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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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주 전만 해도 암호화폐거래소 FTX의 최고경영자였던 샘 뱅크먼 프리드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당시 글로벌 거래소 기준 3위였던 그의 암호화폐거래소의 가치는 320억달러(약 42조1760억원)로 평가받았고, 그의 재산은 160억달러(약 21조원)로 추정됐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을 열광시키던 금융천재였고 언론 규제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정치자금을 대는 비밀스러운 경영자였다.

이랬던 그의 주변에는 지금 약 100만명의 분노한 투자자, FTX와 직·간접적으로 엮이며 불안정해진 수십 개의 블록체인·암호화폐 기업, 그리고 범죄를 확신하는 사정기관의 관심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고속팽창하다 터져버린 FTX 스캔들은 암호화폐 업계 전반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이 산업이 올해처럼 이렇게 범죄의 냄새를 풀풀 풍기며 쓸모없어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 좋은 엘리트 CEO의 잘못된 선택

뱅크먼 프리드는 엘리트 집안의 자제다. 그의 아버지 조셉 뱅크먼, 어머니 바버라 프리드 모두 스탠퍼드대 로스쿨 교수다. 뱅크먼 프리드는 MIT 물리학과에 입학했지만 전공을 살리기보다 월스트리트의 파생상품 투자회사에 입사해 트레이더로 일했고 2017년 퇴사한 뒤 회사를 하나 만든다. 이번 사태에서 문제가 됐던 ‘알라메다리서치’로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회사였다.

그가 암호화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8년이었다. 홍콩에서 글로벌 1위 거래소인 바이낸스의 창업자 자오창펑을 만난 게 전환점이 됐다. 거래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지켜본 뱅크먼 프리드는 자신도 거래소를 운영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FTX다.

FTX는 월스트리트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이 묻어나는 거래소다. 바이낸스가 개인 거래의 성지라면 FTX는 기관투자자들이 좋아할 만한 파생상품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암호화폐에 레버리지 투자를 하려는 기관 트레이더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FTX는 순식간에 월스트리트의 주목을 받았다. 헤지펀드의 자금들이 FTX를 향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도 1억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세계 최대 사모펀드인 블랙록이 FTX를 좋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모은 시리즈C 투자금으로만 4억달러를 조달했을 정도다.

그의 혈연 네트워크도 도움이 됐다. 그의 어머니는 민주당이 실리콘밸리에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조직한 ‘마인드 더 갭(Mind the Gap)’이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었고 아버지는 민주당 의원들의 여러 법안 초안을 작성했다. 암호화폐 업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게리 겐슬러 위원장은 어머니의 지도교수였다. 개발자 출신의 너드(특정 분야의 오타쿠)가 아니라, 워싱턴과 인연이 확실한 그의 출신 성분은 월스트리트의 신뢰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FTT라는 ‘거래소 코인’을 만든다. 거래소들 중 일부는 자체적으로 코인을 갖고 있다. 거래소의 수익을 올리기에 이만한 게 없어서다. 기존 금융권은 권한을 다 분산시켜 서로 견제하게 돼 있지만 암호화폐거래소는 고객 유치부터 상장, 상장폐지, 파생상품, 예치, 발행 등을 혼자서 다 할 수 있다. 규제 회색지대에 있기에 생기는 일이다.

거래소 코인의 가치가 올라가면 거래소 수익도 커진다. 그럼 FTT의 가치는 어떻게 올라갔을까. 그가 만든 투자회사 알라메다리서치를 활용했다. FTX는 알라메다리서치에 FTT로 대출을 해줬다. 알라메다리서치는 FTX에 이 FTT를 다시 담보로 맡겨 달러를 대출했다. 그리고 이 달러로 다시 FTT를 샀다. FTT는 이런 매수세에 힘입어 가격이 올랐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FTT는 가치가 올랐고 대신 알라메다리서치는 천문학적인 대출을 끼게 됐다.

올해 3월 말 1FTT는 50달러를 돌파했을 정도로 호황기를 누렸다. FTX의 기세도 하늘을 찌르면서 예치되는 투자금이 급격하게 늘었다. 그런데 거시경제 환경이 변하면서 변수가 생겼다. 미국 정부가 ‘킹달러’를 고수하며 금리를 인상하면서부터다. 금리가 오르면 위험자산의 가치가 먼저 하락하는데 암호화폐가 여기에 해당한다. 알라메다리서치가 가지고 있는 암호화폐 자산 가치가 급락했고 유동성 문제가 생겼다.

뱅크먼 프리드는 알라메다리서치에 100억달러 대출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 모든 위기의 결정타가 된 결정이었다. 주식시장으로 따지면 한국거래소가 투자자들의 돈을 마음대로 관계사에 빌려준 셈이니 기존 금융시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위기를 해결한 뒤 다시 메우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알라메다리서치의 보유 자산은 계속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이 문제를 재무제표를 통해 공개한 곳이 블록체인 전문매체 코인데스크였다.

