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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  잠비아서 만난 리빙스턴과 빅토리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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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92호] 202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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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잠비아서 만난 리빙스턴과 빅토리아 시대

▲ 빅토리아폭포 photo 뉴시스
잠비아 리빙스턴에 오니 패스트푸드점에 가도, 시장에 가도, 술집에 가도 흑인밖에 없다. 당혹스럽다. 모두가 나를 의식하지 않는 척하지만 실상 내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것 같다. 리빙스턴 아트갤러리에서도 동물과 흑인밖에 안 보인다. 백인 아닌 흑인을 그린 그림이 이렇게 많은 미술관은 처음 본다. 여기는 아프리카이니 당연한 일인데도 왠지 어색하고 강렬한 이질감은 내게 고립감을 덧씌우려 든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곳은 좀 낫다. 잠베지 강변에 위치한 콜로니얼 스타일의 ‘더 로열 리빙스턴 호텔’은 아프리카 스타일의 장식으로 지난 시절을 우아하게 회고한다. 내가 호텔을 꿈꿀 때 기대하는 모든 게 이곳에 있다.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가다 길을 가로막는 얼룩말과 마주쳤고, 늦은 밤바람을 쐬러 발코니로 나갔다가 옆에서 쓱 얼굴을 들이대는 기린 때문에 깜짝 놀랐다.
   
   ‘더 로열 리빙스턴 익스프레스’라는 증기기관차도 탔다. 백열등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객실에서 다섯 가지 코스 요리를 즐기며 그 유명한 빅토리아폭포까지 다녀오는 기차다. 붉은 카펫 위에서 웰컴 드링크를 받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부유층 흉내를 낸다.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며 부시트랙(Bushtracks)역을 출발한 기차는 얼마 되지 않아 잠비아와 짐바브웨 국경을 잇는 빅토리아 폴스 브리지(Victoria Falls Bridge) 위에 멈춘다. 빅토리아폭포의 석양을 보기 위해서다. 기차에 오르니 100여년 전 증기 시대의 개척자가 된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실버 나이프와 포크, 크리스털 글라스, 두툼한 린넨으로 세팅된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과거는 늘 그리운 걸까. 오늘의 주인공은 승객도 아니고, 빅토리아폭포도 아니다. 리빙스턴 익스프레스가 상기시키는 19세기란 과거의 시간 같다. 승객들은 기차 안에서 꿈을 꾼다. 현재 아닌 100년 전의 한순간을 사는 꿈이다. 여기가 빅토리아폭포이기에 이 꿈은 더욱 특별해진다. 하지만 불과 160여년 전만 해도 빅토리아폭포와 리빙스턴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다.
   
   
01 빅토리아 폴스 브리지 위로 보이는 달무지개(Lunar rainbow).
02 더 로열 리빙스턴 호텔에선 종종 얼룩말이나 기린과 마주친다.
03 리빙스턴 시내의 시장 모습.
04 코끼리 발목을 댕강 잘라 의자로 만들었다.

   아프리카 속으로 들어간 19세기의 탐험가
   
   옛날 스코틀랜드 래너크셔(Lanar-kshire)에 한 가족이 있었다. 독실하지만 가난한 부부는 일곱 아이와 노동자용 공동주택 꼭대기 단칸방에서 살았다. 한 아이는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열 살 무렵 면직공장에 다녀야 했다. 아이는 첫 월급을 받아 라틴어 문법책을 샀다. 그로부터 32년 후 아이는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탐험가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그는 30년간 남부·중부·동부 아프리카를 탐험했다. 1855년 11월 16일 잠베지강에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면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빅토리아폭포를 발견했고, 노예무역을 약화시킬 수 있는 합법적인 상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해 대서양 연안 루트를 찾아나섰다. 그 이전에는 어떤 유럽인도 감행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1855년 12월 9일 그는 영웅이 되어 영국으로 귀환했다. 빅토리아폭포를 발견할 때까지 3년간 이루어진 여정은 유럽인들을 자극했다. 이내 그는 19세기 유럽의 스타 탐험가가 되었다.
   
