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7일 강원도 춘천 공지천에서 열린 ‘2024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에서 10km코스 참가들이 힘찬 출발을 하고있다. photo 조선일보DB
2024년 10월 27일 강원도 춘천 공지천에서 열린 ‘2024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에서 10km코스 참가들이 힘찬 출발을 하고있다. photo 조선일보DB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친다. 그리고 인간은 달린다.” 20세기 전설적인 마라토너 에밀 자토펙이 남긴 이 짧은 문장은 달리기의 본질을 간결하게 압축한다. 달리기는 인류가 문명을 세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가장 원초적인 움직임이다.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의 본능으로 회귀하는 행위이자, 인류학적으로는 사냥과 생존의 수단이었다.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쫓아가 얻어내던 ‘지구력의 기술’이 바로 달리기였다.

요즘 달리기가 다시 유행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짧은 시간이나마 도시에서 보내는 수많은 노이즈(Noise·소음)로부터 멀어져 자신과 자연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친 숨소리와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는 정신을 오히려 고요하게 만들고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땀방울은 건강함의 징표이자 일상의 번잡함을 비워내는 정화 의식이 된다.

1980년대 달리기는 배고픈 시대의 운동이었다. 몸이 마를수록 유리했고, 값비싼 장비도 필요하지 않았다. 튼튼한 운동화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트랙에 설 수 있었다. 기록은 손목시계로 재고, 페이스는 숨 가쁜 호흡으로 조절했다. 첨단 보조장치 대신 근육과 폐, 그리고 정신력만이 유일한 장비였다. 누구나 운동장 몇 바퀴를 돌며 땀을 흘렸고, 달린 거리만큼 기록은 단축됐다.

2025년 현재 GPS 워치와 기록 앱, 골전도 이어폰으로 훈련하는 시대가 됐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달리기는 일정한 호흡과 템포를 유지해야만 멀리 나아갈 수 있다. 마지막 순간 러너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건 튼튼한 심장과 두 다리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가 아니라, 오직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 그래서 달리기는 기록 경쟁을 넘어선 현대인의 새로운 명상법이자, 디지털 디톡스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빠름의 시대에, 느림으로 존재를 확인하는 법. 달리기는 지금,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균형을 회복하는 가장 원초적인 길이다.

 

우린 뛰기 위해 모였다

이른 주말 새벽 6시30분. 비가 오고 몹시 습한 날씨였지만, 남산공원 주차장은 이미 만차다. 러너들의 훈련 성지로 불리는 북측순환로는 아침 일찍 뛰기 위해 모인 러너들로 가득했다. ‘가을의 전설’ 별명을 가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과 JTBC마라톤 등 메이저 마라톤이 한 달 앞으로 성큼 다가오면서 러너들은 수확을 준비하고 있다. 42.195㎞ 풀코스를 완주하기 위해선 한 달에 쌓아야 하는 마일리지와 장거리 지속주(LSD·Long Slow Distance),짧은 인터벌 훈련 등이 모두 필요하다.특히 아마추어 러너라면 누구나 꿈꾸는 기록인 서브3나 서브4(풀코스를 각각 3시간, 4시간 안에 완주하는 일)를 향한 도전 역시 이 과정 없이는 결코 쉽지 않다. 러너들은 대회 세 달 전 한 달 평균 최소 200㎞에서 500㎞ 정도를 달린다. 목표 기록을 위해 트랙 위에서 심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전력질주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남산 북측순환로는 반복되는 업힐 훈련을 통해 기량을 늘리기 딱 좋은 코스다. 오롯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러너들은 오늘도 땀을 흘리고 있다.달리는 사람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국가대표 출신 코치부터 수백 명 크루를 이끄는 리더, 그리고 첫 풀코스에 도전하는 평범한 직장인 러너까지. 이유는 다르지만 모두가 일정한 호흡과 리듬으로 자기만의 달리기 이야기를 쓰고 있다.

김영진 코치는 대한민국 육상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린다.한국뿐 아니라 아시아권 선수가 입상하기도 어려운 육상 종목에서 20년 이상 선수로 활동했다. 2002년 주니어 국가대표를 시작으로 2003년 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2013년 모스크바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국가대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등으로 활동했고 2019 군산 새만금국제마라톤대회와 2019 경기 국제하프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다. 어릴 적부터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품었던 그는 초등학교 때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가정형편상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육상부 담당 선생님의 권유로 육상을 시작하게 됐다. 첫걸음을 어렵게 시작한 만큼 오늘날까지 긴 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2017년부터 2021년까지는 여자 선수들의 페이스 메이커로 활동했다. 페이스 메이커란 대회에서 목표 기록에 맞춰 일정한 속도로 달리며 다른 선수들의 기준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는 러너다. 그가 말하는 달리기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는 ‘누구나 쉽게 언제 어디서든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이면서 성취감을 통해 자기 성장을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을 꼽았다. 그는 “특히 시작의 이유가 다르지만 대회에 출전해서 완주 후 오는 뿌듯함에서 시작해 기록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순간 달리기의 매력에 더 빠져드는 거 같다. 저 역시도 성취감을 통해 더 큰 목표가 생겼고 제 인생에 달리기는 평생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었다”라고 전했다.