위메이드 장현국 대표와 올해 상반기 출시한 모바일게임 ‘미르M : 뱅가드 앤 배가본드’. photo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위메이드 장현국 대표와 올해 상반기 출시한 모바일게임 ‘미르M : 뱅가드 앤 배가본드’. photo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신뢰의 문제 봉착한 위메이드와 위믹스

이 사건은 암호화폐 역사상 가장 파괴력이 큰 사건이다. 루나·테라 사태는 코인 하나를 둘러싸고 일어난 폰지 사기였다면 FTX 사태는 글로벌 거래소의 통제 없는 일탈이라는 점에서 암호화폐 산업구조, 그 자체를 뒤흔들었다. 뱅크먼 프리드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건 그의 성공과 실패가 얼마나 허약한 틀 속에서 이뤄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이번 사태가 FTX의 경쟁사와 다른 기업에도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자산 관련 법률 초안을 민주당과 공화당이 만들려던 시도를 좌초시킬 수 있다. 뱅크먼 프리드와 그의 로비스트들이 이런 시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특히 민주당과 밀착해 디지털 자산 시장의 중심에 서려고 하던 그의 유아독존 스타일에 대한 반감까지 더해지면서 암호화폐 업계에서조차 그와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뱅크런이 발생하면서 FTX는 이미 파산했다. 부채 규모는 가상화폐 업계 역대 최대인 66조원에 달한다. 이 모든 게 불과 2주일 새 벌어진 일이다. 문제는 이후에 있을 뒤처리다. 미국인이 벌인 일이지만 피해와 후폭풍은 한국에서도 분다.

정확히 집계된 바는 없지만 국내 피해자가 적지 않다. 웹사이트 분석업체인 얼스웹(EARTHWEB)이 지난 8월 기준 FTX에 방문한 이용자들의 국적을 분류한 결과 미국 이용자를 제외하면 한국 이용자가 6.21%로 가장 많았다. 암호화폐 커뮤니티를 둘러보면 억대를 FTX에서 출금하지 못한다는 인증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번 사태는 암호화폐 산업에 매번 되묻는 신뢰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사기나 투기 외에 어딘가에 유용하게 쓰일 구석이 있느냐를 묻는 질문에 ‘아니오’라는 대답을 내놓은 사건이다. 그리고 지금 중견 게임사 위메이드의 암호화폐인 위믹스를 둘러싼 사건도 이번 FTX 사태와 그렇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위믹스는 이른바 ‘김치 코인(국내 코인)’의 선두주자다. 위메이드는 위믹스를 활용해 비즈니스모델을 만들어냈다. 게임 내 아이템을 위믹스와 교환할 수 있게 해 게임하며 돈을 버는, ‘플레이투언(Play to Earn·P2E)’ 방식을 비즈니스 모델에 적용하며 유명세를 떨쳤다. 회사의 3만원대 주가는 20만원을 뚫었고 포브스나 블룸버그 등 해외 유력 매체에서도 위메이드의 약진을 다룰 정도였다.

상장가 150원짜리 위믹스는 한때 3만원을 향해 치솟았다. 위메이드라는 상장 기업의 코인이니만큼 국내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사들인 코인이다. 2019년 말 연결기준 약 93억원의 영업손실과 287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던 위메이드를 살린 게 이 위믹스였다. 위믹스의 시가총액은 한때 3조원을 넘었다.

그런데 지난 10월 27일 닥사(DAXA, 국내 5개 거래소로 구성된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는 위믹스를 ‘공시된 유통량과 실제 유통량 간 차이 발생’을 이유로 유의종목으로 지정한다. 위믹스 발행사인 위메이드가 거래소에 제출한 위믹스 유통량 계획과 실제 유통량의 차이가 약 30% 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11월 24일 닥사는 위믹스를 상장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12월 8일 위믹스는 국내에서 모든 거래가 종료된다.

 

금융당국, 현실경제 미치는 영향에 주목

위메이드 내부에서는 ‘설마’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얽혀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위믹스가 상장폐지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다. 회사 관계자는 “몇 번의 유예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상장폐지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직원들도 위믹스를 보유한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에 나락으로 보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유의종목으로 지정된 이후 위믹스 재단은 담보대출을 상환하고 재단 보유물량을 커스터디(수탁) 업체에 보관하겠다고 하는 등 신뢰를 얻기 위해 시도했지만 결과를 되돌리지 못했다.

FTX사태는 어떻게든 이번 건에 영향을 크게 준 것으로 보인다. 위믹스라는, 큰 덩치의 암호화폐를 상장폐지한다는 건 국내 암호화폐거래소에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하지만 규제 당국이 FTX 파산 이후 보다 적극적인 메시지를 낸 것은 더 큰 부담이었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FTX가 파산한 뒤 정치권과 정부 모두 규제책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럴 때 거래소 연합체가 자율적으로 걸러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더 큰 해머를 맞게 된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가장 큰 책임을 거래소가 스스로 나눠 지면서 시장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결정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특히 실물경제와 연동돼 움직이는 부분이 금융당국을 자극한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위믹스 상장폐지가 결정된 다음 날부터 위메이드는 하한가를 기록하는 등 관련 주가가 급락했다. 임희석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이번 (위믹스) 상장폐지에 따른 영향으로 위믹스 플랫폼에 대한 불확실성 증대는 불가피하다. 온보딩을 고려하는 게임사들의 부담 증가로 플랫폼 확장세는 둔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규제 이슈가 부각되는 건 투자도 어렵게 만든다. 암호화폐 신생 기업에 자금을 대던 벤처캐피털 일부가 회수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테헤란로에 들린다. 이렇듯 FTX 후폭풍을 계기로 진짜배기 ‘크립토 윈터(암호화폐의 겨울)’가 올 것이라는 위기감이 업계에는 가득하다. 앞으로 이 시장은 ‘규제와의 싸움’에 접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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