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백지’를 들고 시진핑 정권의 ‘제로코로나’ 정책에 항의하는 베이징 시민들.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백지’를 들고 시진핑 정권의 ‘제로코로나’ 정책에 항의하는 베이징 시민들. photo 뉴시스

중국이 심상찮다.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처음으로 청년 대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대는 당국에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경찰 앞에서 정부 정책을 직접 비판했다. 심지어 지도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도 터져나왔다. 청년 시민들은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白紙)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스스로 ‘백지혁명(白紙運動)’이라 이름 붙인 자발적 시위는 베이징과 상하이뿐만 아니라 난징, 우한, 청두 등 전국 10여개 대도시로 번졌다. 반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시진핑 황제’ 3기 체제가 출범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게다가 장쩌민 전 국가주석 사망 이후 그에 대한 추모 열기까지 높아지자, 중국 정부는 지난 12월 7일 전격적으로 코로나 봉쇄를 푸는 조치를 단행했다. 당국은 ‘봉쇄 완화’에 온갖 이유를 갖다붙였지만, 성난 민심 앞에 꼬리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진핑의 콧대를 꺾은 ‘백지혁명’은 앞으로 중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지난 11월 26일 밤 상하이에서 벌어진 시위는 중국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다. 상하이 시정부에서 불과 3㎞ 떨어진 우루무치 중루(中路)에 수천 명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우루무치 봉쇄 해제하라” “신장(新疆) 봉쇄 해제하라” “중국의 모든 봉쇄 해제하라”고 외쳤다. 시위대는 진압하는 경찰과 충돌하고 일부 시민은 연행됐지만, 굴하지 않고 다음날 새벽까지 집회를 이어갔다. 심지어 이날 시위에선 “공산당 물러나라(共産黨下臺)” “시진핑 물러나라(習近平下臺)”는 과격한 구호까지 등장했다. 천안문사태 이후 30여년간 볼 수 없었던 용기 있고 과감한 반정부 집회였다.

 

“시진핑 물러나라” 외친 상하이 시민들

상하이 시민들이 이날 밤 우루무치 중루에 모인 것은, 이틀 전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인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우루무치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10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는데, 코로나 봉쇄용 차단물이 소방차 진입을 막아 피해가 커진 것으로 전해졌다. 당국의 과도한 ‘제로코로나(淸零)’ 정책이 평범한 시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올 4월부터 두 달간 당국의 장기 봉쇄로 큰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상하이 시민들은 다른 누구보다 우루무치의 화재 참사에 공감하고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 시위는 이튿날 베이징으로 번졌다. 지난 11월 27일 오후 시진핑의 모교인 칭화대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흰 종이를 들고 당국의 코로나 방역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백지를 머리 위로 흔들며 “코로나 봉쇄 해제하라” “핵산(核酸·PCR)검사 폐지하라”며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민주, 법치, 자유”를 외쳤다. 일부 학생들은 우주의 팽창과 수축을 계산하는 구소련 과학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Friedmann)의 공식이 인쇄된 종이를 들고나왔다. ‘프리드만’의 발음이 ‘자유인(freeman)’과 비슷한 점을 이용해 정부에 ‘자유’를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또 ‘노예들아 일어나라. 우리는 천하의 주인. 이것은 최후의 투쟁. 단결하여 내일로 가자’란 가사가 담긴 ‘인터내셔널가(국제공산당가)’를 불렀다. 이 노래는 중국 공산혁명 과정에서 널리 불렸으나,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시위 때 유행한 이후 당국에 의해 금지곡으로 분류됐다.

