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판을 깔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례대표 공천을 위한 장(場)이 열리자 문전성시를 이룬 곳은 국민의힘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다. 접수비로 500만원을 낸 지원자 530명이 공천을 신청했다. 단순 계산으로도 접수비 총액이 25억원을 훌쩍 넘는다. 비례대표 의원 수는 46명이지만 최대 20명 남짓이 배지를 달 수 있다고 가정해볼 때 약 25 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산다.
530명의 후보가 난립했지만 공천을 결정하고 순번을 결정하는 방법은 꽤 간단하다. 서류심사와 면접으로 가려진다. 비례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례대표 의원들은 역설적으로 정당 내 소수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 국민의힘이라면 공관위의 심사로 결정된다. 표를 주는 유권자는 지지 정당만을 선택할 뿐 후보자는 선택할 수 없는 폐쇄형 명부제라서 생기는 역설이다. 지역구 공천에는 힘 좀 쓰는 당원들도 비례제는 손을 못 댄다. 순번 역시 정당의 자율성이라는, 애매한 동력(動力)에 따라 결정된다.
국민의미래 비례 공모자에는 인요한 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 김장겸 전 MBC 사장 등이 포함됐다. 지난해 국민의힘 혁신위원회를 이끌었던 인 전 위원장이 이야기했던 ‘총선 불출마’는 허언(虛言)이 됐다. 노조 활동 등을 방해한 혐의로 지난해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았던 김 전 사장은 지난 2월 설 특사를 받은 뒤 비례대표 의원직에 도전 중이다.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였다가 낙마한 김행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도 신청했다.
선거법 47조2항의 생성과 소멸
당에서는 공정한 심사를 강조하지만, 그나마 경선 등을 거치는 지역구 공천보다는 약식에 가까운 게 사실이다. 비례대표 공천에 후보들이 몰리는 건, 경쟁 없는 특혜에 가까운 제도라는 인식 때문이다. 정당의 당헌·당규나 선거법 그 어디에도 비례의원의 재선을 금지하는 규정은 없지만 비례의원이 또다시 비례공천을 노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여의도에 존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보수 정당에서 비례대표 출마자 공천을 깊이 고민한 적도 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약 10년 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에는 초·재선 의원들로 구성된 ‘아침소리’라는 모임이 있었다. 당시 비례대표를 두고 ‘공천 장사’라는 비판이 있던 때였는데, 아침소리는 비례대표 공천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총선 1년 전에 비례대표 출마 희망자들을 2~3배수로 선발해 이후 이들의 정책 활동 결과물을 바탕으로 공천심사를 하자는 안이었다. 여기에 더해 선출 과정에서 논의되는 모든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안도 포함시켰다. 물론 이들의 개혁안은 수용되지 못했다.
비례 공천 후보자들끼리 경쟁을 시키고 당원들의 의사를 묻는 과정은 왜 쉽게 등장하지 못할까. 만들어진 지 1년도 채 안 돼 사라진 ‘공직선거법 47조2항’의 생성과 소멸 과정에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2020년 1월, 21대 총선을 앞두고 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됐다. 그런데 이때 동시에 도입된 게 비례대표 후보의 민주적 선출 절차를 규정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명부를 아예 무효로 하는 강제 조항이다. 이게 공직선거법 47조2항이다.
공직선거법 47조2항은 “정당이 제1항에 따라 후보자를 추천하는 때에는 당헌 또는 당규로 정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야 하며,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의 후보자를 추천하는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정당은 민주적 심사절차를 거쳐 대의원·당원 등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의 민주적 투표절차에 따라 추천할 후보자를 결정한다”고 구체화했다. 즉 비례대표 후보를 뽑을 때도 당원의 뜻이 충분히 반영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걸 강제하는 조항이다. 이 조항을 근거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비례대표 전략 공천을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려 주요 정당 지도부를 당혹게 했다.
21대 총선이 끝난 직후 위성정당의 등장으로 변질돼 버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폐지 논의가 국회에서 이어졌다. 당시 국민의힘의 장제원·권성동 의원은 각각 공직선거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대표발의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기존의 병립형으로 되돌리는 내용과 함께 비례대표 공천에 대한 법적 규제를 철폐하는 내용을 개정안에 포함하였다. 즉 47조2항을 폐지하고 대신 “정당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때에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야 한다”라고만 규정하는 것으로 바꾸려고 했다.
반윤의 수단 된 민주당의 비례제 접근법
그런데 이 개정안의 핵심인 준연동형 폐지에 대해서 여야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대신 공직선거법 47조2항을 과거처럼 되돌리는 데만 여야가 찬성해 2020년 12월 29일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당시 어느 정당도 47조2항의 개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비례대표 공천의 전략적 셈법을 정당들이 놓치기 싫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투표로 비례대표 후보를 공천할 경우 위성정당에서 뜻하지 않은 인물들이 뽑힐 수 있는 위험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비례대표제 취지를 외면한 것은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직능·세대·지역에서 다양하고 전문적인 인물을 발굴하겠다는 의지보다 연대와 연합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미 민주당은 지난 3월 12일 야권 비례대표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20명의 후보를 추천했다. 원래 민주당의 당헌·당규에 따르면 비례 후보는 비례대표추천위에서 추천하고 전 당원 및 중앙위원 투표로 확정토록 규정했지만 이번에는 이를 모두 무시하고 전략공천관리위가 심사했다. 이렇게 된 데는 당의 전략적 판단을 이유로 든다.
민주당이 중심이 된 야권 비례 위성정당이라는 존재도 역설적이다. 야권 비례대표 논의 과정을 잘 아는 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비례제와 위성정당, 반윤(反尹)전선은 한꺼번에 묶일 수 없는 가치”라고 지적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양당제를 넘어 다당제로 가자는 건데 여기에 힘을 합쳐 ‘반윤 전선’을 만들자는 건 연동형의 가치를 부정하는 소리다. 다당제가 아닌 양당제의 품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니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반윤 전선으로 대동단결하려면 민주당이 비례대표를 아예 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야 연동형과 다당제의 의미를 살릴 수 있다. 그런데 후보는 낸다. 그런 이상한 전선에 우리는 동참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민주연합의 비례후보 선정은 이미 궁지에 몰렸다. 시민사회 몫 비례대표 후보로 선정됐던 전지예 금융정의연대 운영위원이 반미(反美) 논란으로 사퇴했다. ‘반윤 연대’만 추진하다 생긴 사달이다. 국민의힘도, 민주당도 점점 비례제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