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베흐람에 있는 그리스 고대 도시 아소스 유적.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소스 왕 헤르미나스의 멘토로 머물던 곳이다.
터키 베흐람에 있는 그리스 고대 도시 아소스 유적.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소스 왕 헤르미나스의 멘토로 머물던 곳이다.

에게해 작은 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식을 지켜봤다. 한국이 아니라 유럽 선진국 정치가의 연설처럼 들렸다. 한국 정치무대에서는 무심코 무시되는, 자유와 지성이 키워드여서 그런가 싶었다. 윤 대통령은 과학과 진실에 기초한 합리주의와 지성주의 결여가 민주주의 위기이자 한국의 문제라 진단했다. 광우병 사태에서 보듯, 실제 몰(沒)지성, 비(非)지성, 반(反)지성이 판을 친다. 그런 카오스 상태에서는 자유도 무의미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5년 전 취임사에서는 권위주의적 대통령 문화, 보수·진보 간의 갈등이 한국의 문제라 강조됐다. ‘역사’라는 단어도 무려 7번이나 언급됐다. 두 취임사를 비교해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사뭇 다르다. 문 대통령은 거대담론과 대결 구도를 통한 분석과 해결을 제시했다. ‘대통령 문화’ ‘보수·진보 갈등’ ‘역사’라는 키워드에서 알 수 있듯이 총론적이고도 집단적 테마에 매달렸다. 윤 대통령은 기본원칙에 방점을 뒀다. 구체적으로 어떤 원칙과 기준으로 문제를 풀지에 집중했다. 누가 옳고 틀린지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일단 모두가 동의할 기본원칙부터 세우자는 생각인 듯하다.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일상생활 속의 원칙이자 행동강령에 대한 재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암브로시아나미술관에 걸려 있는 ‘아테네 학파’. 바티칸 칼라 벽화의 원본에 해당하는 흑백 데생이다.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돼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암브로시아나미술관에 걸려 있는 ‘아테네 학파’. 바티칸 칼라 벽화의 원본에 해당하는 흑백 데생이다.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돼 있다.

대통령 취임사가 불러낸 아리스토텔레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경구는 윤 대통령 취임사를 듣던 중 떠올린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신의 경구다. 반지성 극복을 통한 자유 추구와 일맥상통한다. 예수가 말한 진리 추구와 자유의 주체는 개인이다. ‘우리끼리’나 ‘민족’ 같은 집단이 아니라 철저히 독립된 ‘나 자신’의 행동강령이다. 예수의 사랑은 집단적 주문이 아니라 개인의 고독한 기도에 주목한다. 99마리 양이 아니라 한 마리 길 잃은 새끼 양을 배려한다. 진리와 자유, 지성주의는 2400여년 전 그리스 철학가들이 내세운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그리스 철학가들은 인간의 본성을 ‘지(知)를 사랑하는 것’이라 분석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철학의 영어 단어 ‘Philosophy’의 어원은 그리스어 ‘사랑(Philos)’과 ‘지(Sophos)’를 합친 것이다. 철학을 통해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 철학가들의 상식이었다. 철학, 즉 지성과 진리 추구를 통한 자유인 셈이다.

윤 대통령이 35번이나 언급한 자유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저개발국가에서 볼 수 있는 폭정에서 벗어나려는 ‘수동적 자유(Freedom from)’와, 철저한 개인 윤리에 기초한 ‘능동적 자유(Freedom to)’다. 수동적 자유는 나만을 위한, 나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다. 능동적 자유는 나만이 아닌, 상대방과 사회·국가·인류를 위한 관심과 애정에서 출발한다. 공원에서의 자유라고 하면 아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떠드는 것부터 생각할 수 있지만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주변도 깨끗이 이용하는, 한 단계 높은 자유도 있다. 윤 대통령 취임사 속 자유 역시 능동적 자유에 한층 주목했을 것이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버지 필립왕에게 일갈한 소년 알렉산더의 말이 기억난다. “세계를 지배하기 전에 걸음부터 똑바로 걸어라!” 거대담론을 말하기 전에 한국의 윤리 원칙부터 재정립하는 것이 진짜 필요할지 모른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윤 대통령 취임사의 멘토가 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라 생각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절감하지만, 복잡하게 변해가는 사회를 지킬 최후의 보루는 바로 개인과 사회의 윤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명언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다’를 기억할 것이다. 인간은 야생동물처럼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도시국가였던 폴리스(Polis)를 중심으로 한 사회공동체 일원이란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숙한 인간과 사회에 이르는 첩경으로서 윤리라는 개념을 발굴해냈다. 윤리의식 고양이야말로 성숙한 개인, 나아가 발전된 사회를 창조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윤리의식 고양=반지성 극복=개인과 사회 발전’이라는 등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학(萬學)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철학가다. 윤리학뿐만 아니라 논리학, 우주학, 정치학, 자연학, 기상학, 생물학, 시학, 연극학, 심리학에 이르는 학문 전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였다. 엄청난 책과 기록을 남겼지만, 대부분 유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그러나 제한된 저서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이래 서양 철학의 중심으로 추앙되고 있다. 이유는 윤리학의 최고봉에 선 철학가이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글로벌 팬데믹으로 번지기 직전인 2020년 1월 중순, 아리스토텔레스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3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밀라노까지 달린 뒤에야 대면했다.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Raphael)의 그림 ‘아테네 학파(The School of Athens)’ 속에 등장한 중심 철학가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1509년 제작된 가로 804㎝, 세로 285㎝에 달하는 초대형 그림으로, 당시 암브로시아나미술관(Pinacoteca Ambrosiana)에서 전시했다. 유럽 미술관의 특징 중 하나지만 유명한 그림의 경우 전시기간이 짧고 불규칙하다. 매일 같은 장소에 걸려 있는 게 아니다. 세계 곳곳의 미술관을 떠돌거나 장시간 보수에 들어가면서 관람객 눈에서 사라질 수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파’는 개수를 위해 무려 4년간 사라졌다가 전시에 들어갔다.