프랑스 국제라디오방송(RFI)은 대학생들이 백지를 든 것에 대해, 흰색 방역복을 입어 ‘다바이(大白)’라 불리는 코로나 단속요원들을 풍자하는 동시에 코로나 희생자를 애도하고, 당국의 검열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필자가 보기에 ‘흰 종이’는 공산당의 강압적 통치에 항의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 ‘코로나 봉쇄와 검사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는 중국인의 강렬한 열망과 의지가 함축된 상징물이다. 이번 시위를 두고 중국인 스스로 ‘백지혁명’이라 명명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백지혁명’은 같은날 밤 베이징 차오양구 대사관 밀집 지역인 량마차오 부근에서도 벌어졌다. 수백 명의 시민들은 백지를 높이 들고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핵산검사 대신 자유를 달라(不要核酸要自由)”고 외쳤고, 도로를 달리던 차량들도 경적을 울리며 시위대에 호응했다. 1987년 한국의 민주화 시위에서 벌어졌던 ‘경적 시위’가 중국에서 재현된 것이다. 이번 중국의 백지시위가 국민의 보편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난 12월 6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장쩌민 전 중국공산당 겸 국가주석 추도대회.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6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장쩌민 전 중국공산당 겸 국가주석 추도대회. photo 뉴시스

‘백지혁명’에 놀란 시진핑 지도부의 ‘전격 후퇴’

중국 정부는 지난 12월 7일 엄격한 방역 정책을 대폭 완화하는 ‘10가지 방역 추가 최적화 조치에 대한 통지’를 발표했다. PCR 검사, 확진자 시설 격리, 주거지 장기 봉쇄, 지역 간 이동 금지 등 그동안 중국인의 삶을 짓눌렀던 폭압적 정책을 대부분 해제했다. 이날부터 베이징 등 대도시의 식당과 카페는 정상영업에 들어갔다. 3년 만에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도시는 활기를 되찾았다.

시진핑 지도부가 제로코로나 정책에서 전격 후퇴한 것은, 억압적 방역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자칫 반체제 시위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위대의 구호는 ‘봉쇄 해제’ ‘핵산검사 폐지’에 그치지 않고, ‘공산당 물러나라’ ‘시진핑 물러나라’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만약 시진핑 지도부가 1989년처럼 이 성난 여론을 무력으로 짓밟을 경우, 중국은 또 한 번의 천안문사태로 치달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이는 곧 공산당 통치의 명분과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으며, 시진핑 체제의 종말을 부를 수도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왜냐하면 1989년과 지금은 ‘기층 민심’이란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고, 세계가 실시간으로 중국 상황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미 연방 상원의원들은 지난 12월 1일 “중국 당국이 평화롭게 진행되는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한다”는 서한을 중국대사에게 전했다. 시진핑 지도부의 ‘전격적인 후퇴’는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 봉쇄 완화는 ‘백지혁명’의 성과이자 시진핑 지도부의 굴복을 의미한다.

이에 앞서 11월 26일부터 청년 대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11월 30일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사망하자, 시진핑 정부의 태도에 변화 기류가 감지됐다. 주요 대도시의 코로나 검사소가 급작스레 철거되는 등 ‘제로코로나’ 정책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2월 2일 밤 베이징에서는 컨테이너박스로 만들어진 코로나 검사소가 대형 기중기에 의해 번쩍 들려 통째로 철거되는 장면이 목격됐다.

 

‘장쩌민의 죽음’ 뒤에 어른거리는 천안문의 그림자

극적 변화를 초래한 배경에 ‘백지혁명’의 확산과 함께 ‘장쩌민 사망’의 잠재적 폭발력이 작용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중국 현대사에는 전직 최고지도자의 죽음이 큰 정치적 풍파로 이어진 두 번의 사례가 있다. 1976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사망 이후 벌어진 1차 천안문사태와 1989년 후야오방(胡耀邦) 사망 이후의 2차 천안문사태가 그것이다. 만약 시진핑 지도부가 장쩌민의 죽음을 잘 처리하지 못할 경우, 3차 천안문사태가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장쩌민의 사망 직후 상하이 여론이 심상찮게 돌아갔다. 웨이보 등 소셜미디어에 따르면, 장쑤성 양저우의 장 전 주석 생가에는 11월 30일부터 추모객이 몰렸고, 문 앞과 골목에 밤새 놓고 간 조화가 수북이 쌓였다고 한다. 또 12월 1일 상하이교통대학 앞에 검은색 옷에 흰 국화를 꽂은 청년들이 집결했다. 이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일렬로 도열해 ‘장쩌민 동지, 당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선배님 편히 가십시오(學長一路走好)’라고 쓴 긴 현수막을 들었다. 장쩌민은 일본제국 지배 시기 상하이교통대학 전기과를 졸업한 대선배에 해당한다.

