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복지식당’ photo (주)인디스토리
영화 ‘복지식당’ photo (주)인디스토리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정재익(49) 감독은 2010년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다. 사고로 목뼈가 손상되면서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전신이 마비됐다. 꾸준한 재활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이전처럼 자유로운 일상은 완전히 잃어버렸다. 지팡이에 의존해서 양다리를 움직여도 5m도 못 가 고꾸라졌고 왼쪽 팔의 지속적인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더구나 신경 손상으로 인한 언어 장애까지 왔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4년 뒤에 찾아왔다.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장애등급 판정을 받았는데, 여기서 ‘경증’ 판정이 나왔다. 혼자서는 숟가락도 들 수 없고 열 걸음도 채 가지 못하는, 누가 봐도 중증 장애인데 경증 판정을 받은 것이다. 중증으로 분류되는 1~3급은커녕, 6개 등급 중에서 두 번째로 장애등급이 낮은 5급 지체장애 판정을 받았다. ‘(열 걸음 정도라도) 보행이 가능하니 하체는 정상’이라는 이유였다.

경증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지원은 극히 제한적이다. 장애인 등록을 한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제공되는 전기요금·고속도로 통행료·통신요금 할인 정도다. 차상위계층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는 월 4만원 정도의 장애수당이 추가로 제공될 뿐이다. 중증 장애인이 당장 병원 밖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전동휠체어 비용 지원, 장애인 콜택시 이용, 취업 지원사업 참가 그 무엇도 경증 장애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지난 4월 14일 개봉한 영화 ‘복지식당’은 이러한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그야말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정 감독의 이야기다. 제주도에서 열린 영화제작 워크숍에서 정 감독의 초기 시나리오를 접한 서태수(48) 감독이 정 감독과 함께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해 96분 길이의 장편영화가 탄생했다. 지난 4월 25일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두 사람을 줌으로 인터뷰했다.

 

무늬만 폐지된 장애등급제

장애인 문제를 전에 없이 이슈화시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지난 4월 24일 지하철 시위를 5월 2일까지 잠정적으로 중단한다고 밝혔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날까지다. 전장연 측은 “장애인 권리 보장 예산과 관련한 (추 후보자의) 입장이 나오기까지는 시위를 유보하겠다”고 말했다. 복지와 현금지원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한 복지 예산이야말로 장애인 권리보장의 핵심이라는 이유에서다.

장애등급제는 이 예산을 누구에게 얼마만큼 분배할지를 결정하는 강력한 기준이 된다. 장애인 복지예산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0.6%에 불과할 만큼 재원이 한정된 상황에서는 더더욱 장애등급제의 역할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명확히 떨어지는 의료적 기준을 가지고 일괄적으로 등급을 판단하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장애인 복지 서비스를 관리·운영하기에는 편리하지만, 한 명 한 명의 절실한 요구를 반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장애등급을 1~6등급으로 나누는 제도는 2019년 ‘명목상으로는’ 폐지됐다. 대신 의학적 기준에 따라 장애 정도를 심사하는 제도가 자리 잡았는데, 중증 혹은 경증으로 나누어 장애 정도를 판단하는 것으로 간소화됐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이를 두고 ‘가짜 폐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존의 1~3급은 중증, 기존 4~6급은 경증으로 분류되는 것은 똑같은데 ‘말만’ 폐지라는 것이다.

정재익 “장애등급제는 절대로 폐지된 게 아닙니다. 중증·경증을 여전히 나누고 있는데 말만 폐지죠. 장애인이 전국에 200만명이 넘는데 획일적인 기준으로 장애 정도를 본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서태수 “의학적 기준만 고려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 사람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과 고려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거든요. 몇 걸음 걸었을 수도 있고 팔을 겨우겨우 올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취업이나 일상생활 등)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못 하는데 정상이라고 판명하면 정 감독 같은 사람들은 혼자 못 살 걸요.”

실제로 등급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중증·경증 구분 때문에 장애인들은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한다. 지난 2020년 중증장애인임에도 서울시에서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황모씨의 경우도 그렇다. 서울시에서 장애인 콜택시를 운영하는 서울시설공단은 사용 불가 이유를 묻는 황씨에게 “상지(팔)는 중증이지만 하지(다리)는 경증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에 황씨는 지난 2월 서울시를 상대로 장애인차별중지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일괄적인 기준으로 장애 정도를 판정하는 행정편의주의가 여전히 장애인의 기본적인 권리를 제약하는 셈이다.

영화 ‘복지식당’ photo (주)인디스토리
영화 ‘복지식당’ photo (주)인디스토리

“전동휠체어 받은 날 장애인 인생 시작”

등급제의 폐해를 익히 알고 있던 정 감독은 5급 판정을 받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년간은 집 밖으로 아예 나오지 못하고 칩거 생활을 이어갔다. 행정소송을 통해 등급 재조정을 해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비용과 시간이 모두 부담이었다.

