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여성’이 실종됐다.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인구 5132만5329명 가운데 여성 인구는 2575만9593명(50.18%)으로 과반이지만, 이번 총선에서 여성 정책 공약은 찾아보기 힘들다. 거대 양당이 네거티브전에 집중하며 정책 경쟁이 의미를 잃었다 할지라도, 저출생 대책과 기후 정책 등이 각 정당 주요 의제로 등장한 것과 비교하면 여성 정책은 후퇴한 셈이다.
여성의 과소대표성을 보완하기 위해 공직선거법에서 권고하고 있는 ‘지역구 30% 여성 추천’도 공염불에 그쳤다. 254개 지역구에서 699명의 후보가 등록한 가운데 여성은 14.16%(99명)에 불과했다. 여성 50% 공천을 의무화하고 있는 비례대표의 경우에만 38개 정당 253명의 후보 가운데 여성 후보가 54.94%(139명)로 과반을 차지했다.
‘여성’ 대신 ‘저출생’ 공약 내놓은 정당들
선거관리위원회가 홈페이지에 게재한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정당정책’에 따르면 원내 정당 8곳 가운데 10대 공약에 여성 정책을 단일 의제로 포함한 곳은 녹색정의당이 유일하다. 여성 관련 공약 목표 표제어에 ‘성평등’을 언급한 곳 역시 녹색정의당뿐이다. 거대 정당을 중심으로 각 정당은 여성·성평등 정책을 저출생 대응 정책으로 치환하거나 보건복지·안전 영역의 하위 개념에 포함시켰다.
이에 대해 박지아 녹색정의당 선대위 대변인은 “N번방 사건 당시 디지털 성폭력 등 여성 관련 공약이 각 당의 메인 공약이었는데, 이번 총선에서 다른 당들의 공약에서는 빠졌다. 그러나 여성의 현실이 변화한 것은 아니다. 기술 향상 등으로 디지털 성폭력 피해는 더욱 심각해졌다”며 “결국 득실이나 유불리에 따라 공약을 선택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절반이 여성인데, 여성의 삶이 10대 공약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각 정당들이 여성 유권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뼈아프게 반성해야 할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3월 27일 여성주권자행동 ‘어퍼’가 주최한 총선 정책 토론회 ‘여성주권자가 말한다 2024 총선에는 없는’에 참석한 전문가들 역시 원내 정당 가운데 녹색정의당과 진보당, 새로운미래의 여성 정책 공약을 높게 평가했다. 민주당에 대해서는 2022년 제20대 대선과 제8대 지방선거에서 성평등 사회를 언급한 데 비해 성평등 키워드가 축소된 점을 아쉽게 평가했다.
이와 관련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녹색정의당에 상대적으로 청년, 여성 당원이 많고 여성 당원들이 강력한 성평등 의식을 갖는 경우가 많아 여성 정책이 잘 만들어져 있다”며 “민주당에도 여성은 많지만 리더십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성평등 정치를 수용하지는 않고 있다. 인식이 부족하고 학습할 의지도 없다”고 짚었다. 이어 “성평등을 이야기하면 20대 남성의 표를 잃을 것이란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20대 남성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 소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는데, 표를 위해 이를 부추기는 정치권의 행태가 더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개혁신당과 자유통일당의 여성 정책 공약에 대해서는 “위험하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개혁신당의 ‘여성 신규 공무원 병역 의무화’ 공약을 반여성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자유통일당의 경우 여성 정책이 전무한 데 반해, 성평등 관련 추진체계를 폐기하거나 전면 퇴행시키는 공약은 매우 상세하게 제시했다고 지적했다. 자유통일당은 ‘양성평등기본법’ 개정으로 ‘성주류화(여성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의사결정권을 갖는 것)’ 정책을 폐기하고, ‘출산주류화’ 또는 ‘출산영향평가’를 실시하겠다는 내용을 공약에 담았다.
남녀 표대결 양상, ‘비동의 간음죄’ 논란
4·10 총선을 2주 앞둔 지난 3월 27일 정치권에서는 여성 유권자가 눈여겨볼 만한 소식이 잇따라 들려왔다. 이날 이주영 개혁신당 총괄선대위원장은 “여성의 비례대표 홀수 할당제야말로 성차별”이라며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신당 비례대표 후보 추천 1번인 이 위원장은 비례대표 여성할당제를 ‘가스라이팅’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여성 과소대표 문제와 정치적 성별불균형에 따라 지난해 국가인권위가 ‘공천할당제를 비례대표 의석뿐 아니라 지역구 의석에 대해서도 의무화’하도록 권고한 것을 역행하는 발언이다. 비례대표 여성할당제는 21대 총선부터 의무화됐지만, 21대 국회에서도 여성 의원 비율은 20대 총선(17%) 대비 2%포인트 오른 18.8%(300명 중 57명·비례대표 28명 포함)에 불과했다.
개혁신당은 자가당착에 빠진 모습이다. 불과 2주 전인 지난 3월 8일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 유권자의 표심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여성 정책 공약을 더 많이 내겠다고 말한 바 있다. 같은 날 금태섭 개혁신당 최고위원 역시 “영남의 민주당, 호남의 국민의힘만큼 우리 당은 여성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상태를 바꾸지 않으면 개혁신당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반성하기도 했다. 여성계는 이 위원장의 발언을 5% 미만 수준으로 답보 중인 개혁신당 지지율 반전을 위한 갈라치기로 평가했다. 이 대표의 지지기반이었던 ‘이대남(20대 남성)’이 이전과 같은 지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어서다.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은 10대 정책공약으로 포함한 ‘비동의 간음죄(강간죄)’ 도입을 철회하기로 했다. 비동의 간음죄는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내용이다. 2018년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관련 법 개정을 권고했고, 영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스웨덴, 스페인 등이 도입했다. 민주당은 ‘실무적 착오’로 선관위 제출본에 초안이 잘못 포함됐다고 밝혔다. 일부 남성층 표심을 자극하기 위한 정치권의 여론전에 백기투항한 모습이다. 전날 천하람 개혁신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비동의 간음죄에 반대 입장을 밝히며 총선 쟁점으로 꺼내들었다. 천 위원장은 “개혁신당은 우리의 내일이 두렵지 않도록 비동의 간음죄와 당당히 맞서겠다”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검사에게 있는 입증 책임이 혐의자에게 전환될 경우 억울한 사람이 양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은 ‘비동의 간음죄’를 쟁점화하며 무당층 청년 남성 유권자를 겨냥하는 모습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3월 19일부터 2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무당층은 18%다. 성별로 보면 남성 응답자 19%, 여성 응답자 18%가 무당층으로 집계됐다. 연령별로 보면 18~29세에서 무당층이 41%로 가장 많았고, 30대 무당층은 26%다. 이에 대해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정치권에서 유권자에 대한 착시효과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정치권에서는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대해 적극적으로, 회피하지 않고 논의해야 한다”며 “각 정당은 누구의 목소리가, 제대로 표집되고 있는지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