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예방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오른쪽) 지난 3월8일 플로리다 마라라고 저택으로 트럼프를 찾아갔다. photo 뉴시스
2019년 5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예방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오른쪽) 지난 3월8일 플로리다 마라라고 저택으로 트럼프를 찾아갔다. photo 뉴시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지난 3월 8일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미국 플로리다주 마라라고 저택으로 찾아가 만났다. 트럼프는 오르반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며 “보스”라고 극찬했다. 오르반도 트럼프와의 만남에서 “우크라이나 종전 방향을 논의했다”며 “트럼프가 백악관에 있었으면 우크라이나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는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오르반은 트럼프를 만나기 하루 전인 3월 7일에는 미국 보수주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 주최한 행사에 참가하여 연설하는 등 보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높이려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오르반은 미국 바이든 행정부와 EU(유럽연합) 등으로부터 헝가리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가 트럼프와 만난 날 바이든 대통령은 “오르반은 민주주의가 소용없으며 독재를 바란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트럼프는 바로 그 사람을 만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실제 헝가리는 오르반 총리의 집권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오르반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헝가리는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헝가리는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도 반대했다. 나토 가입을 위해서는 회원국의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하다. 오르반은 스웨덴의 나토 가입 승인을 촉구하기 위해 헝가리를 방문한 미국 의원단도 만나지 않았다. 오르반은 지난 2월에야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동의했다.

 

미국 방문해 트럼프만 만나고 돌아가

오르반은 미국을 방문하면서도 바이든 대통령이나 행정부 관리들을 일절 만나지 않았다. 나토 회원국인 헝가리의 지도자가 미국을 방문하면서 백악관을 찾지 않은 것은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적대적 행위로 인식될 수도 있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오르반이 이러한 행동을 취한 데 대해 헝가리 정보기관의 간부였던 페터 부다는 최근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오르반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붕괴한다는 데 올인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세력(러시아)에 미리 동조하면 훨씬 유리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오르반과 푸틴은 평화협상을 강조한다. 이는 러시아에 분명히 유리한 것이다. 오르반이 러시아에 유리하도록 미국에 로비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분석했다. 

오르반은 올 초에 “신의 도움으로 올해 말 국제정치 무대는 올 초와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헝가리의 활동영역은 이전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정도로 확대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다른 나라의 선거에는 간섭할 수 없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재입성하여 유럽의 동쪽 절반에 평화를 확보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오르반의 외교행보에 대해 헝가리 주재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프레스만은 헝가리 정부가 ‘환상(fantasy)’을 좇고 있다고 비판했다. 프레스만 대사는 지난 3월 14일 헝가리의 한 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헝가리의 “위험할 정도로 무분별한 반미(反美) 메시지”와 “러시아와의 관계 확대”를 비난했다. 그는 헝가리의 나토 가입 25주년을 기념한 연설에서 “오르반 총리의 ‘신뢰와 우호를 훼손하는 발언과 행위들’ 때문에 친구와 동맹들로부터 점차 고립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오르반 총리가 미국을 헝가리의 ‘제일의 적(top adversary)’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받아들일 수도 없다. 미국 정부가 헝가리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그의 주장도 이해할 수 없다.… 헝가리의 국회의장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실제로는 ‘미국이 유도했다’고 한 발언도 무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르반 총리가 갈수록 친러시아·반자유주의적 행보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정치에 입문한 청년 시절에는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에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2010년 총선 이후 장기집권을 획책하면서 반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지도자로 변신했다.

오르반 총리가 이끄는 피데스당이 철거를 결정한 헝가리 민주화 영웅 임레 너지 동상. 임레 너지는 3000여명의 헝가리인들이 소련군에게 희생당한 1956년 민주화 혁명을 이끈 인물이다. photo 위피키디아
오르반 총리가 이끄는 피데스당이 철거를 결정한 헝가리 민주화 영웅 임레 너지 동상. 임레 너지는 3000여명의 헝가리인들이 소련군에게 희생당한 1956년 민주화 혁명을 이끈 인물이다. photo 위피키디아

35세 때 유럽서 가장 젊은 총리로 등극

오르반은 1963년 부다페스트 인근의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산당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는 1989년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매우 폭력적이었으며 매년 두 차례씩 얻어맞았다. 아버지는 나를 때릴 때마다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곤 했다. 나는 이 모든 나쁜 경험들을 기억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오르반은 공산주의 체제에 도전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청년공산동맹에 가입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축구였다. 그는 군복무 시절 공산당 비밀경찰이 접근하여 제보자가 되라고 권유했지만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오르반은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하고 헝가리에서 공산체제가 무너진 1989년 부다페스트의 영웅광장에서 소련군 철수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며 헝가리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단기유학하며 자유주의 정치학을 연구했다. 그의 학비는 헝가리 태생의 억만장자이자 자선사업가인 미국의 조지 소로스가 대주었다. 오르반은 1990년 총선거에 참가하기 위해 유학을 중단했다. 그의 피데스(Fidesz)당은 당시 선거에서 22석을 확보했다.

