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의 뼈를 화장해 뿌렸다는 경주 감포 앞바다의 문무왕 수중릉.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문무왕의 뼈를 화장해 뿌렸다는 경주 감포 앞바다의 문무왕 수중릉.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경북 경주 감포 앞바다. 봉길리해수욕장에서 바다 쪽으로 200m 앞에 문무왕의 뼈를 화장해서 뿌렸다는 대왕암이 있다. 필자가 이 대왕암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바로 무당들 때문이었다. 이 봉길리 일대의 모래사장 이곳저곳에서 무당들이 굿을 하는 장면이 많이 목격된다. 여기저기 모래사장에 텐트를 쳐 놓고 굿을 한다. 한두 명이 아니고 수십 명이 할 때도 있다. 특히 매년 음력 정초가 되면 이곳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해변가는 무당들로 북적거린다. 동네 사람들은 이곳에서 굿을 하기 위해 찾아온 무속인들에게 숙박과 용품들을 대여해주고 돈을 벌기도 한다.

우리나라 무속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기도처가 이곳이다. 동해안 최대의 무속 성지이기도 하다. ‘왜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대왕암을 바라보며 굿을 한단 말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위 절벽도 아니고 그냥 평평한 모래사장에서 어떤 영발이 있다고 수많은 무속인이 이곳으로 집결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왕이 죽기 전에 “내가 죽고 나면 동해의 용이 되어 외적들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문무왕이 죽은 뒤에 정말로 용이 되었을까. 그 용의 기운과 접선하려고 여기에 모이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현상은 역사와 신화, 그리고 영발이 만나는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지기는 바다 밑으로도 연결된다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이 의문을 해결해준 분이 혜담(71) 스님이다. 혜담 스님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절에 맡겨져서 유아 시절부터 절에서 자랐다. 법랍으로 따지면 70년 가까이 된다. 70년 승려생활을 해왔으니 전국 어떤 절이나 암자, 기도도량을 안 가본 데가 없다. 절에서 내려오는 고승들의 일화, 경전의 어떤 대목 등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꿰고 있고 70대인 요즘에도 시간만 나면 전국의 기도성지를 다니면서 기도하는 게 일과이다. 도선국사 환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리(地理)를 꿰뚫고 있다. 필자 입장에서 볼 때는 걸어 다니는 ‘영발사전’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혜담 스님과 충청도 천수만 바다의 간월도에 있는 간월암(看月庵)에 들렀다가 “지기가 바닷물 밑의 바위를 통과하여 섬으로까지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 물이 가로막으면 산의 기운이 통과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물을 통과할 수 있다는 이치였다. 바로 바다 밑에서 연결된 암반을 통해서 바다 건너의 돌산이나 섬으로까지 땅 기운이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바다를 건너서 기운이 연결된 경우가 우리나라에서 몇 군데를 꼽을 수 있습니까?” “대표적으로 2군데입니다. 서해안에서는 바로 이 간월암이고, 동해안에서는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이죠.” 간월암도 바다 가운데의 섬에 있는 암자이고, 경주 대왕암은 해변가로부터 200m나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대왕암까지 이어진 땅의 기운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입니까? 어느 산에서 발원된 지기가 대왕암까지 연결되었다는 말입니까?” “경주 토함산(吐含山)입니다. 대왕암에서 토함산까지 직선으로 대략 40~50리쯤 될까요? 토함산의 지기(地氣)가 지하의 암반을 통해서 대왕암까지 뻗어 있다고 봐야죠.”

스님 말씀대로 토함산의 지기가 대왕암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무속인들이 이 해변가에 모이는 현상도 모두 이해가 된다. 신라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겼던 영산이 토함산이다. 태양의 기운을 머금었다가 다시 토해내는 산이 토함산이다. 토함산의 석굴암과 대왕암은 한 세트로 볼 수도 있다. 알파요 오메가이다. 신령스러운 산의 기운은 끝에 묘미가 있다. 호박이 가지 끝에 열리듯이 땅의 정기도 끝자락에 뭉친다. 결국(結局)이란 단어가 이 뜻이다. 끝자락에 뭉쳐서 국(局), 즉 ‘에너지 장’을 형성하였다는 뜻이다.

혜담 스님의 지적에 의하면 대왕암이 보이는 해변가의 솔밭 일대 약 100m에 걸쳐 있는 땅은 강력한 기운이 통과하고 있는 자장이다. 100만볼트 고압선이 땅 밑으로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경락이 열리고 기감이 발달한 사람이 이 고압선 위에 서 있으면 기운이 쩌릿쩌릿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접신이 된 무당이 이 기운을 모르겠는가. 외형적으로 볼 때는 평범한 모래사장이지만 기운을 감지하는 고승, 도사, 샤먼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배터리 충전터’인 것이다. 여기에다가 덧붙여서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이라는 역사도 받쳐준다. 영지와 역사적 사건이 결부되면 잊지 못할 스토리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 대목에서 시간대를 확 넓혀서 통시적으로 대왕암을 조망할 필요가 있다. 대왕암은 문무왕 이전부터 영발이 뭉쳐 있는 바위로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고대인들이 현대인보다 훨씬 더 기감(氣感)이 발달해 있었다고 본다면, 민감한 센서를 지니고 있었던 고대의 샤먼이나 제사장들이 이 대왕암이 지니고 있는 자기장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 영발의 비중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신라 문무왕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여러 참모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마 신라 당대에도 이 대왕암 주변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고, 이 바위 기도터가 바다에 있으니 용왕 기도터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당나라군 수장시킨 문두루 비법의 전설

