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한국투자증권의 채권 트레이더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한국투자증권의 채권 트레이더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강원도발(發) 레고랜드 사태가 부른 금융시장 불안은 경제에서 ‘신용’이 얼마나 무섭게 작동하는지 보여줬다. 세계 어느 국가든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가 보증한 채권은 그 국가에서 최고의 신용등급을 얻는다. 그런데 강원도가 레고랜드 운영사의 발행 채권에 약속한 지급보증 책임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혼란이 벌어졌다. 미국발 금리상승 이후 빡빡해진 채권시장에 지방정부의 보증 채권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신호를 보낸 게 화근이 됐다.

이번 레고랜드 사태를 물고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기업이 있다. 한국전력이다. 레고랜드 사태가 터졌을 때 일각에서는 “레고랜드는 트리거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한전”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한전의 회사채인 한전채는 정부가 원리금을 지급보증하는 특수채로 최상위 신용도(AAA)를 갖고 있는 초우량채권이다. 문제는 한전의 적자다. 올해 예상되는 한전의 최대 적자는 약 40조원에 달한다. 큰 폭의 적자가 예상되는 한전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전채를 발행했다. 금리가 연 6%에 이를 정도였는데 11월 1일 기준 한전이 발행한 2년 만기 채권과 3년 만기 채권의 금리는 5.9%였다. 

한전이 ‘돈맥경화’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유 

‘돈맥경화’의 책임을 한전에 묻는 시선은 왜 나왔을까. 초우량채권인 한전채가 높은 금리를 내걸면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다.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는 한전에 밀려 차순위 투자처로 밀린다. 한전채가 발행될수록 다른 기업의 돈줄은 점점 말라가는 셈이다.

한전 운영자금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근본적 방법은 결국 전기료 인상이다. 하지만 숫자만 논하며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결국 남은 건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끌어오는 방법이다. 시장에서는 한전이 11월에도 2조원 정도의 한전채를 발행할 거라고 본다. 한 증권사 IB 관계자는 “한전이 보통 월 2조원 이상 채권을 발행해 왔기 때문에 11월도 이전과 비슷한 규모를 유지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기업은 항상 유동성 해결을 위해 자금조달을 해왔다. 그런데 요즘 채권 신용도가 높은 은행권에서도 은행채를 내놓는다. 게다가 5%짜리 예금이 나오고 7%짜리 적금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 대기업이 우리 회사 채권 5%에 내놓으니 좀 사주십시오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요즘 기준으로는 대기업 채권이라도 어느 순간 휴지가 될지 모르는 일이니 채권에다 돈을 넣을 수 있겠나.” 앞선 IB 관계자는 회사채에 대한 매력이 떨어진 걸 문제 삼았다. 그는 “요즘 채권 발행하는 금융사 담당자들이 죽어나는 시즌”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채권투자 업계 관계자는 “레고랜드 건은 문제였다. 그런데 꼭 레고랜드 때문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는 분위기다. 금리 인상기에 접어들고 경기침체 시그널이 나오면서 회사채에 대한 투자심리 자체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 실적도 점점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크고 은행채 등 쏠쏠한 곳이 많으니 돈이 점점 한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회사채 시장은 아주 냉랭한 시즌을 맞고 있다. 지난 10월 20일 금융투자협회가 발표한 ‘3분기 공모회사채 수요예측 실시 현황’에 따르면 공모 무보증사채 수요예측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3조5000억원(39%)이 감소한 5조5000억원으로 나타났다. 경쟁률도 급감했는데 경쟁률은 전년 같은 기간에는 348%였지만 올 3분기에는 무려 152%포인트나 감소한 196%로 나타났다.

보통 공모 회사채 시장의 경우 신용등급 BBB급 이상을 연기금 등 투자기관이 채권을 사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으로 본다. 지난 4~5월만 해도 일부 BBB급 기업들은 공모 회사채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발 금리 인상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가 커졌고 BBB급 회사채 투자 수요는 급감했다. 자금조달이 필요한 일부 기업의 경우 아예 회사채를 발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준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당장 10월 들어 공모채 시장에서는 미매각 사례가 속속 등장했다. 신용등급 BBB+의 한진은 2년물 300억원을 모집했지만 10억원의 주문을 받는 것에 그쳤다. 한화솔루션(AA-)이나 LG유플러스(AA) 등 우량 등급 기업들도 미매각을 겪었다. 특히 LG유플러스 공모채는 AA급이라는 신용도를 갖고 있는데도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을 경험했다. 그동안 ‘AA’라는 신용등급은 회사채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누려왔다. 그런데 이제는 신용등급이 우수하다고 해서 자금이 무조건 모이는 것은 아닌 시대가 와버렸다.

회사채도 공사채도 유찰 속출 

정부는 이런 ‘돈맥경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를 가동했다. 채안펀드는 채권시장이 경색돼 자금 순환이 막히고 기업의 자금난이 우려될 때 채권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금융회사 등이 출자해 만든 펀드로 약 1조6000억원 규모다.