학자들은 오르반의 정치이념이 1990년대 후반에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영국 BBC는 설명했다. 헝가리는 자유주의자·사회주의당 연합이 통치했다. 그런데 오르반은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에 등을 돌리고 당을 반자유주의적인 세력으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정치학자 졸탄 라크네르는 분석했다. 그의 비자유주의로의 변신은 옥스퍼드대 유학 시절에 뿌려졌다는 설명도 있다. 옥스퍼드대 경제학자이며 헝가리 대통령 후보였던 피터 로나는 1990년대 초반에 오르반이 ‘현대적 보수당(modern Conservative party)’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로나가 같은 길을 간 많은 정치인들이 상황이 변하면 재빨리 ‘현대적(modern)’이라는 단어를 폐기했다고 경고하자 오르반은 “그러면 그렇게 해야죠(Then so be it)”라고 답했다고 한다.

1998년에 오르반은 피데스당을 이끌며 총선거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고 35세에 유럽에서 가장 젊은 총리가 되었으며, 1999년에는 헝가리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하지만 그는 이후 치러진 2002년, 2006년 선거에서는 패했다. 2002년 총선에서 패배한 이후 오르반은 변했다. 그는 패배 직후 지지자들에게 “민족은 패할 수 없다”고 답했다. 2010년 국제 금융위기 상황에서 재집권한 오르반은 현재까지도 권력을 잃지 않고 있다.

미국의 정치 컨설턴트인 조지 번바움과 아더 핑켈스타인은 2010년에 오르반이 승리하는 것을 도왔다. 유대인인 두 사람은 30년간 정치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가 1996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도 기여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의 승리를 도운 핑켈스타인은 수학자에서 정치 컨설턴트로 변신해 정치운동의 기술을 재창조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닉슨뿐만 아니라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을 도왔으며 나중에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핑켈스타인은 1970년 한 메모에서 “당신의 지향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주제를 중심으로 선거를 양극화시켜야(polarise) 한다. 뉴욕의 경우 마약, 범죄, 인종문제 등이다.… 상대방이 양극화의 주도권을 잡으면 당신은 어려움에 빠진다”고 강조했다. 현대 포퓰리즘의 대부로 불리기도 하는 그의 제자인 번바움은 “적을 만드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인물을 발견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라고 강조한다.

지난해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포럼에서 만나 환담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오르반 총리. photo 뉴시스
지난해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포럼에서 만나 환담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오르반 총리. photo 뉴시스

유학자금 대준 조지 소로스 악마화

두 사람은 이스라엘 선거에서 베냐민 네타냐후의 첫 번째 승리를 극적으로 일구어냈다. 당시 선거는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당한 수 개월 후에 실시되었다. 시몬 페레스 총리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추진하자 이스라엘 유권자들은 “페레스가 예루살렘을 분단시킬 것이다”라는 네타냐후의 구호에 자극되었다.

2008년에 핑켈스타인과 번바움은 헝가리의 오르반을 위한 작업을 시작하여 2010년에 압승을 거둘 수 있게 만들었다. 오르반도 헝가리 국민들을 협박할 수 있는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많은 여론조사 끝에 두 사람은 당시 85세였던 헝가리 태생의 미국인 억만장자이자 자선가인 조지 소로스를 오르반이 악마화할 수 있는 완벽한 대상 인물로 지정해 주었다. 번바움은 “조지 소로스는 완벽한 목표물이었다. 왜냐하면 헝가리 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억만장자가 베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로스가 오즈의 마법사처럼 배후에서 정치와 정책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다”고 BBC 회견에서 말했다.  

오르반은 소로스를 추종하는 시민단체들이 “외국 돈으로 비밀리에 헝가리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5년 9월에 소로스가 EU가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하자 오르반은 이를 “소로스의 계획(Soros plan)”이라며 비판했다. 유대인 소로스가 기독교 유럽을 무슬림 이민자들로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지만 유럽의 극우 정계에서는 ‘거대한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 Theory)’이라는 명칭까지 얻어가며 이미 자리 잡고 있던 터였다. 이런 음모론 탓인지 헝가리 국민들에게는 무슬림 이민자들이 유대인이나 집시를 대체하여 두려움을 주는 ‘타자(other)’가 되었다. 헝가리 사람들의 적대감 때문인지 소로스가 1991년 헝가리가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때 설립한 중부유럽대학은 2019년 대부분의 기능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강제로 이전해야 했다.

