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한센인 미술인들의 모임 ‘해록예술회’ 회원들.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린 전시회 참석을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소록도 한센인 미술인들의 모임 ‘해록예술회’ 회원들.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린 전시회 참석을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색다른 전시가 열리고 있다. ‘소록도 사람들의 아주 특별한 외출’전(7월 6~18일)이다. 전시장에는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살고 있는 한센인 미술인들의 모임 ‘해록예술회’ 14명의 작품 60여점이 걸렸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한센병으로 손마디가 뭉툭해져 붓을 잡기도 어려웠던 이들이 대부분인 데다 70~80대의 고령이다. 해록예술회 회장인 김기춘씨가 72세로 막내이다. 이들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이들에게 그림은 희망과 치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소록도 밖을 벗어나기 힘든 이들의 작품은 대부분 소록도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풍경과 장소들이다. 한센병 퇴치를 염원하는 ‘구라탑’, ‘남생리 등대’ ‘식량 창고’를 비롯해 가족을 그리워하며 높은 곳에서 눈물로 바라봐야 했던 바다 건너 풍경 속에는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운 비극이 숨어 있다. 강선봉 작가의 ‘수탄장(愁嘆場)’은 생이별한 가족들의 만남을 그린 작품이다.

한센인들은 자녀를 낳으면 전염을 우려해 강제로 분리됐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다른 구역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만남이 허락됐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눈으로만 바라봐야 했던 만남이었다.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이다.

강선봉. ‘수탄장’. 캔버스에 오일. 46x53㎝
강선봉. ‘수탄장’. 캔버스에 오일. 46x53㎝

작품 ‘수탄장’에도 두 줄로 끝없이 늘어선 사람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한 줄은 어른들이고 한 줄은 아이들이다. 이때도 전염을 우려해 한센인 부모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마주하고 섰다고 한다. 자식들을 안아 볼 수도 없는 부모들의 안타까움을 그림 속 나비들이 전하고 있는 듯하다.

현재 소록도에는 한센인들이 420여명 살고 있다. 마지막 한센인들이다. 환자들은 국립소록도병원에, 회복한 사람들은 7개의 마을에 모여 살고 있다. ‘해록예술회’는 2016년 결성돼 그동안 고흥 남포미술관, 전남도청 등 지역을 중심으로 22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그림을 통해 바깥 세상과 연결된 이들에게 미술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인사동 전시는 마지막 꿈이었다. 그 꿈을 이뤄준 사람들이 있다.

먼저 이들을 미술의 길로 이끈 사람은 곽형수 고흥 남포미술관 관장이다. 2005년부터 인연을 맺고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소록도에 미술을 심고 있다. 2016년부터는 미술 아카데미를 진행하고 ‘해록예술회’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곽 관장은 해록예술회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와 사회와 소통하고 그를 통해 한센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싶어 했다. 김찬동 전 아르코미술관장이 곽 관장의 뜻을 마음에 담고 있다가 토포하우스 오현금 대표에게 전했고, 오 대표가 선뜻 공간을 내주고 발 벗고 나섰다. 여기에 인사동전통문화보존회(회장 신소윤)도 힘을 보태고 포크 듀오 ‘4월과 5월’의 멤버 백순진 한국문화포럼 회장이 나서 7월 6일 전시회 오프닝 행사에서 작은 음악회를 마련했다.

류승열. ‘구라탑’. 캔버스에 오일. 53x41㎝
류승열. ‘구라탑’. 캔버스에 오일. 53x41㎝

전시 전날 소록도에서 전시 참석 준비를 하던 김기춘 해록예술회 회장은 감격에 겨워했다.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를 하다니 꿈만 같죠. 이런 공간을 내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평생 잊지 않고 살 겁니다.” 김 회장은 버스 후원을 받아 전시 참여 작가들이 1박2일 서울 여행에 나선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음식 장만을 하고 나들이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회원들 모두 사연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투석을 하는 중증 환자도 있습니다. 작품 한 점 한 점 완성하다 보면 설움도 아픔도 잊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고 예술의 힘인 것 같습니다.”

