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 연휴에 뭘 할지 아직 결정을 못했다면 독서를 권한다.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맞아 어수선한 세상을 꿰뚫어볼 혜안을 기르고,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을 시간을 갖는 데는 독서만 한 것이 없다. 이번 설 연휴에 권할 만한 4권의 책을 소개한다.

차동엽 잊혀진 질문

왜 악인도 부귀영화를 누리나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평생 무신론자로 살았다. 그러나 1987년 타계하기 직전 당시 마포 절두산성당 박희봉 신부에게 삶에 관한 질문을 24가지 적어 보냈다. 박 신부는 정의채 신부에게 답변을 부탁했고, 곧이어 정 신부와 이 회장 간의 면담 약속이 잡혔다. 안타깝게도 이 회장이 급히 타계하는 바람에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회장의 질문은 그대로 묻히는 듯했다. 하지만 정갈한 필체로 쓰인 질문서는 알음알음 세간에 퍼졌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절절한 삶의 고뇌를 담고 있는 난제들이다. 거기에는 똑 떨어지는 정답이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무려 사반세기가 흐르고 난 다음에야 겨우 답변서가 나왔다. 그것이 바로 차동엽 신부(1958~2019)의 ‘잊혀진 질문’(2012)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신은 인간의 사고나 감각을 넘어서는 존재다. 즉 설명되지 않는 것이 신의 본질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신이 아니며, 신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지력으로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또한 꼭 증명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신은 증명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체험도 가능하다.

악인 중에도 부귀를 누리는 사람이 많다면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해 신은 벌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벌의 시행은 사후 또는 종말의 때에 이루어진다. 즉 살아생전에 그때그때 심판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유보된다. 신은 채찍을 들지언정 벌하지 않고, 악인의 회개를 소망하며 끝까지 기다린다. 그것이 바로 신의 자비요, 긍휼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는가? 고통이나 죽음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3차원 공간에서 사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생명의 몸살’로 겪게 되는 자연발생적 현상이다. 따라서 생명이 살아있는 한 고통은 불가피하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최선의 선택은 고통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내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일반인보다 기독교인 가운데 범죄율은 다소 낮다. 그럼에도 여전히 적지 않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우리는 종교 유무를 떠나 자신의 부족을 성찰하고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겸손한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은 미리 정해져 있는가? 신이 인간을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이게 만들었다면 인간은 로봇에 불과하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그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게 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를 누리되 신의 뜻을 두렵게 살펴야 한다. 또한 같은 사람이 의인과 악인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이렇듯 선과 악은 인간 자신의 선택일 따름이다.

그밖의 질문들도 한결같이 절절한 삶의 고뇌를 담고 있다. ‘잊혀진 질문’은 이 회장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제시된 답변에 만족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불만족할 것이다. “신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에는 정답이 없다. “문제 속에 살자.… 그러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 있다

지난 세밑에 유독 눈길을 끄는 뉴스가 있었다. 유전자가위기법을 이용해 유전자 조작 신생아를 탄생시킨 중국의 과학자가 의료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였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과학자다. 이 놀라운 소식에도 우리는 그저 덤덤하다. 그게 무슨 뉴스감이냐는 듯이. 이제 과학은 완전히 고삐가 풀렸다. 그것이 만들어낼 미래의 인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런 궁금증에 상당한 실마리를 던져주는 통찰이 있다. 바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Homo Deus·2015)다. 데우스는 신(神)을 의미한다. 오늘날 인류는 진화의 사슬을 벗어나, 자신의 생사마저 스스로 주관하려고 한다. 만약 이런 시도가 성공한다면 인류는 더 이상 사피엔스라고 보기 어렵다. 바야흐로 신종(新種)인 호모 데우스의 탄생이 임박한 것이다.

인간은 수렵채취시대와 농업시대를 거쳐 지금은 과학시대를 살고 있다. 수렵채취시대의 인간은 생태계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그저 그런 존재였다. 한마디로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을 거치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여럿 가운데 으뜸’으로 도약했다. 이제는 과학혁명을 통해 아예 신의 영역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과학혁명은 불과 몇백 년 만에 기아, 역병, 전쟁 등의 문제를 거의 해결했다. 물론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큰 방향에서 ‘관리할 수 있는’ 문제로 만들었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었으니 인간은 만족할까. 안타깝게도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 이미 인간은 새로운 욕망으로 치닫고 있다. 그것이 바로 불멸, 행복, 신성(神性)이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종교적,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적’ 문제가 되었다. 유전공학, 재생의학, 나노기술 등은 질병 치료를 넘어 불멸의 문제에 도전하고 있다. 또한 과학은 감정이 뇌 안의 전기화학적 메커니즘의 작용임을 속속 밝혀내고 있다. 따라서 행복도 약물이나 전기자극의 사용, 또는 아예 메커니즘 자체의 변경을 통해 얻으려고 한다.