   그는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탐험가이자 의사, 선교사이자 노예폐지론자였다.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애초 선교사란 미션을 갖고 아프리카에 왔지만 탐험가로서 보다 강렬히 기억된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아프리카를 깊숙이 여행하고 탐험했다. 리빙스턴은 구글맵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는 시절인 160여년 전에 미지의 세상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대단한 탐험팀을 꾸리지도 않았다. 그는 몇 안되는 아프리카 흑인 하인들과 별것 아닌 장비만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질렀다. 유럽인에 의한 최초의 아프리카 횡단이다. 1853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프리카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고 싶다. 그러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선교사로서 결의를 지켜나갔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발견을 온몸으로 기뻐했다. 남편이나 부모 같은 의무에는 소홀했지만 아프리카 흑인을 혐오하는 보어인(Boer), 포르투갈인과 충돌하며 용감한 탐험가, 열렬한 노예제도 폐지론자, 헌신하는 선교사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1871년 3월 그는 병을 앓으면서도 배를 타고 콩고강을 탐험했다. 중부 아프리카를 둘러보고 나일강의 근원을 찾겠다는 여정이었다. 그를 버리고 떠난 흑인 하인들은 잔지바르로 돌아가 리빙스턴이 살해됐다고 보고한다. 이는 거짓이었지만 그를 세기의 탐험가로 각인시키는 신화에 일조했다. 그의 종적은 묘연해졌고 그를 찾기 위해 수색대가 파견됐다. 1871년 11월 10일 뉴욕 헤럴드 특파원 M 헨리(Henry Morton Stanley)가 현재 탄자니아 땅인 탕가니카호수 인근에서 병중에 있는 그를 찾아냈다. 헨리는 모자를 벗으며 리빙스턴에게 말했다.
   
   “닥터 리빙스턴, 맞으시죠?”
   
   헨리가 가져온 약으로 그는 간신히 몸을 회복한 듯 보였지만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헨리의 간청은 거절했다. 1872년 3월 14일 헨리는 리빙스턴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홀로 돌아간다. 그때 리빙스턴이 헨리와 함께 돌아갔다면 그는 2년 후 죽음을 피했을 것이다. 그는 나일강의 원류를 찾고 노예무역을 근절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탐험을 이어갔고 그의 병은 깊어졌다. 1873년 5월 현재 잠비아 북부인 치탐보(Chitambo)에서 흑인 하인들은 침대 옆에서 기도하듯 무릎을 꿇은 채 숨진 그를 발견했다. 그들은 리빙스턴의 시신을 방부처리하기 위해 심장과 장기를 제거해 땅에 묻고 9개월 동안의 힘겨운 여정 끝에 시신을 해안으로 운반했다.
   
   1874년 4월 18일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잠들었다. 리빙스턴의 마지막 저널은 같은 해에 출판되었다. 그의 가부장적 태도와 ‘빅토리아 시대’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세계로 나아갈 아프리카의 잠재력을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프리카의 유럽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아프리카가 아닌 영국에서 받는다. 이마저 제국주의, 식민주의란 오명을 덜고자 하는 영국의 세련된 변명인지도 모르지만 잠비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애정은 분명하다. 그는 아프리카라는 천둥 치는 연기 속으로, 심연을 알 수 없는 그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 잠비아 리빙스턴의 잠베지강 건너편은 짐바브웨다.

   하늘로 피어오르는 폭포
   
   리빙스턴의 해리 므왕가 느쿰불라(Harry Mwanga Nkumbula) 공항 입국장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잠비아는 에볼라와 아무 상관없어요.’
   
   아마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에볼라는 여기서 5500㎞ 떨어진 서아프리카 문제라고요!”
   
   리빙스턴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탐험가 리빙스턴을 기념해 건설된 도시다. 잠베지강에 접하는 리빙스턴은 해발 1000m 지대에 위치하며 1931년까지 ‘북로디지아(Northern Rhodesia)’, 즉 현재의 잠비아 수도였다. 리빙스턴 남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에 빅토리아폭포가 있다. 빅토리아폭포 주위를 걷다 리빙스턴 동상과 만났다. 리빙스턴은 빅토리아폭포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너무 아름답잖아. 이건 하늘에서 천사의 눈으로 봐야 할 모습이야.”
   
   나는 운이 좋다. 헬기를 타고 천사가 된 듯 하늘에서 ‘빅폴’을 바라보았으니 말이다. 헬기는 순식간에 500m 상공으로 올라가 빅토리아폭포 주변을 선회한다. 장엄하게 펼쳐진 빅토리아폭포와 굴곡지고 가파른 주변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헬기는 짐바브웨 국경마저 무심코 넘나든다. 잠베지강 가운데 그어진 국경을 넘으니 짐바브웨 쪽에서 보이는 또 다른 빅토리아폭포가 나타난다. 잠베지강 줄기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 강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로 흘러간다. 세상이 좋아졌다. 위대한 탐험가 리빙스턴도 보지 못한 모습을 이제는 누구나 돈만 내면 볼 수 있으니.
   
   리빙스턴은 폭포를 발견하고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폭포라고 불렀지만 당시 원주민들은 폭포에 악마가 산다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소리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폭포를 ‘모시 오아 튠야(Mosi-oa-Tunya)’, 즉 ‘천둥 치는 연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실제로 멀리서 들으면 빅토리아폭포는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고, 하늘로 흐르는 물줄기는 거대한 연기처럼 보인다. 엷은 안개, 물보라, 심지어 빗줄기처럼 보인다. 빅토리아폭포는 밑으로도 어마어마하게 떨어지지만 하늘로도 흘러간다.
   
