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4일 서울 서대문구 인왕시장에서 상인이 이재명 대통령 취임식을 시청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6월 4일 서울 서대문구 인왕시장에서 상인이 이재명 대통령 취임식을 시청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은 6월 4일 취임선서에서 ‘성장’(21회)과 ‘경제’(12회)를 유독 강조했다. 또 취임 당일 곧장 ‘비상경제대응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며 민생·경제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계엄으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서 중도층의 표심이 본인에게 쏠렸다는 점을 깊이 의식한 ‘중도층 사수 행보’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 윤석열 전 대통령의 몰락도 단순히 계엄군의 국회 진입이라는 충격적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가 불러온 경제 충격과 그로 인한 중도층 이탈이 정권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1월, 올해 우리나라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9%에서 1.6~1.7%로 하향 조정했다. 성장률 하락 전망의 이유로는 비상계엄 사태를 지목했다.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정치 불확실성과 경제심리 위축의 영향으로 올해 성장률이 소비 등 내수를 중심으로 약 0.2%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더해 비상계엄 여파로 실질 GDP가 올해에만 4조6000억~6조9000억원가량 급감할 것이란 진단은 국민들에게 뼈아픈 현실로 다가왔다.

이 같은 경제적 충격은 곧바로 민심을 뒤흔들었다. 특히 중도층은 경제위기 국면에서 누구보다 민감하게 움직이는 계층이다. ‘정치’라는 추상적 가치보다 ‘내 지갑 사정’이라는 구체적 현실이 더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계엄사태로 인한 경제 불안이 눈앞의 위기로 다가오자 중도층은 다시금 정권의 ‘심판자’ 역할로 돌아섰다.

역대 정권의 사례도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중도층은 정권의 운명을 뒤바꾸는 결정적 변수로 떠올랐다. 탄핵으로 실각된 이후 경제 정책 평가가 유야무야됐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2016년 10월 취임 후 최저 지지율(26%)을 기록하며 위기를 맞았다.

당시 직무 수행 부정평가 이유로 ‘소통 미흡’(15%), 다음으로 ‘경제 정책’(14%)이 꼽혔다. 강력한 촛불 민심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가 결정타가 되어 중도층 표심을 잃고 레임덕에 빠졌다. 전문가들은 ‘내란심판’이라는 강력한 여론을 업고 출범한 이재명 정부도 경제와 민생을 뒤로한 채 정치보복이나 내란 심판에만 몰두한다면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4월 17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사고현장을 방문, 해경 경비함정에 올라 수색 및 구조작업 모습을 둘러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4월 17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사고현장을 방문, 해경 경비함정에 올라 수색 및 구조작업 모습을 둘러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세월호·부동산·내분… ‘중도층 이탈’ 불러

박근혜 정부의 몰락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이미 예견됐다. 청와대의 늑장 대응과 ‘불통’ 국정운영은 국민적 분노를 자아냈고, ‘국민의 생명도 지키지 못하는 정부’라는 불신은 중도층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와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 창조경제를 내세우며 당선됐지만 현실은 달랐다. 경제 회복은 없었고, 경제민주화도 말뿐이었다. 이후 결정적으로 최순실이라는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폭로되자 중도층의 지지는 무너졌다.

문재인 정부도 이 같은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문 전 대통령은 출범 초기 소득주도성장과 공정성장, 사회경제적 개혁을 내걸며 경제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성과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취업난에 허덕이던 2030세대는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고용정책을 오히려 불공정으로 여겼다. 의욕만 앞섰던 최저임금 인상 역시 이들에게 실질적 혜택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2030세대는 중도층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특히 부동산 정책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집값 폭등과 전세대란은 중도층 이탈의 결정타로 작용했다.  

문재인 정부의 또 다른 축인 ‘적폐청산’은 국민의 시선을 경제에서 정치로 돌리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정권에 대한 피로감을 키웠다. 게다가 적폐청산에 열 올리던 상황에서 불거진 조국사태는 ‘불공정’을 외치던 2030 중도층의 이탈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문재인 정부에서 중도층 이탈의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 정책 실패였지만, 조국사태도 결정적 이유가 됐다”며 “정권의 2인자 가족 범죄가 ‘불공정’ 문제를 건드리면서 청년층의 분노를 폭발시켰다”고 분석했다. 