그리스 고대도시 아소스에 있던 원형극장 유적.
그리스 고대도시 아소스에 있던 원형극장 유적.

‘아테네 학파’ 그림 속 두 철학자

르네상스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아테네 학파’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로마 바티칸미술관 내부 일명 ‘라파엘로 룸(Room)’이라 불리는 곳에 들어선 19개의 벽화 중 하나가 ‘아테네 학파’다. 벽화들의 주된 주제는 성경의 내용이나 교황의 업적으로 모아진다.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그림은 아주 예외적이다. 밀라노의 ‘아테네 학파’는 바티칸에 그려진 칼라 벽화의 원본에 해당한다. 벽화에 앞서 미리 제작된 밑그림으로, 숯으로 표현된 흑백 데생이다. 바티칸미술관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목을 천장으로 꺾은 채 사람 홍수 속에서 떠밀려가며 관람하는 것이 전부다. 느끼고 관찰할 틈이 없다. 암브로시아나미술관의 ‘아테네 학파’는 목 통증 없이, 정면으로 그림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전시돼 있다. ‘아테네 학파’가 전시된 5호실은 라파엘로 그림 단 하나만을 위한 초대형 공간이다. 그림에만 조명이 설치돼 있을 뿐 주변 전체가 암흑이다.

예술이나 역사 교과서를 통해 눈에 익었겠지만, ‘아테네 학파’ 그림 속의 주인공은 한가운데 그려진 두 명의 철학가, 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기원전 428년에 태어난 플라톤은 기원전 384년 출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그림 왼쪽 수염이 가득한 원숙한 모습이 플라톤, 오른쪽의 비교적 젊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두 사람은 각각 책 한 권을 왼손에 들고 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다른 철학가들의 어록을 다룬 ‘대화(Timaeus)’,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을 높은 품격으로 채워줄 ‘윤리학(Ethics)’에 관한 책을 갖고 있다.

‘아테네 학파’ 그림 전체를 통틀어 필자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두 철학가의 오른손 모습이다. 플라톤은 팔을 수직으로 세운 채, 오른손 둘째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고 활짝 편 손바닥을 15도 정도 올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플라톤은 우주와 삼라만상의 진리를 파헤친 철학자다. 육체적 세상만이 아닌, 영원한 세계를 염두에 두면서 살아간 철학가다. 비교 대상과 삶의 배경이 인간 사회가 아니라 이상적인 존재, 즉 하늘이라 볼 수 있다.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현실 정치에 기초한 인간 윤리의 고양을 주창한 철학가다. 정치를 통해 사회가 발전하듯, 개인의 윤리 향상과 함께 고매한 품격의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팔을 앞으로 뻗고 손바닥을 편 것은 현실과 전진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두상
아리스토텔레스 두상