오르반은 2022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열린 보수주의 행동회의에 참가한 공화당원들에게 “당신들의 적의 이름을 부르기를 두려워 말라. 그들은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잠깐이라도 소로스를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는 소로스를 잘 안다. 그는 나의 적이다. 그는 우리가 믿는 것을 하나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르반 비판자들은 소로스가 ‘정치와 정책을 통제한다’는 생각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유대인 사업가 소로스를 조롱하는 포스터들은 나치 선전에 비유되곤 한다. 오르반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이러한 비판을 무시한다.

 

양극화 선거 전략을 가르친 컨설턴트들

2010년 이후 피데스와 그 지지자들은 헝가리의 미디어를 점차 장악하였다. 2018년에는 대부분의 미디어 소유권이 케스마재단으로 넘어갔다. 케스마재단의 이사진은 피데스당 의원들과 피데스당과 가까운 연구소 책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르반이 대중의 지지를 얻는 단골 정치 소재는 이민, EU,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다. 2015년 7월 헝가리 국경을 지나 EU로 입국하는 난민과 불법 이민자들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유럽으로 오는 불법이민자들과 테러의 확산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불법이민을 해결해야 한다며 “유럽은 유럽인들의 것이다.… 헝가리는 헝가리인들만의 것이다”라고 외쳐왔다. 이에 따라 헝가리와 세르비아 국경에는 장벽이 설치되었으며, 이민자들을 범법자로 다루는 새로운 법이 도입되었다. 2018년에는 ‘소로스 금지(Stop Soros)법’이 통과되어 불법이민자들을 돕는 행위도 범죄가 되었다.

오르반이 헝가리 민주화를 역행한 극적인 사례가 임레 너지 동상 추방사건이다. 임레 너지는 1956년 소련의 지배를 거부한 헝가리혁명을 주도한 인물로 짧은 기간 동안 총리를 지내며 민주주의 개혁을 약속했다. 소련은 이 혁명을 탱크로 짓밟았으며, 이 과정에서 3000여명의 헝가리인이 사망했다. 소련은 2년 후에 임레 너지를 비밀리에 교수형에 처했다. 소련은 임레 너지를 매장할 때에도 얼굴은 땅으로 처박고, 두 팔은 등 뒤에서 철사로 묶었으며, 두 다리도 철사로 묶었다. 헝가리인들이 다시는 소련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일종의 주술을 건 셈이다. 임레 너지의 매장터는 추모객이 찾지 못하도록 표식도 하지 않았다. 

헝가리에서 소련의 지배가 종식된 1989년 임레 너지는 국가영웅으로 복권되었다. 1989년 청년 시절의 오르반도 임레 너지를 “헝가리의 마지막 책임 있는 지도자”라고 칭송했던 인물이다. 1996년에는 부다페스트의 중심인 의사당 건물에 인접한 자유의 광장에 임레 너지의 동상이 설치되었다. 실물 크기의 동상은 이후 23년간 두 손으로 다리 난간을 짚은 채 의사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레 너지의 동상은 적군기념비와 의사당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러한 위치 선정은 공산주의 체제를 종식하고 헝가리의 과거와 미래에 다리를 놓자는 임레 너지의 개혁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8년 피데스당이 주도하는 국가기념물위원회는 2018년 임레 너지의 동상을 현재의 부다페스트 변두리의 다뉴브강가로 이전한다고 결정했다. 부다페스트 주민들은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임레 너지의 동상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임레 너지의 동상을 자유의 광장에서 없애버렸다는 것은 그의 유산인 오랜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헝가리 시민 생활의 한가운데에서 없애버렸다는 의미이다. 오르반은 자유의 광장을 1945년 이전의 원형대로 복구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소련 점령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지워 나가려는 의도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푸틴이 소련 붕괴를 ‘지정학적 대재앙’이라고 개탄하는 상황에서 오르반이 친러시아적 입장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설명이다. 비판자들은 오르반이 임레 너지가 26년 만에 복권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며 추방당한 임레 너지의 동상도 언젠가는 자유의 광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오르반의 장기집권을 도운 번바움이 오르반과 헤어진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는 오르반을 처음 봤을 때에는 “매우 지적이고 영민하고 경제나 다른 정책문제에 깊이 알고 있는, 당시로서는 드문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르반이 너무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 양극화를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번바움이 생각하는 양극화의 해독제는 무엇일까?

“최고의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서로의 차이점이 아닌 공동의 목표를 상기시키는 사람들이다.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이 실현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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