교통대학 후배들의 집회는 예사롭지 않은 정치적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 장면은 장쩌민이 추구했던 개혁개방 정책과 ‘3개 대표이론’으로 불리는 공산당 이념의 확장(擴張)을 후배들이 절대 잊지 않고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장쩌민의 정치적 유산이 시진핑에 의해 부정당하는 경우, 교통대학 후배와 상하이 시민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력이기도 했다. 시진핑이 부인 펑리위안 여사와 함께 장쩌민의 시신이 베이징에 도착하는 날 공항에 나가 직접 유해를 맞는 등 장례식에 극진한 예를 보인 것도 분노한 여론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필자는 본다. 시진핑은 12월 5일 바바오산(八寶山) 혁명공묘에서 거행된 송별 의식에 현직 최고지도자들과 참석했으며, 6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추도대회 시간에는 전 국민이 3분간 묵념하도록 했다.

장쩌민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거워진 데는 그에 대한 향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장쩌민은 재임 시 국민들로부터 ‘장다마(江大媽·장아줌마)’란 별명으로 불렸다. 불룩 나온 배와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를 풍자한 별명이다. 당시엔 시민들이 지도자를 그렇게 놀려도 잡혀가지 않았고, 본인도 그것을 웃어넘겼다. 장쩌민은 또 재임 시절 중국 가요계의 황후로 불렸던 묘족(苗族) 출신 민요가수 쑹주잉(宋祖英)과의 염문설이 파다했지만, 그 소문을 차단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당시 중국 인민망(人民網)의 한 간부는 필자에게 “베이징의 모 별장으로 쑹주잉이 드나드는데, 그곳이 장쩌민의 별장”이란 얘기를 거리낌없이 해주었다.

 

‘시진핑 압제’ 겪은 중국인들 장쩌민 시절에 향수 느껴

지난 10년간 시진핑의 ‘유사 전체주의’에 질린 중국인들은 장쩌민 시대가 훨씬 낭만적이었고 살 만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장쩌민 통치 시기에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거대한 미국 시장을 활짝 열었고, 중국은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소비시장으로 변모하였으며, 미국으로 유학 간 학생들이 ‘대박의 기회’를 찾아 모국으로 앞다퉈 회귀하던 시기였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미래가 ‘유럽식 민주주의’인지, ‘북유럽식 사회주의’인지를 놓고 토론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낭만적이고 희망이 넘쳤던 그 시절을 경험한 지금의 40~70대 중국인들은, 모든 것이 퇴보한 ‘시황제’ 시대를 겪으며 깊은 실망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 중국인들은 자신이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돈을 어디에 쓰는지, 어떤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외국에 있는 중국인이 돌아오는 ‘기회의 땅’이 아니라, 돈 있는 중국인이 기회만 있으면 외국으로 도망가려는 ‘기피의 나라’가 되었다. 지난 10년간 시진핑 권력에 시달린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이 가족과 함께 일본 도쿄에 반년째 머물고 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아무리 많은 재산도 ‘자유’보다 못하다는 것을 중국인들이 깨달은 것이다.

 이번 ‘백지혁명’은 하루아침에 폭발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되어 분출한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길게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이 이번 시위의 바탕이 되었고, 가깝게는 2020년 초부터 지금까지 코로나 봉쇄 과정에서 터져나온 지식인과 대학생, 일반 시민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직접적인 동력이 되었다. 대표적 인물이 변호사 쉬즈융(許志永)과 칭화대학의 쉬장룬(許章潤) 전 교수이다. 2020년 2월 우한에서 코로나가 발생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무렵, 쉬즈융은 해외 중국어 사이트에 ‘권퇴서(勸退書·시진핑 퇴진 권고서)’를 게재, 시진핑 지도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한의 경찰은 진실을 공개한 의사(리원량)을 겁주고, 방송은 언론자유를 압박하여 진실을 숨겨, 마침내 코로나를 전국적인 재난으로 키웠다”며 “이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시진핑 선생은 물러나시오. 집으로 돌아가 쉬기 바라오”라고 질타했다.

