학교에 가서 분자생물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미국에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스승님(김춘추 교수)의 반복적인 권유로 귀국해 주 1회 골수이식 수술을 했다. 그러나 골수이식은 평생 삶의 질이 떨어지고, 이식 후 합병증이나 자가면역질환으로 고생하거나 20~30%는 재발하는 등 한계가 있었다.”

표적항암제 글리벡 출시 소식으로 표지를 꽉 채운 미 시사주간지 ‘타임’ 2001년 5월 28일 자 표지.
표적항암제 글리벡 출시 소식으로 표지를 꽉 채운 미 시사주간지 ‘타임’ 2001년 5월 28일 자 표지.

‘기적의 표적항암제’ 글리벡 국내 도입 주도

이 무렵 김 교수는 획기적인 신약 개발 소식을 접했다. 표적항암제 글리벡이 미국, 유럽 등에서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글리벡 제조사인 노바티스에 편지를 보내 한국도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대신 동정적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다는 응답을 받았다. 동정적 치료는 암 등 위급한 불치병 환자에게, 아직 승인받지 않았지만 초기 임상시험의 결과로 볼 때 큰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항암 신약을 무료로 공급해 치료 기회를 주는 응급 제도다. 그러나 이번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걸림돌이었다. 수십 명의 환자가 동정적 치료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3~6개월이나 걸리는 승인 절차를 고수했다고 한다.

“승인을 재촉하는 편지를 청와대에 보내달라고 환자들에게 부탁했다. 예상대로 조기 사용 승인이 났고, 나는 글리벡 공급심의 위원장을 맡아 약 320명의 환자에게 무료로 투약할 수 있었다. 2001년 5월 15일 사경을 헤매던 첫 번째 환자를 시작으로 많은 환자들이 일주일 만에 기적같이 좋아져 퇴원했다.”

김 교수의 열정은 국산 표적항암제 슈펙트 개발로 이어졌다. 일양약품 슈펙트는 글리벡보다 35배 더 강력한 2세대 표적항암제다. 2002년 일양약품은 글리벡 복제약을 만들기로 하고 김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글리벡 내성 문제가 부각되어 제조사인 노바티스도 미국 하버드의대와 함께 2세대 신약 타시그나를 개발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일양약품에 2세대 신약 개발을 제안했고, 슈펙트는 2008년 1상 임상시험을 시작해 2012년 1차 치료에 실패한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2차 치료제로 출시됐다.

“슈펙트는 약값을 3분의1로 낮춰 더 많은 환자에게 경제적 혜택을 줄 수 있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이 개발한 신약으로 인해 전 세계 약값이 떨어지고 있다고 보도했고 실제로 다국적 회사들의 약값이 한국에서 가장 낮았다.”

김 교수는 “슈펙트 개발 덕분에 ‘매국노’라는 오해도 풀었다”며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그가 글리벡 도입에 앞장설 무렵 국내외 의학계는 골수이식파와 표적항암제파가 팽팽히 맞섰다. 골수이식파의 선봉인 스승 김춘추 교수는 표적항암제 치료를 주도하는 김 교수를 향해 “당신이 다국적 제약사 사외이사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6년 유럽백혈병네트워크가 “만성골수성백혈병의 1차 표준치료는 표적항암제 글리벡이다”라고 선언하면서 골수이식과 표적항암제를 둘러싼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김춘추 교수도 새로운 지침을 인정하며 김 교수를 크게 격려했다고 한다.

 

‘게임체인저’ 기대되는 4세대 표적항암제

현재 만성골수성백혈병 표적항암제는 1세대부터 4세대까지 9종이 개발되어 있다. 처음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는 1세대 글리벡과 2세대 스프라이셀, 타시그나, 슈펙트를 처방한다. 이들 약물은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다. 1차 약물에 내성이 생기면 여기에 아이클루식이나 1차 요법으로 사용하지 않은 약물을 선택할 수 있고, 2가지 이상 약물 치료에 실패한 경우에는 4세대인 샘블릭스(성분명 애시미닙)를 사용할 수 있다. 샘블릭스는 작년 7월부터 건강보험 적용이 되고 있다.

김 교수는 요즘 4세대 표적항암제 개발에 많은 열정을 쏟고 있다. 현재 글로벌 제약사 엔리븐, 턴즈, 썬파마에서 개발 중인 ELVN-001, TERN-701, 그리고 보도바티닙에 대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고 국내 바이오기업 이뮤노포지와 함께 또 다른 4세대 표적항암제 KF1601을 임상 개발 중이다.

이미 상용화된 표적항암제만으로도 10년 생존율이 86%로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왜 신약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을까. 김 교수는 이 의문에 대해 “현재 화두는 완치율 향상과 약 복용 중단이기 때문에 암세포를 제로(0)로 만드는 강력한 신약을 경쟁적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자신이 치료 중인 환자 2200명 중 15%인 300여명은 약 복용을 중단했으며, 이들 중 절반은 재발했고 절반은 완전 관해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애시미닙 등 3·4세대 신약은 표적항암제의 새로운 게임체인저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3·4세대 신약은 고용량 처방 시에 1·2세대 신약이 제압하지 못했던 315번 점 돌연변이를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다.