윤석열 정부 역시 같은 패턴을 피하지 못했다. 2022년 7월 이준석 전 대표가 윤리위의 중징계를 받고 사실상 쫓겨나자, 국민의힘은 친윤(친윤석열)과 비윤(비윤석열)으로 갈라졌다. 중도층은 권력투쟁과 당내 내분에 염증을 느꼈고, 국정 동력은 서서히 식어갔다. 이후에도 윤석열 정부는 내홍을 수습하지 못했다. 공천권 갈등, 대통령실과 여당 지도부의 불신임 사태가 이어지며 민심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경제 상황도 중도층의 이탈을 부추겼다. 물가와 금리가 치솟고,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청년 일자리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부동산 시장은 여전히 불안했다. 정치권 내 갈등과 민생 불안이 중첩되자 중도층은 점차 정부·여당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역시 12·3 비상계엄 사태였다. 계엄 후폭풍으로 한국 경제 전반이 흔들렸고, ‘태국 등 일부 국가에서 원화 환전을 거부했다’는 소식은 국내 정치 상황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등을 돌린 중도층은 민주당의 ‘내란심판’에 힘을 실었다.

 

‘뜨아아’ 전략 성공한 이유는

이 같은 전례로 인해 전문가들은 “경제와 민생이야말로 정권의 명운을 가르는 결정적 시험대”라고 입을 모은다. 중도층이 민생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번 대선에서 중도층 표심 잡기에 성공한 배경에도 적극적인 친기업·우클릭 행보가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흑묘백묘론’을 거론했고, 지난 2월에는 반도체특별법 정책토론회에서 ‘주52시간 적용 예외’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가 반발하자 다시 기본사회와 공정 성장을 강조하며 이른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우클릭을 이어나갔다. 지난 5월 7일 공직선거법 파기환송심 공판 기일 변경으로 사법리스크를 해소하자, 다음 날인 8일 경제5단체장과 만나 친기업 메시지를 쏟아냈다. 경제단체장들은 민주당 정권이 기업에 불리한 정책을 내놓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했지만, 이 대통령은 정년연장과 주4.5일제 등에 대해 “단계적, 영역별 차등을 두고 시행할 것”이라고 달랬다.

이 대통령이 민주당의 정체성을 흐리는 갈지(之)자 행보를 보이거나, 그간 보수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친기업 행보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비주류 출신이라는 차별성 때문이다. 박창환 장안대 특임교수는 “이재명 대통령은 86세대, 운동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이념적 지향도, 빚도 없다. 진영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얼마든 좌우를 넘나들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라며 이 대통령의 경제 공약 우클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박 교수는 “민주당 출신 중 이 대통령보다 유연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2021년)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차기 대권주자 1위였으나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을 말했다가 지지율이 20% 가까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다르다. 말 바꾸기 한다고 무너지지 않는다. 이념을 지향해서 나온 말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실용적으로 한 말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일상으로의 복귀’ ‘안정과 성장’이라고 봤다. 지난 6개월간 국민들이 불안정성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중도 보수’를 표방하며 자기의 이념을 커밍아웃한 게 아니라 진보와 보수 양쪽 다 안고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경제성장 이슈 등 중원을 이미 선점했다”고 평가했다.

 

정치보복보다 경제… 전문가들 ‘민생 경고’

향후 중도층의 움직임은 어떨까. 지난 5월 ‘중도포럼’ 출범을 이끈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이번 대선에서 내란심판론이 워낙 큰 흐름이라 중도층을 움직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민생”이라며 “‘잘사니즘’ ‘먹사니즘’을 진짜로 실현해줄 것인지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원장은 이 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중도층이 향후 ‘내란 종식’이나 만일의 ‘정치보복’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면서도 민생 문제에는 반응할 수 있다고 전했다. “중도층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한 번 실망했다고 바로 돌아서지도 않는다. 이미 ‘내란종식’에 대한 표심을 표출한 만큼 관련해 앞으로는 큰 움직임이 없을 것이라 본다. 잘한다고 해서 감동도 없고, 못한다고 실망하지도 않을 거다.

정치보복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을 하든 중도층은 민생만 잘 살린다면 계속 지지할 것이라 본다. 이제 판단 기준은 내란에서 민생으로 옮겨 왔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지, 말만 하고 정치 이슈에 매몰될 것인지를 관찰하다가 민생을 챙기지 못하면 지지율로 경고 사인을 보낼 수 있다.”

반면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내년 지방선거까지 적어도 1년간은 중도층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정치보복’에는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평론가는 “중도층은 임기 초반에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준다. 중도층은 내년 지방선거 때에나 의견을 표명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지금 민주당은 국정 개혁의 성과를 국민 앞에 내놓으면 되는 타이밍이다. 현재 중도표는 애초에 국정개혁을 위해 모인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박 평론가는 ‘정치보복’과 ‘내란종식’을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전제했다. 그는 “내란죄에 대해서는 당연히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중도층도 그에 박수를 보낼 것”이라면서도 “만약 야당의 주장처럼 ‘정치보복’을 하게 되면 이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는 거다. 정치 기반이 약한 이 대통령은 여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정치보복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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