왕의 정책자문관으로 아소스에 오다

고대 그리스 유적지 아소스(Assos)는 아리스토텔레스 삶의 흔적을 탐구하던 중 발견한 곳이다. 그리스 레스보아(Lesvore)섬 북쪽 내륙 바닷가에 들어선, 현재 터키 아나톨리아의 작은 마을 베흐람(Behram)에 있었던 고대도시다. 기원전 10세기부터 발전한 무역도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3년 정도 머문 곳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다른 철학자들과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아테네가 아니라 당시 야만인으로 통하던 북부 내륙 마케도니아 출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테네 시민이 아니다. 플라톤과의 만남은 기원전 367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 아카데미아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기원전 347년 스승 플라톤이 사망하면서 37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난다. 무려 20년간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한 플라톤이 인정한 제자였지만, 마케도니아 출신으로서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아소스로 옮길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위는 왕을 위한 정책자문관, 즉 멘토였다. 흥미롭게도 당시 아소스 왕은 노예 출신 헤르미나스(Hermias)였다. 노예 신분으로 아테네에 방문했을 때 들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감화돼 초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의 도움하에 아소스에서 결혼까지 하고 가정도 꾸린다. 그러나 3년째 되던 해 헤르미나스는 페르시아 침략과 함께 살해된다. 이후 3년간 레스보아섬에서의 망명 겸 피란 생활을 겪는다. 그러다 기원전 342년 42세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큰 변화가 닥친다. 당시 13살이던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왕자를 위한 가정교사, 즉 멘토로 초대됐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현실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과 지혜가 소년 알렉산더에게 전수된 것은 물론이다.

아소스에 들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체득했던 자연풍광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서였다. 2400여년 전 그리스 아테네의 모습은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기암절벽을 낀 고대도시 아소스는 기원전 5세기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고 봐야 한다. 고대 로마 지배하에 도시가 확장되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리스 당시 모습 그대로 이어져온 곳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자연과 바다 그리고 하늘 아래서 살아갔을까? 바다에 인접한 비포장 도로를 따라 1시간 정도 달리자 아소스가 나타났다. 조잡한 형상의 흰색 아리스토텔레스 입상이 눈에 들어온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흔적이지만, 터키 내 그리스 로마 유물의 상당수가 영국·프랑스·독일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입상도 유럽 박물관 내 조각의 모조품일 것이다.

아테네 신전은 아소스 최고 꼭대기에 들어서 있다. 바람이 엄청나다. 제우스신의 축복인지, 매 두 마리가 하늘 높이 떠 있다. 고대 그리스 유적지에서 만날 수 있지만 매는 항상 암수 한 쌍이 함께 날아다닌다. 공중에 뜨는 순간 주변 새들이 전부 사라진다. 신전을 관찰하던 중, 아소스 관리자의 ‘역사 감각’이 특별하다고 느껴졌다. 아테네 신전 주변에 올리브나무 단 한 그루만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에서도 확인했지만, 반드시 ‘올리브나무 단 한 그루’만 심어야 하는 것이 아테네 신전 장식의 철칙이다. 다른 나무는 전부 잘라야만 한다. 아테네 신전에서 내려다보는 에게해는 깊고도 넓으며 따뜻하다.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고요한 바다가 에게해다. 폭풍이나 바람이 강한 겨울 외에는, 작은 배로도 멀리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항해술과 무관했던 시대라도 주변 지형만을 보면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여행이란?

필자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미지는 소요학파다.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에 나서기 1년 전인 기원전 335년, 49살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 뒤 시작한 철학탐구 방식이 소요학파였다. 밀폐되거나 제한된 공간에서의 진리탐구가 아니라 심장 고동소리와 땀 냄새로 얼룩진 현장철학 연구방식이다. 아테네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점도 그가 바깥으로 나가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당연하지만, ‘현장=현실’이다. 돌이켜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62세 인생은 여행으로 이어진 삶 자체다. 아소스에 머물 당시, 매일 아테네 신전에 올라 에게해를 통한 새로운 여정을 꿈꿨을지 모르겠다. ‘현장=현실=여행’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삶이자 캐릭터라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61세 되던 323년 아테네 북동쪽, 마케도니아 땅으로 거처를 옮긴다. 알렉산더 대왕이 32살 나이로 바빌로니아에서 세상을 뜬 해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을 뜬 것은 알렉산더 사후 1년 만인 기원전 322년이다.

황당한 상상이 될 듯하지만, 윤 대통령 취임사에 ‘여행’이란 단어가 추가됐더라면 좋았을 것란 생각이 든다. 지성, 자유, 그리고 여행. 놀고 즐기는 여행도 있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인생을 달군 현장과 현실로서의 소요학파 스타일 여행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천천히 걸으면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지성을 드높일 수 있다. 밀라노에 들른다면, 라파엘의 ‘아테네 학파’ 속 아리스토텔레스의 팔과 손가락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론인 현실, 현장, 나아가 여행을 통한 세계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사회, 국가를 업그레이드할 동력이 아리스토텔레스 몸짓 하나에 투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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