 

세포 다양성 감소로 고령 백혈병 환자 많아

만성골수성백혈병 발병 원인은 일부 X선, 감마선, 중성자선 등의 방사선이나 벤젠, 톨루엔 같은 화학물질이 거론되고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연령 요인은 비교적 명확하다. 백혈병은 19세 이하 소아청소년들에게 많이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연령이 증가할수록 발병률이 더 높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집계를 보면 2018년 백혈병 진료 인원은 2만932명에서 2022년 2만5583명으로 약 20% 증가했다. 2022년 기준 연령별 구성은 10대 2283명, 50대 4530명이며 60대가 5560명으로 가장 많다. 김 교수는 고령 백혈병 환자가 많은 이유를 “나이가 들수록 세포 다양성이 크게 떨어져 세균에 대한 대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며 “세포 소멸에 대한 역작용으로 세포가 급격히 증식하면서 백혈병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피로감 외에 특별한 증상이 없으며, 병이 진행되면서 비장이 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명확한 조기 진단법은 없지만 혈액검사에서 백혈구와 혈소판이 증가해 있으면 전문가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김 교수에 따르면 조기진단을 위해서는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검사가 가장 효과적이다. 유전자 수십, 수백 개만 추출해 한 번에 검사하면 몇 년 후 백혈병 발병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NGS 검사는 회당 비용이 100만~300만원에 이른다. 김 교수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개인 맞춤형 NGS 검사 분석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며 “내년이면 실제 건강검진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많은 환자들은 이미 6개월에서 1년 전에 백혈병에 걸렸지만 백혈구 개수가 30만~40만개로, 정상보다 30~40배 많아졌을 때 병원에 온다”며 “국가검진에서 빈혈 검사만 할 것이 아니라 백혈구와 혈소판 검사를 추가하면 좀더 많은 환자를 조기진단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표적항암제를 사용하더라도 암세포 개수가 적을 때 치료하면 유리하다. 왜냐하면 암세포가 많아질수록 약물에 내성을 가지는 암세포도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똑똑한 의사만큼 환자 교육이 중요한 질환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 대부분은 매일 표적항암제를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김 교수는 “골수이식은 똑똑한 의사를 만나 의사의 지시대로 치료받으면 되지만 표적항암제 치료는 환자가 제때 약을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치료의 몫이 의사 50%, 환자 50%다”라며 “환자 교육을 위해 환우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2005년부터 환우 모임 ‘루산우회’와 ‘샛별회’를 운영 중이다. 회원수 2000여명인 루산우회는 연 2회 정기 모임을 가진다. 5월에는 충청남도의 한 수련원에서 1박2일 캠프를 진행하고 9월에는 병원 강당에서 실내 행사를 연다. 매회 300~400명이 참석해 친목을 도모하고 복약 지도, 새로운 연구결과 특강 등 최신 지식을 얻고 일상 생활 관리를 배운다. 약 30명의 50~70대 여성 환자들로 구성된 샛별회는 매일 병원 외래에서 다른 환자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복약 방법 등을 설명하는 고참 환자들의 봉사 모임이다.

환자와의 교류는 온라인에서도 이어진다. 환자들은 유전자 검사 결과 등을 전용 앱을 통해 확인하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루산우회 상담실 ‘교수님과의 대화’ 방에 질문을 올리고 김 교수는 답변을 한다.

김 교수는 AI 기술을 활용해 환자와의 대화를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빅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정확하게 자동 답변을 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약 처방을 돕는 AI 개발도 진행하고 있다.

“나는 병원 차트보다 그동안 모은 빅데이터 DB를 활용해 환자를 진료한다. 내가 모은 DB를 국내 모든 대학병원에 공급해 정확한 진료에 활용하게 하고, 병원들의 진료 결과를 모아서 AI를 개발하는 특허를 지난 1월에 출원했다. 머잖아 AI에게 ‘특정 환자의 예후를 예측하게 하거나, 부작용이 가장 적은 약을 선택하라’고 주문하고 그 결과를 치료에 참고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최근에 ‘내가 환자 238명에게 각각 어떤 약을 처방했는지 예측하라’고 AI에게 주문했더니 AI는 235명이나 정확하게 맞혔다.”

김 교수에게 혈액암 진료와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의사 추천을 요청했다. 김 교수는 림프종 분야에서 삼성서울병원 김석진 혈액종양내과 교수를 추천했다. 김석진 교수는 림프종에 특화되어 있고, 환자가 많고 겸손하며 해외 학회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해 연구 결과를 많이 발표한다. 은평성모병원의 혈액내과 신승환 교수도 미래가 주목된다. 과묵하고 성실하며 백혈병과 다발골수종을 진료하지만, 미국 연수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지도교수를 선택할 정도로 최근 글로벌 트렌드를 혈액학 분야에 가장 잘 접목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혈액암 분야에서 실력 있는 의사는 세 가지를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로 분자생물학의 기술을 임상에 잘 적용할 수 있어야 하고 기초과학자들과 공동중개 연구에 대한 관심이 커야 한다. 두 번째, 자신의 연구성과를 국제화할 수 있는 ‘깡’이 있어야 해외 학회에서도 기죽지 않는다. 세 번째, 자신의 환자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김 교수는 “일부 미국, 유럽 석학은 아흔 살에도 진료를 한다”며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것이 나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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