한국의 토착 3대 신앙은 칠성, 산신, 용왕이다. 하늘에서는 북두칠성을 경배하고, 산에서는 산신을 경배하고, 물에서는 용왕을 경배하였다. 바닷속에 있는 대왕암 같은 터는 용왕 신앙터로는 최적격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바다 전체를 조망하는 바위 언덕이니 말이다. 시베리아 바이칼호수의 알혼섬 바위 언덕도 용왕 기도터이다. 바이칼호수 전체를 통괄하는 입지조건을 갖춘 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왕암도 동해 바다를 통괄하는 바다의 신, 용왕이 거처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조건이다. 이 대왕암이 육지로부터 10㎞ 이상 떨어져 있었다면 아마도 용왕 신앙터로 이용하기에는 조건이 맞지 않았을 수가 있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m라서 가깝고 눈으로 바로 보인다. 용왕 기도터로는 최적이 아닐 수 없다. 문무왕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경주는 한반도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동해에 거의 맞닿아 있다. 따라서 전쟁이 나면 동해 쪽에서 경주를 공격하는 방법이 외적으로서는 가장 효과적이다. 내륙의 방비보다는 동해를 통한 해군의 공격에 취약했다고 보인다. 실제로 당나라 해군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감포 앞바다 근처까지 접근하였다. 670~671년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문두루 비법’이라는 밀교적 주술법을 사용하여 이 당나라 군대를 바다에서 수장시켰다고 전해진다. 백제, 고구려가 망한 뒤에 마지막 남은 신라를 제압하려고 출동한 최강국의 수군을 제압한 곳이 바로 이 감포 앞바다 일대이다.

만약 당나라 침공 시에 명랑법사와 문두루 비법이라는 초능력이 없었더라면 신라는 당나라에 제압당했다. 당나라 수군을 패퇴시킨 명랑과 문무왕은 이 전쟁을 같이 치렀다. 주술적 힘으로 당나라 수군이 격파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현재 감포 근처의 낭산 언덕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사(四天王寺) 터는 이 명랑법사의 문두루 비법이 행해지던 현장이었다고 한다. 삼국지에 보면 사마중달과의 전쟁 중에 제갈공명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단을 설치하고 28수와 천지신명에게 비는 장면이 나온다. 명랑이 임시로 단을 설치하고 문두루 비법을 실천했던 장면은 제갈공명 장면보다 훨씬 사실감도 더하고 극적이다. 낭산 언덕의 문두루 비법이 행해지던 현장에 문무왕도 와 있었을 것이고 감포 앞바다에서 수군을 침몰시키는 명랑법사의 초능력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을 것이다. 눈으로 보면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종교적 초능력으로 외적을 막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면 이 외적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겠다’는 믿음을 충분히 가질 만하다.

대왕암이라는 기존의 용왕 기도터에 최고권력자이자 전쟁영웅인 문무왕의 뼛가루를 뿌리자는 발상은 이렇게 나왔다고 본다. 전쟁이라는 절박하고 실제적인 상황에서 수중릉이 탄생한 것이다. 문무왕은 죽어서 정말 동해의 호국 용왕이 된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믿었다. 살아서는 왕이자 죽어서는 용왕이다. 무엇인가 줄이 맞지 않은가!

토함산에서 대왕암까지

동해의 용왕이 된 문무왕을 추모하고 동시에 신라 사람들이 문무용왕의 종교적 힘을 받기 위한 장치들이 감포 주변에 있다. 우선 감은사(感恩寺)이다. 절 이름 자체가 문무왕의 은혜에 감동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감은사 절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형이었다고 한다. 바닷물이 들어온다는 것은 용왕이 물을 타고 감은사까지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대왕암에 있던 용왕이 감은사에 한 번씩 다녀갈 수 있는 구조이다. 이를 위해 감은사는 절을 건축할 때 밑바닥 기단부에 구멍을 내어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를 만들었다. 용왕이 수시로 감은사에 행차한다고 믿었다. 아예 처음 절을 만들 때부터 이 용도로 만든 것이다. 감은사에서 불공을 드리면 용왕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이고, 용왕은 후손들에게 은혜를 내린다.

용왕을 위한 또 하나의 장치는 이견대(利見臺)이다. ‘주역’의 제일 첫 번째 괘인 건괘는 온통 용으로 이치를 설명한다. 잠룡, 현룡, 비룡 등의 개념이다. 여기에서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 나온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 용을 보았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는 지점에 이견대를 세웠다. 용왕이 거처하는 대왕암을 바라다보는 장소가 이견대이다. 용왕을 보면 이롭다는 뜻이니까 이 이름도 매우 현실적인 맥락의 작명이다. 만파식적(萬波息笛)도 용왕이 준 셈이다. 바다의 모든 파도를 잠재울 수 있는 피리가 아닌가. 세계 어디에도 이런 신비로운 피리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대왕암 주변에는 감은사, 사천왕사, 이견대, 만파식적 같은 시설물과 설화가 전해진다. 용왕 문무왕을 주연배우로 한 하나의 거대한 판타지 세트장이 설치된 것과 같다.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이처럼 기가 막힌 생각을 했을까. 그저 감탄스럽다. 그 모든 판타지의 시작이 바로 토함산에서 내려와 바닷속 대왕암으로 이어진 영발(靈發)이다. 그 영발의 신화가 13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해졌지만, 감포 해변가에서 굿을 하는 무당들을 통하여 아직도 그 생생한 의미가 계승되고 있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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