칭화대학 법대 쉬장룬 교수는 2020년 2월 6일 처벌을 각오하고 ‘분노한 인민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돼지의 해와 쥐의 해가 교차하는 시기에 우한에서 처음 시작된 전염병이 전국적인 질병이 되었다. 공권력이 제 역할을 못하니 백성을 재앙에 이르게 하고, 역병이 전 세계로 퍼져 중국은 점점 세계의 고도(孤島)가 되고 있다. 우한폐렴 확산의 중요한 원인은 중국공산당이 언론자유를 탄압하여 전염병의 진상을 숨기고 최적의 방역시기를 놓친 데 있다. 재난의 배후에는 한 사람(시진핑)을 떠받드는 ‘공산당의 조직질서’와 윗사람에게만 책임을 다하는 ‘제도적 무능’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 글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임계점까지 도달한 反시진핑 정서

흰 종이를 들어 메시지를 전하는 ‘백지혁명’의 방법론은, 2020년 2월 6일 용감한 의사 리원량이 사망한 뒤 분노한 청년들이 전개한 ‘불능(不能·못한다), 불명백(不明白·모른다)’ 운동에 단초가 있었다. 청년들은 리원량이 경찰에 끌려가 ‘반성문’을 작성하면서 썼던 이 두 단어를 흰 종이에 적어 셀카로 찍은 뒤 소셜미디어에 올림으로써, 리원량을 추모하고 공산당의 탄압에 항거하며 ‘언론자유’를 주창했다. 이때의 정치적 각성이 ‘백지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시진핑 지도부가 청년 대학생의 ‘백지혁명’에 사실상 무릎을 꿇은 배경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백지혁명’에 대한 일반 국민의 지지와 동조가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는 점이다. 베이징의 차량 경적 시위가 그 증거다. 이는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보다 더 큰 정치변화의 바탕이자 동력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둘째, 국민 사이에 ‘반(反)공산당·반시진핑 정서가 임계점 근처까지 끓어올랐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은 제로코로나 정책과 경제침체, 실업문제 등 모든 문제의 귀착점에 ‘공산당 지도부의 무능’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 대한 좌절과 분노는 작은 불씨만 있어도 폭발할 정도로 이미 한계 상황에 근접했다고 본다. 모든 행동을 감시당하는 중국에서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공산당(시진핑)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는 용기가 사람들의 가슴에 충만한 것이다. 1987년 한국 민주화운동 당시 대학생뿐만 아니라 도시의 넥타이부대가 “군부독재 물러가라”고 외쳤던 양상과 흡사하다.

셋째, 지난 10월 20차 당대회에서 시자쥔(習家軍·시진핑 친위세력) 일색으로 권력을 독점한 것이 패착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어떤 정책에서 실패하는 경우, 시진핑은 총리(리커창)나 각부 장관, 지방 당서기 등 책임을 미룰 사람과 세력(상하이방, 공청단)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든 책임을 시진핑이 져야 한다. 만약 백지혁명에 강압적 조치를 취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벌어지는 경우, 시진핑은 30여년 전 덩샤오핑처럼 자기 손에 피를 묻히든가, 아니면 스스로 물러나는 길밖에 없다. 그런 모험을 하기에는 국민의 분노가 너무나 크다는 현실을 알아버렸다.

중국 정부가 코로나 봉쇄를 완화하면서, ‘백지혁명’은 잠시 주춤할지도 모른다. 또 주동자와 배후에 대한 은밀한 탄압도 전개될 것이다. 하지만 ‘권력이란 백성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라는 것을 모든 중국인은 안다. 바다가 분노하면 언제든지 배는 뒤집힌다. 중국의 ‘백지혁명’은 이제 시작이다. 

지해범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위원·전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장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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