김찬동 전 아르코미술관장은 “그들의 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번 전시는 그저 지역 작가들의 전시에 그치고 만다. 그들의 작품은 들꽃 같은 존재이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새벽 별과 아침 이슬로 꽃을 피우듯 그들의 작품 역시 말없이 희망의 꽃을 피우며 자라난다”고 평했다. 한센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지는 ‘수탄장’의 비극을 만들었다. 수탄장은 사라졌지만 그들과 우리 사회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특별한 외출에 나선 그들이 그림을 통해 전하는 말에 이젠 우리가 귀를 기울일 차례다. 

소록도에 미술 심은 곽형수 남포미술관장

“우리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그 말이 제 발목을 잡았어요”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센병으로 다리도 잃고 손마디도 없는 분이 계셨습니다. 실로 손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그 손으로 신약성서 필사를 4년에 걸쳐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90세 생일날 술을 대접해 드렸는데 제 손을 꼭 잡고 그러시는 겁니다. ‘관장님! 우리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분 말씀 때문에라도 저는 이분들 곁을 지켜야 합니다.” ‘소록도 사람들의 아주 특별한 외출’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 전시된 그림을 설명하던 곽형수(72) 남포미술관장의 눈가가 붉어졌다. 곽 관장은 전시와 관련해서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곽 관장을 빼놓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곽 관장은 소록도에 미술을 심고 ‘해록예술회’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다. 곽 관장이 소록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5년 설립한 남포미술관의 역사와 함께한다. 전남 고흥군 영남면 양사리에 있는 남포미술관은 전남 제1호 사립미술관이다. 주민이라고는 겨우 70여 가구.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시골 마을에 미술관을 만든다고 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말렸다. 남포미술관은 폐교를 고쳐 만들었다. 정원사, 목수, 관장까지 1인 다역을 하면서 그야말로 곽 관장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만든 곳이다. 폐교는 원래 곽 관장의 선친 곽귀동(1914~1978)씨가 1967년에 설립한 학교였다. 곽 관장의 부친은 고향을 위해 수산업에서 번 돈으로 중학교를 만들었다. 돈 버는 족족 교사들 월급 주고 학교에 쏟아부었다. 곽 관장이 이어받아 운영하던 학교는 학생 수가 줄면서 2003년 결국 폐교됐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는 곽 관장은 아버지의 유지를 잇기 위해 미술관을 만들었다. 곽 관장의 열정과 노력 덕분에 남포미술관은 상도 받고 유명해졌다. 이젠 고흥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하는 문화명소가 됐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그의 뚝심에 넘어간 사람은 많다. 우리나라 대표 조각가로 꼽히는 이재효 작가도 그중 한 명이다. 무작정 작업실에 찾아와 전시를 부탁하는 곽 관장의 진심에 감동해 박선기, 정광식 등 내로라하는 조각가 6명을 끌고 내려가 전시를 열고 지역 아이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까지 진행했다. 서울에서도 한꺼번에 만나기 힘든 작가들이었다. 그동안 곽 관장은 겁도 없이 수많은 일을 벌였다. 소록도 프로젝트도 그중 하나이다. 소록도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작품들로 2011년 국립소록도병원 로비에서 전시를 열었다. 불편한 몸으로 만든 서툰 작품들은 큰 감동을 만들었고 전시장은 눈물바다였다. 그 사연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곽 관장은 이들에게 미술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2016년 미술아카데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병원 측에서 말렸다. 괜한 일을 했다 환자들에게 오히려 좌절감만 줄 것을 염려했다. 병원장을 설득하고 정부 기금을 타내고 사비까지 쏟아부으면서 물감 사고 캔버스 사고 미술 강사를 모셨다. 그 노력이 한센인 미술인 모임인 ‘해록예술회’로 이어졌다. 결석한 회원 집을 찾아가 설득하고 가르치며 미술아카데미는 6년째 이어지고 있다. 주변에서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만류한다. 그만둬야 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가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한센인 한 분이 저한테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 대접을 받았다’고. 그런데 그분들과의 인연을 끊을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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