인본주의는 자유의지 등 인간의 절대성을 내세워 과학혁명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의식이나 감정이 단지 뇌 속의 전기화학적 작용일 뿐이라고 본다. 이로 인해 인간의 절대성과 그에 기반한 자유주의 체제는 송두리째 부정된다. 나아가 현대과학은 인간을 아예 알고리즘으로 파악한다. 인간도 한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적 시스템에 불과하다.

이런 변화는 기존의 가치와 종교를 배척하고 두 가지 전혀 새로운 종교를 낳는다. 하나는 기술적 자유주의교(敎)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심지어 행복과 불멸마저 해결해준다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데이터교(敎)다. 생명과학은 유기체를 알고리즘으로 규정하고, 컴퓨터공학은 그것을 지원한다. 여기서 데이터는 절대적 지위를 갖게 된다.

‘호모 데우스’는 인간이 진화법칙을 배척하고 지적 설계를 통해 세상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신(데우스)이 되려고 한다는 미래 이야기다. 그것은 이미 시작된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되더라도 여전히 ‘불완전한’ 신일 것이다. 그것이 미래가 두려운 이유다. 한편 인류가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을 다룬 과거 이야기는 저자의 ‘사피엔스’(Spiens·2011)에 오롯이 담겨 있다.

로버트 퍼트넘 나 홀로 볼링

‘나 홀로’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 나 홀로 즐기는 생활에 파묻혀 살고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도 그런 경향이 가속화되어 사회적 자본이 붕괴되고 있다고 경고하는 인상적 주장이 있다. 바로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2000)이다. 저자는 시민적 참여와 연계가 감소하는 양상을 살펴보고 원인과 결과를 추적한 다음, 해법까지 모색해 본다.

흔히 볼링은 클럽에 가입해 여럿이 어울려 즐기던 스포츠였다. 하지만 지금은 볼링마저 나 홀로 즐기는 시대로 바뀌었다. 볼링뿐만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모든 분야에서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하는 활동이 격감하고 있다. 투표율, 정당 활동, 공공 문제에 대한 관심, 지역공동체 참여 등이 1960년대에 정점을 찍었다가 1970년대부터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우편이나 온라인에 힘입어 단체의 수는 겉으론 증가했다. 그러나 실제로 참여 열기가 높은 풀뿌리 단체의 세는 오히려 크게 위축되었다. 더구나 종교적 참여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이런 이탈 와중에, 종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종교적 몰입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특히 복음주의적·근본주의적 종파의 득세가 두드러졌다. 이것이 오늘날 문화전쟁의 배경이기도 하다.

그밖에 가족·직장·이웃 간에도 연대나 참여가 사라지고 나 홀로 생활이 점점 늘고 있다. 가족 간의 저녁식사도 줄어들고 이웃 간의 방문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참여나 교류나 연대가 파괴되어 사회적 신뢰가 위축되면, 결국 사회적 자본이 부재한 고비용 사회가 도래한다. 실제로 범죄와 소송이 늘고 경찰, 경비, 법률 서비스가 증가하고 있다.

우선은 시간과 돈의 압박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또한 교외지역의 도시화, 장거리 출퇴근, 도시의 팽창도 꼽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요인은 비교적 미미한 편이다. 반면 여가시간을 홀로 소비하게 만드는 전자화된 오락수단, 특히 TV의 영향이 크다.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무엇보다 세대교체다. 즉 오랫동안 시민활동에 활발하던 세대가 퇴장하고 있다.

이처럼 시민적 참여의 위축으로 사회적 자본이 잠식되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보건 등 다양한 분야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 시민적 불참은 ‘파당’ 문제를 야기한다. “자신을 중도나 온건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라도 (그들이 참여와 연계를 하지 않음으로써) 실제로는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몫이 날로 커진다.”