달리기는 원래 가장 개인적인 운동이지만, 이제는 ‘함께 달리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문화로 확장되고 있다. 달린다는 공통점 하나로 모인 사람들은 함께 뛰고, 서로를 응원하며, 브랜드 협업과 굿즈 소비로 이어지는 ‘러닝크루’ 문화를 만들었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시작해 이제는 수백 명을 모으는 크루 리더가 된 사람들도 있다. 이지홍(39)씨는 동갑내기 러닝크루 문화가 태동하던 시기(2016~2019년) 1987년생 토끼띠 크루인 (tthc)을 만들었다. 당시 1991년생 양씨 크루 ‘뛰꼬양’ 대표인 지인과 술을 마시다가, 1987년생 러너들도 한 번 모아보자는 용기를 얻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고, 

현재  크루는 정회원만 100명, 게스트까지 포함하면 500명 넘는 인원이 함께 뛰는 대형 러닝크루로 성장했다. 현재는 동갑내기뿐 아니라 누구나 가입이 가능한 오픈크루로 운영 중이며,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러너들을 모으고 있다. 그는 달리기의 가장 큰 매력으로 가성비를 꼽았다. “어떤 취미를 즐긴다고 했을 때 시간, 에너지, 돈 등 다양한 종류의 비용이 발생하는데, 가장 저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운동이지 않을까 싶다. 또 청소년기에 경쟁이 심화된 사회 속에 있다가 성인이 되면 스스로 성장을 확인할 방법이 잘 없는데, 숫자로 명확하게 스스로의 성장을 확인하고 보람을 느끼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단기간 목표를 세워 성취를 경험하고 자기효용감을 경험하기에 정말 좋다.” 그는 달리는 동안은 미디어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으로 몰입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았다. “물론 달리는 와중에도 팟캐스트, 음악 청취는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휴대폰과 디스플레이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고하고 고민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지방(대구) 사람으로서 서울이라는 곳을 경험하고 즐기고 밟아보는 과정으로 달리기는 굉장히 좋다. 도심의 곳곳, 한강의 모든 길을 제 발로 밟아본 것 같다. 그리고 이 장점은 여행을 갔을 때도 도보, 대중교통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등산처럼 나이나 노화와 무관하게 꾸준히 즐길 수 있다. 아직 제가 젊은 나이라 잘은 모르지만 대회장에서 만나는 선배님들을 보면 나도 이 취미를 계속 즐길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김영진 경기도청 소속 육상코치 photo 김영진 제공
김영진 경기도청 소속 육상코치 photo 김영진 제공

러닝 경제학

한국에서 달리기는 더 이상 ‘개인의 취미’에 머물지 않는다. 2025년 러닝 인구는 무려 100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인구 5명 중 1명이 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러닝 관련 시장 규모는 2조원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다. 가장 원초적인 운동이 이제 패션과 관광, 헬스케어를 잇는 산업 생태계의 중심에 섰다. ‘러닝 경제’란 신조어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건강·레저에 대한 수요와 MZ세대 소비 트렌드가 맞물린 결과다.