하지만 이처럼 대책으로 내놓은 채안펀드를 가동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AAA등급의 초우량 공사채가 유찰되는 일이 벌어지는 건 채권시장에 부담이 됐다. 지난 10월 25일 한전채가 일부 유찰됐다. 2년물의 경우는 800억원 조달을 확정했지만 3년물이 유찰됐다. 같은 AAA등급인 한국가스공사, AA+등급인 인천도시공사도 공사채가 유찰됐다. 사실상 우량등급의 공사채조차도 유찰되는 등 수급리스크가 커진 상황에서 회사채의 회생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회사채 발행에 실패하는 건 발행 기업의 신용도와 평판에 타격을 준다. 게다가 팔리지 않은 회사채는 주관사인 증권사들이 인수해 갖고 있다가 싼 가격으로 시장에 매도한다. 이렇게 채권 가격이 떨어지면 발행 기업은 다음 회사채를 발행할 때 금리가 높아지는 손해를 보게 된다. 이렇다 보니 몇몇 금융지주 회사들의 경우 10월 회사채 발행을 철회하거나 내년으로 연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회사채 시장에서 철수할 경우 자금 조달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남게 된다.

자금 조달이 어려울수록 자금시장에서 빛을 발하는 곳은 은행이다. 대기업들은 이제 은행으로 달려간다. 이런 흐름 탓에 기업대출은 급증했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이루어진 기업대출은 작년과 비교해 68조7828억원이 늘었다. 증가 속도도 점차 빨라지고 있다. 월별 증가액을 보면 8월 5조7528억원, 9월 7조4719억원, 10월 9조7717억원으로 매달 2조원가량 늘고 있다. 같은 기간 가계대출이 약 15조원 이상 감소한 것과 비교했을 때 대조적이다.

대기업대출 잔액을 보면 9월 말 100조4823억원에서 10월 27일 기준 106조3415억원으로 6조원 가까이 늘었다. 기업대출 증가액 중 3분의2가 대기업 몫이다. 중소기업대출도 2조9930억원 늘었다. 기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돈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제 은행 문턱을 넘나드는 게 중요해졌다.

문제는 넘어야 할 문턱이 점점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대내외 변수와 불안한 경기 예측으로 신용위험이 점점 커지자 국내 은행들이 기업대출의 문턱을 좀 더 높일 것이라는 조사가 나왔다. 지난 10월 26일 한국은행이 총 204개 금융사의 여신 총괄책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금융기관 대출행태 설문’에 따르면 4분기 대출태도 지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3으로 나타났다. 지수가 플러스(+)면 ‘대출심사 완화’라고 답한 금융기관 수가 많다는 얘기고 마이너스(-)라면 ‘대출심사 강화’ 응답이 더 많다는 걸 뜻한다.

은행들이 기업대출의 고삐를 죄는 건 부실에 대한 대비 차원이다. 대출 건전성 관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데, 특히 중소기업에 대한 위험을 더욱 경계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은행들이 예상한 4분기 신용위험지수는 39로, 3분기의 31보다 8포인트 높았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하던 2020년 2분기(42)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대기업의 신용위험 지수는 17이었는데 중소기업의 신용위험 지수는 31로 조사됐다. 둘 모두 직전 분기보다 6포인트씩 상승했지만 절대적인 위험 지수는 중소기업이 높았다.

 

회사채·CP 대신 은행에만 기대는 중기 

자금조달이 어렵다고 해도 대기업은 어떻게든 헤쳐나갈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 최근 SK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장기 기업어음(CP)을 발행하기로 했다. AA+로 우량등급을 보유한 SK는 회사채 시장의 큰손이었지만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자 CP를 선택했다. 장기CP 3년물과 5년물을 각각 1000억원씩 발행할 예정인데 금리는 3년물 5.629%, 5년물 5.745%로 알려졌다. 새로운 자금조달 채널을 추가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반대로 신용등급이 낮아 지금 회사채도 발행하지 못하고 CP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중소기업들은 은행에 오롯이 기댈 수밖에 없게 된다. 다만 고금리 대처법이 문제다. 올해 1월 2.93%였던 중소기업대출금리는 8월 기준 4.65%로 올랐다. 주택담보 대출 금리(4.34%)보다 높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은행·증권사 차입’(64.1%)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중소기업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절대 다수(99.6%)는 현재의 고금리 리스크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업대출은 심사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시차가 생기는데 10월 중순이 지나 채권시장이 혼란스러웠던 걸 감안하면 11월 기업대출은 10월보다 더 늘어났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소기업도 요즘 추세대로라면 이전보다 늘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돈맥경화’로 모두가 힘든 시기지만 자금조달 환경은 이처럼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진 가운데 단기차입금을 늘려 빚을 돌려막는 상장사들이 늘어난 것도 주의해서 볼 대목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서 올해 10월 단기차입금을 늘린 상장사를 찾아보니 총 17곳(코스피 7곳·코스닥 10곳)이었다. 지난해 10월에는 12곳(코스피 6곳·코스닥 6곳)이었다. 고육지책을 선택하고 있는 곳이 이만큼 늘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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