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경찰청 마포청사에 설치된 이태원 사고 특별수사본부 현판. photo 뉴시스
서울 마포구 경찰청 마포청사에 설치된 이태원 사고 특별수사본부 현판. photo 뉴시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저희 식구들이랑 지내면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이나 인터뷰를 안 하고 있었는데요…”라는 말까지 하고 그는 고개를 떨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한 달간의 마음고생이 그의 눈물에 묻어났다.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참석자 앞에서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재난(이태원 참사) 관련해서 저희 병원이 이슈화되었고, 이런 이야기가 기사로 나오면서 진료했던 의료진이 힘들어해서 이렇게 발언할 기회가 생기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발언의 주인공은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참사가 일어나던 날, 가장 많은 희생자들이 실려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의 조영신 응급의학과장이었다. 참사 현장에서 최단거리에 있던 대학병원인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에는 이날 참사 피해자들을 실어 나르는 구급차의 행렬이 멈추지 않았다. 새벽 사이 이 병원에서 총 79명에게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응급실을 담당하는 책임자인 조 과장은 이날도 당번 근무를 서며 누구보다 현장에서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의 대응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지면서 조 과장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지만 그는 한 달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처음 공개 발언 석상에 섰다.

이 자리는 지난 11월 29일 대한병원협회(병협)가 서울 강남구 그랜드인터컨티넨탈 서울파르나스에서 개최한 ‘제13회 대한민국 헬스케어대회(The 13th Korea Healthcare Congress 2022, KHC 2022)’ 중 ‘재난의료’ 세션. 병원협회는 원래 ‘필수의료’를 주제로 진행하려던 이 세션의 주제를 2주 전 ‘재난의료’로 급히 바꾸고 10·29 이태원참사를 의료계 스스로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공교롭게도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정확히 한 달 되는 날이었다.

 

언제까지 “의료진 열정만 강요할 건가”

이런 대형참사가 터지면 의료인들은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비난받는 입장에 서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에 대한 의료계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운 전례가 많았다. 하지만 이날 병원협회가 마련한 자리에는 국내 응급의학과 권위자들이 패널로 참석해 의료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한림대성심병원)은 “언제까지 의료진에게 열정과 의무감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할 순 없다. 재난 대응은 국가 시스템의 문제”라면서 “이제라도 전문가 평가단을 만들어 그날 있었던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전문가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잘잘못이 아니라 개선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이태원참사와 관련해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누가 책임을 져야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언론도 다르지 않다. 책임자 처벌 역시 중요한 부분이지만 의료계의 분위기는 약간 결이 다르다. 의료계가 중심이 된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지만, 책임추궁이라는 정부 기조에 의료계까지 엮여 들어가면서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침체됐다. 의료계는 이런 재난이 당장이라도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에 사후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단 책임자를 찾아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다만 의료계에서는 처벌에 초점을 맞춘 현 정부의 사후 대응에 문제가 있다는 데에 일단 목소리를 같이하고 있다.

일례로 참사현장에 출동했던 15개 대학병원의 재난의료지원팀(DMAT) 모두 경찰 특별수사본부 조사 대상에 올랐다는 점이 도마에 올랐다. 의료계  전문매체인 ‘청년의사’에 따르면 현재 특수본은 순천향대서울병원을 비롯한 15개 DMAT팀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요구서를 보낸 상황이다. 당일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서울대병원은 참고인 조사를 거부했지만, 한양대병원과 강동경희대병원 소속 의료진은 4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청년의사’에 따르면 중앙응급의료센터 중앙응급의료상황실도 7시간 넘는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에 대한 국정조사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참고인 조사를 받을 순 있지만 저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재난사고가 일어나고 나서 사후평가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그날 있었던 모든 일들을 테이블 위에다 적나라하게 올려놓고 하나하나 뒤집어봐서 어떻게 개선해 나갈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이건 전문가의 영역이지 경찰조사를 받을 일은 아니다”라며 “지금 상황에서 그날 출동했던 의료팀들을 데려다놓고 ‘이 시간에 뭐 했냐, 누가 뭐라고 말했냐’라고 조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사후 개선책 마련과 관련해서도 “현재 한국 재난 대응은 민간(의료기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민간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민간에 재난 대응을 위탁하고 민간이 재난 상황에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다면 민간 전문가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전문가들이 재난의료 대응법을 기획할 여지가 너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순천향대서울병원의 조영신 과장 역시 “그날 당직했던 의료진이 굉장히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했는데, 그다음 개선책을 위한 준비 작업이 있다기보다는 누구를 조사했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이게 잘못했다 잘했다 같은 결과론적인 걸로 평가를 받거나 하지 않고 그다음 단계를 대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재난의료 시스템 개선이 먼저”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왕순주 권역응급의료센터장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때는 죄가 아니다”라며 “우리가 참사를 다시는 안 생기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앞으로 이런 상황이 됐을 때 지금보다는 나은 시스템을 갖추고 대비책을 강구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대한재난의학회 김인병 회장(명지병원)은 “코로나19 상황에서 감염병 대응에 사회적 관심이 쏠린 사이 재난의료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면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재난의료 시스템 교육과 훈련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번 10·29참사를 의학적 입장에서 봤을 때 전 국민 수준의 인식과 대비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매뉴얼을 얼마나 지켰느냐, 누가 잘했느냐는 등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앞으로 우리 사회 인식 전환과 개선을 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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