   폭포 주변을 걷다 보면 ‘나이프의 가장자리 다리(Knife’s Edge Bridge)’라는 이름을 가진 다리를 건넌다. 불현듯 거대한 무지개가 다리를 가로지르며 나타났다. 이렇게 큰 무지개는 처음이다. 무지개 사이로 다리를 건너는데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 같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몸이 흠뻑 젖은 채 무지개를 보면서 165년 전 정글을 헤치고 여기에 도착해 폭포를 마주했을 리빙스턴의 모습을 그려본다. 너무 시원하고 너무 흥분돼서 자신도 모르는 새 큰 소리를 지르고 있었을 그를.
   
   나는 운이 좋았다. 빅토리아폭포에서 낮무지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밤무지개도 보았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뜨는 날, 이곳엔 드물게 달무지개가 뜬다. 루나 레인보(Lunar rainbow), 즉 태양 아닌 달빛이 만드는 무지개다. 늦은 밤, 밤무지개를 보러 멀리 빅토리아 폴스 브리지가 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밤무지개는 보이지 않았다. 밤무지개가 어디 있다는 거지? 그때 거대한 밤무지개를 마주하고 있다는 걸 정작 그 순간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밤 내가 뿌연 빛만 보고 달무지개를 보지 못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달빛이 워낙 약한 탓에 육안으로 달무지개의 형체를 알아보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밤무지개는 색채가 엷고 희지만 카메라를 빌리면 좀 더 선명하다. 나중에 모니터에 사진을 띄워 보고 나서야 알았다. 희미하긴 해도 거대한 달무지개가 보인다. 전 세계를 통틀어 빅토리아폭포, 미국 켄터키주의 컴벌랜드폭포, 그리고 하와이 호노카아 세 곳에서만 볼 수 있으니 오로라보다 귀한 몸이다. 누군가는 빅토리아폭포에서 달무지개를 보기 위해 아프리카 여행 일정을 전부 다시 짜야 했다는데 나는 3월의 보름날 우연히 밤의 무지개, 달무지개를 봤다. 리빙스턴이 준 선물이다.
   
   
▲ 스코틀랜드 출신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30년간 아프리카를 탐험했다.

   코끼리 발목 스툴에 앉다
   
   리빙스턴 타운에서 남동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에 무쿠니 빌리지(Mukunis Village)가 있다. 현재의 리빙스턴이 건설되기 전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18세기 콩고에서 온 무쿠니 추장에 의해 정복된 후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고, ‘발레야(Baleya)’라 불리는 짐바브웨 문화권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나를 구경하러 모여든 아이들을 지나 화려한 컬러의 옷을 입은 어느 아주머니에겐 갓 지은 밥을 얻어먹었다. 마을 족장을 만날 기회도 있었다. 집무실에서 만난 족장의 옷차림은 뜻밖에 평범했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우리 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도 남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족장의 흙집에 들어갔을 때 깜짝 놀랐다. 집 한가운데 사자가 이를 드러내고 울부짖는데 성한 건 머리뿐이고 거죽은 벗겨져 족장 발밑에 깔려 있다. 거죽에 머리만 달린 건 사자뿐만이 아니라 긴뿔을 가진 검은 소도 있었다. 역시나 거죽은 소머리 아래 가지런히 포개져 있다. 그래도 박제가 된 사자 머리나 소머리는 참을 만했다. 나를 경악시킨 건 소머리가 놓인 의자다. 얼핏 봤을 땐 시커먼 나무에 빤빤하고 유들유들한 돌덩이가 붙어 있는 줄 알았다. 문득 알아채버렸다. 돌덩이가 아니라 코끼리 발목이란 걸. 발목을 댕강 잘라 그대로 동그란 의자로 쓰고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코끼리 발목의 잘게 잡힌 주름이 선명하게 빛났다. 돌연 세계화 같은 말들이 무색하다. 여기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내가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와버렸구나 하는 당혹감이 엄습했다.
   
   코끼리 발목 스툴에 비하면 남아프리카의 야생동물 바비큐 식당에서 먹었던 악어고기, 얼룩말고기 정도는 애교다. 뜻밖에 악어고기는 닭고기 맛과 흡사했지만 아무래도 악어와 얼룩말로 배를 채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종종 당혹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이한 아프리카의 내면을 160여년 전에 리빙스턴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의 여정이 경이로울 뿐이다.
   
   리빙스턴에서의 마지막 날 이른 아침, 잠베지 강변에 접한 숙소, 데이비드 리빙스턴 사파리 롯지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강 건너편을 바라본다. 또 다른 미지의 세계, 짐바브웨가 코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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