미국은 19세기 후반 성장을 거듭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아수라장’이었다. 사회적 자본은 아예 부재했다. 그때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다양한 단체를 만들었다. 1900년 전후로 보이스카우트, 적십자사, 라이온스클럽 등 결사체들이 결성되었다. 저자는 그 교훈을 살려 학교, 직장, 공동체, 국가가 사회적 자본을 늘리는 데 나서라고 촉구한다.

우리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시민적 참여와 연계를 제대로 경험한 적도 없다. 거기에 1인 가족은 급증하고 스마트폰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나마 민주화 시대에 만들어진 단체들은 정치색을 벗지 못하다가 거의 모두 권력 내부로 포섭되고 말았다. 조국(曺國) 사태가 야기한 망국적 갈등도 나 홀로 사회가 낳은 비극이라는 측면이 있다. 함께하는 공동체 건설이 절실하다.

해리 덴트 인구절벽

우리는 지금 절벽 앞에 서 있다

“인구 변동은 운명이다.” 사실 인구 변동만큼 바꾸기 어려운 거대한 흐름도 드물다. 따라서 그것이야말로 상황의 변화를 예상하고 경제의 근본적인 추세를 전망해볼 수 있게 해주는 궁극적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미래예측론이 있다. 바로 해리 덴트의 ‘인구절벽’(The Demographic Cliff·2014)이다. 우리말로는 ‘2018 인구절벽이 온다’(2015)로 소개되었다.

나라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최근의 지구적 번영은 베이비붐 세대(1937~1961년 출생)가 앞장서서 주도했다. 대체로 사람은 평균 46~47세가 되면 소비의 정점에 이른다. 따라서 1983년부터 2007년까지가 세계적인 경제 호황기라고 볼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왕성한 소비인구층이 감소하고, 아예 인구 자체가 줄어들어 전반적인 경제 위축이 뒤따를 것이다.

1949년생이 가장 많은 일본은 47년 후인 1996년 전후가 소비의 최고점이었다. 그 시기보다 대략 5년 전부터 이미 부동산버블이 터지면서 (이 책 출간 시점까지) 18년 동안 경제가 좀처럼 활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근본적인 개선 없이 그저 통화정책과 양적완화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가장 먼저 인구 변화로 인한 홍역을 겪고 있다.

1971년생이 가장 많은 한국은 2018년이 소비의 정점이다. 이로 인해 이 책의 우리말 제목에 ‘2018’이 들어간 모양이다. 최고점이란, 곧이어 급격한 하강이 닥쳐온다는 뜻이다. 한국은 대체로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소비가 최고점에 이르다가 일본처럼 계속 감소할 전망이다. 저자는 한국이 정확하게 22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을 후행(後行)한다고 단언한다.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경제에도 순환이 있다. 불황은 필요한 대가를 지불해야 비로소 호황을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선진국 정부들은 이런 자연스러운 순환에 강력하게 개입하기 시작했다. 즉 통화정책과 양적완화를 남발하며 인위적으로 경제순환을 저지하고 있다. 일본이 대표적이다. 이는 과실을 부자에게만 안겨주며, 장기적으로 버블을 점점 축적할 뿐이다.

특히 우리와 관련이 깊은 중국의 앞날이 어둡다. 중국은 지금 과잉 건설, 과잉 설비 등 과잉 투자 버블로 가득 차 있다. 일당의 일방적 지시 체제로는 이런 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2025년에 소비가 정점을 찍고 곧바로 내리막으로 바뀐다. 만약 중국의 거대한 버블이 터진다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충격을 받는 나라가 된다.

지금 세계는 모든 선진국들이 소비의 정점에서 내리막을 걷고, 아예 인구 자체가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다행히 일본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베이비붐 세대보다는 작지만 이른바 에코붐 세대(1976~2007년 출생)를 가지고 있다. 이 세대가 인구절벽을 약간은 뒷받쳐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세대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인구절벽’은 2010년대 후반 심각한 디플레이션이나 버블 폭발을 예상했지만, 다행히 빗나갔다. 하지만 빗나갔다기보다 연기된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미미하긴 해도 디플레이션이 꿈틀대고 있다. 이처럼 내부적인 절벽뿐만 아니라 지구적인 절벽이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지금처럼 지지고 볶다가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만다.

키워드

#지금 이 책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