러닝 경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꺼내야 할 화두는 단연 러닝화다. 나이키의 ‘알파플라이’, 아식스의 ‘메타스피드’, 아디다스의 ‘아디오스 프로’ 같은 톱티어 러닝슈즈는 탄성이 좋은 카본플레이트(탄소판)와 고기능성 소재를 탑재해 고가인데도 인기가 높다. 러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 20만~30만원대 정도의 발매가에도 품귀 현상이 생길 정도다. 아식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매하는 ‘슈퍼블라스트’ ‘노바블라스트’ 등 인기 모델은 동시 접속자가 3만명이 넘는 오픈런 현상까지 목격된다. 러닝화는 러너들 사이에서 기록 단축을 위한 필수 투자품을 넘어, MZ세대 사이에서 일상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러닝코어’가 대표적이다. 러닝코어는 러닝 관련 의류 등이 일상복으로 주목받고 있는 패션 트렌드다. 팬데믹 기간 등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등산을 기반으로 한 패션을 뜻하는 ‘고프코어’ 붐을 이어받았다. 온러닝과 새티스파이, 호카오네오네, 디스트릭트 비전 등은 모두 러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패션 브랜드로 각광받고 있다. 국내 스포츠 브랜드들도 연이어 러닝 라인을 강화하며 ‘런심’ 잡기에 나섰다. 뉴발란스는 올 초 서울 북촌을 재단장해 ‘런 허브’를 선보였다. 이곳에서 러너들은 제품을 직접 착용하고 최대 2시간까지 달려볼 수 있다. 러너들의 경험 가치를 중시한 전략은 적중했다. 뉴발란스의 러닝 관련 매출은 이랜드월드 전체 실적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분기 러닝 매출은 전년 대비 96%, 러닝 의류와 용품 매출은 128% 성장했다. 젝시믹스는 러닝 전문 라인업인 ‘RX’를 론칭, 1년 만에 매출 1000억원을 일궈냈다. 패션과 기능을 모두 잡은 가성비 있는 제품이 강점으로 꼽힌다. RX 라인의 2분기 판매량과 매출액은 지난해 대비 각각 303%, 251%씩 증가했다.

마라톤 대회의 경제 효과도 상당하다. 해마다 전국에서 열리는 마라톤은 400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춘천마라톤, JTBC마라톤, 서울국제마라톤 등은 참여권을 손에 쥐기 위해 치열한 티케팅 경쟁을 벌여야 한다. 특정 상품과 대회 참여권을 묶어서 판매하거나 추첨 방식으로 참여 티켓을 판매하는 방식까지 등장했다.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지역 경제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마라톤 참가를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런트립(Run+Trip)’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수십 명의 참가자를 모아 숙박, 관광, 마라톤 대회를 하나의 상품으로 묶어 판매한다. 지역 홍보와 관광 소비까지 이어지는 ‘러닝 경제’ 효과는 연간 1000억원을 웃돈다는 분석도 있다. 런트립은 국내 지방도시뿐 아니라 호주 시드니, 미국 뉴욕이나 홍콩, 싱가포르 같은 도시들로 수십만 명의 러너를 불러들이고 있다.

러닝 열기는 러닝화와 대회에서 그치지 않는다. 훈련 전 섭취하는 젤·보충제나 경기 후 사용하는 마사지건·테이핑·리커버리 웨어까지, 운동 전후 소비가 새로운 시장을 열고 있다. 건강보조식품, 피부 보습제, 자외선 차단제 같은 웰니스 제품도 러너를 주요 타깃으로 삼는다. 첨단 기술과 러닝도 떼려야 뗄 수 없다. 러너들의 손목에는 거의 대부분 GPS 워치가 채워져 있고, 귀에는 골전도 이어폰이 걸려 있다. 심박수와 페이스, 산소포화도까지 실시간으로 측정되며, 앱을 통해 데이터가 기록된다. 애플, 가민, 삼성전자 등은 러너를 핵심 고객군으로 겨냥한다. 나이키 런 클럽(NRC), 스트라바 같은 앱은 단순한 기록장이 아니라 전 세계 러너들을 연결하는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성장 중이다. 최근에는 월 구독 기반의 맞춤형 코칭 서비스까지 내놓으며 ‘데이터형 소비’가 러닝 경제의 또 다른 성장 동력이 되고 있다.

물론 과제도 있다. 프리미엄 슈즈의 인기에 따른 거품 논란이나 카피캣 제품의 경쟁 이슈, 마라톤 대회마다 뒤따르는 폐기물 등 지속 가능성 이슈가 대표적이다. 많게는 수십 명이 함께 뛰는 러닝크루 문화도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자유롭게 달릴 러너의 권리와 공공의 정서가 부딪치면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도시에 놓였다. 한국에서도 러닝이 ‘도시 속 문화’로 자리 잡기를 원한다면 에티켓과 인프라가 함께 정비돼야 한다.

AI와 초고속 정보 처리가 지배하는 시대, 달리기는 여전히 느림의 미학으로 완성되는 가장 단순한 운동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와 맞물리며 가장 강력한 산업을 만들고 있다. 러닝화에서 시작된 소비는 러닝 패션, 런트립, 관광과 콘텐츠로 번지며 거대한 경제를 이루고 있다. 레트로가 단순히 과거 회귀가 아닌 본래의 힘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러닝은 곧 레트로의 상징이다. 가장 오래된 운동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새로운 산업을 달리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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