우울감에 빠져 있던 정 감독을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전동휠체어였다.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시작한 전동스쿠터와 전동휠체어 기증 사업에 참여해 전동휠체어를 기증받았다. 전동휠체어는 200만원이 넘는다. 중증 장애인으로 등록돼 있으면 무상 혹은 저렴하게 살 수 있지만, 경증 장애인이고 하지가 정상으로 판정난 경우에는 해당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사적인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정 감독은 “그때부터 내 장애인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간간이 영상 제작 일을 하던 정 감독은 2018년 장애인 영화제작 워크숍에서 서태수 감독을 만났다. 영화를 전공하고 20여년 동안 영화만 만들어온 서 감독은 정 감독이 처음으로 쓴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전했다.

“글에 분노와 답답함이 가득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 텐데 정 감독이 언어장애도 있고 해서 사람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실수로 들어주기 시작해서….(웃음)”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협력

그렇게 만든 영화는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초청되는 등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영화 제작 초기에는 둘의 협력이 쉽지만은 않았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감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편견이 컸다.

정 감독은 언어장애 때문에 이따금 의식과 상관없이 입 모양을 움직이게 돼 발음이 뭉개진다. 정 감독이 서 감독과 영화를 만든다고 하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데 무슨 영화를 찍느냐’ ‘영화를 알긴 아느냐’는 비난이 쇄도했다. 반대로 서 감독은 ‘장애인들 괜히 이용하지 마라’는 말까지 들었다.

정재익 “처음에는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예전엔 그런 소리가 정말 싫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어요. 장애인들도 그렇고 주변에서 영화를 다들 좋아해 주니까, 뜻밖에.”

그 결과로 디테일하면서도 객관적인 복지제도의 사각지대가 그려졌다. 서 감독은 장애인 내부 사회의 모순이나 내부의 권력 다툼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길 원했다. ‘내부자’인 정 감독은 처음엔 주저했지만, “장애인 내부 이야기를 비롯한 시스템과 내부 구조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싶다”는 서 감독의 설명에 설득됐다. 중증 판정을 받기 위해 심사 과정에서 장애인들이 편법을 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에는 편법을 써서 중증 장애 판정을 받은 ‘달리는 2급 장애인’ 등이 등장하는데, 중증 장애인에게만 혜택을 주는 등급제 안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모순이다.

영화 속 디테일은 모두 정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나왔다. 제주시 칠성로의 불 켜진 시장 골목을 꿈에서나마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 전동 휠체어를 처음 타고 기뻐하며 병 시중을 도와준 누나에게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은 모두 정 감독 얘기다. 그는 “나도 꿈속에서는 걸어다닌다”며 “장애인들은 그런 꿈을 많이 꾼다”고 덧붙였다.

지난 4월 25일 줌으로 인터뷰한 영화 ‘복지식당’의 정재익(왼쪽), 서태수(오른쪽) 감독.
지난 4월 25일 줌으로 인터뷰한 영화 ‘복지식당’의 정재익(왼쪽), 서태수(오른쪽) 감독.

복지의 패러다임이 변해야

장애등급제를 기초로 한 등록제도는 공급자 중심의 복지 체계에 가깝다. 행정기관에서 표준화된 기준을 먼저 마련한 다음에 수요자인 장애인들의 요구를 맞추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조한진 대구대학교 교수(사회복지학)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장애 정책에서는 뭘 해줄지 결정하기도 전에 정부 주도로 획일적으로 (장애인을) 등록하고 등급을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개인마다 원하는 서비스나 욕구를 판정하는 수요자 중심의 체계로 바뀌도록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동명 동덕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장애 정도에 따라 장애인을 등록하는 현 제도의 패러다임을 확 바꿔야 한다”며 “같은 1급이어도 시각장애 1급과 지적장애 1급이 완전히 다른데 지원의 총량이 같으니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장애인 정책으로 제시한 ‘개인예산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했다. 일괄적으로 현금 및 바우처를 지급할 테니 각자의 필요에 맞게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정 감독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는 활동보조지원 확대다. 장애인의 신체·가사·사회활동을 포함한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공공 서비스인데, 월 120~150시간의 보조 서비스는 그에게 턱없이 적다.

정재익 “영화 관련해서 서울에 가야 했는데, 이럴 때 활동지원서비스는 못 써요. 출장 가면 시간이 많이 나가잖아요. 지원받는 시간이 좀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죠.”

서태수 “장애인들이 원하는 건 완전한 등급제 폐지예요. 각 개별적인 장애에 필요한 혜택들이 적재적소에 주어져야 한다는 거거든요. 언제 어디서든 내 몸에 맞는 장애를 확인받고 그걸로 인해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거죠. 자립이라는 게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결국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같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자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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