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에 대한 응징투표로 치닫는 총선판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정책을 하나 던졌다. 민주당 관계자는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워서 놀랐다”고 말했다. ‘주4.5일제’ 공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4.5일제는 이 대표가 ‘노심(勞心)’ 공략을 위해 내놓은 공약이고 지난 대선 때도 제안해 관심을 촉발시켰던 사안이다.
특히 온라인에서는 젊은 층의 호응이 컸다. 민주당에 비판적인 커뮤니티에서도 “69시간보다 이게 현실적이다”라는 긍정적 반응이 나온다. 당장 주4일제 도입은 어렵더라도 주4.5일제를 시작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는 노력을 하겠다는 게 민주당의 입장이다. 정치적 공방만으로도 굴러가던 선거판에서 드물게 정책의 장이 열렸다.
정책 효과 얻는 공약이지만 고난도 방정식
주4.5일제는 총선판에서 변수가 될까, 아니면 네거티브 구도에 잡아먹힌 채 함락될까. 한때 최대 주69시간제를 꺼내들었던 윤석열 대통령은 현행 최대 주52시간제 유지를 바탕으로 한 ‘일부 업종·직종 대상 연장근로 유연화’ 카드를 꺼내든 바 있다. 민주당은 이 지점에서 대척점에 섰다. 여기에는 주4.5일제가 총선을 지나 다음 대선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정책인 만큼 이슈를 선점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진보정당이 아니라 수권정당인 민주당에서 지난 대선부터 계속 밀어붙이고 있는 주제란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다음 대선에도 반드시 나올 의제다. 69시간 논쟁의 반대에 서서 중도층 주도권을 쥔다는 측면에서도 효과적인 정책이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민주당이 호재가 될 수 있을 만한 이슈를 내밀었다고 본다. “총선까지 3주가량 남았다. 길다면 긴 시간이다. 민생과 관련한 의제로 전환하지 않고 지금처럼 상대 진영 공격으로만 밀어붙이면 역효과가 난다. 의대 증원 문제는 선전 효과가 컸다면 주4.5일제 같은 민생 공약은 정책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주4.5일제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가는 중간정류장 격이다. 최종 종착역은 주4일제이지만 당장 주4일제를 공약으로 삼기에는 저항의 강도가 세다. 반면 주4.5일제는 지금 시행하는 기업도 있으니 상대적으로 대중 소구력이 강하다.
주4.5일제로 가야 하는 근거는 우리의 노동시간에서부터 출발한다. 여전히 주요국과 비교해 우리 노동시간은 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임금근로자들의 근로시간은 회원국 평균 연 1719시간이다. 2022년 기준 우리 근로시간은 1904시간이다. 월 평균으로 환산하면 약 15시간이 넘는 차이다. 이 통계에서 우리보다 연간 근로시간이 많은 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콜롬비아(2381시간), 멕시코(2335시간), 코스타리카(2242시간), 칠레(2026시간), 이스라엘(1905시간) 등 5개국뿐이다. 옆나라 일본만 해도 1626시간이다. 그래서 노동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주 4.5일제는 노동의 구조적 틀을 바꾸는 문제이고 상당히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이다. 그간 일하는 시간을 줄이자는 논의는 진통을 겪지 않은 적이 없다. 1953년 주 48시간이던 노동시간을 1989년 주 44시간으로 4시간 줄이는 데 36년이 걸렸다. 여기에서 주40시간으로 4시간 줄이는 데 25년 정도 걸렸다.
실제로 노동시간을 둘러싼 교섭과 조정의 과정은 충돌이 잦고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주제다. 주5일제를 도입하기 위해 약 5년간 30차례 이상 차린 노사 간 교섭테이블은 번번이 실패했고 노사정 합의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2002년 10월 정부의 입법안이 단독으로 국회에 상정됐고 2003년에 국회를 통과했다. 2004년 7월 이전 주44시간이던 법정근로시간은 이때부터 주40시간으로 단축됐다. 다만 노사가 합의하면 12시간을 추가로 일할 수 있도록 해서 주 52시간 상한제가 완성됐다.
주4.5일제는 매우 선명하고 알기 쉬운 정책이지만, 이걸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따져봐야 할 지점들은 만만한 것들이 아니다. 특히 핵심이 되는 건 줄어든 노동시간과 임금의 관계다. 핵심은 ‘임금이 그대로 유지되는 주 4.5일제’의 수용 여부다. 민주당이 주4.5일제를 관철하는 방법은 법정 근로시간의 단축을 통해서다. 현재의 주40시간을 주36시간으로 줄이는 방법이 타당하다고 본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의 인사담당 임원은 현 직장과 이전 직장에서 모두 주 4.5일제를 도입해 실시해 본 경험을 토대로 “결국 생산성과 비용의 문제다. 그다음에는 형평성 이슈가 생기지 않게 회사의 전체 직무를 다 포괄할 수 있는 운영방식을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제안했던 주4.5일제가 통과될 때의 과정을 이렇게 기억했다. “충분한 휴식을 통해 생산성이 더 올라갈 수 있다는 걸 설득하는 게 쉽지 않다. 다만 회사 브랜딩에 좋고 직원들의 이탈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영진은 비용 이슈에 대한 해결을 찾길 원했다. 초과근로가 크게 늘어나지 않도록 컨트롤하겠으니 파일럿을 해보자고 하니 ‘한번 해봐’ 정도로 마무리됐다.”
주4.5일제의 핵심은 직원 입장에서는 임금,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이다. 주당 4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생산성이 그대로라면 회사는 남은 4시간의 초과근무만큼의 비용을 더 써야 한다는 데 부담을 갖는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었으니 시간당 임금이 오르고 1.5배인 초과근무에 대한 수당도 그만큼 상승한다. 이런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생기는 또 하나의 이슈는 포괄임금제다. 앞선 임원은 “주4.5일제를 표준제도로 시행하려고 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초과수당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는 포괄임금제를 좀 더 유연하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반대로 노동자 입장에서는 포괄임금제를 없애야 실질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할 거다”라고 말했다.
노동시장 격차 문제에 대한 해법 필요해
야근, 잔업, 초과노동으로 임금을 보전받는 노동자들은 주4.5일제를 그닥 환영하지 않을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생길 소득 감소 때문이다. 노무법인 유앤의 안진수 노무사는 “그나마 대기업 현장은 괜찮다. 이쪽은 월급제가 많고 노조 협상력이 있어서 주44시간에서 40시간이 될 때도 시급이 올라 보전이 됐다. 문제는 하청업체와 같은 노동시장 아랫단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도드라지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모순과 연결된다. 원청업체가 들여다보는 가운데 하청업체가 40시간에서 줄어든 노동시간만큼을 보전해주는 건 어려운 일이다. 중소규모 사업장, 비정규직, 시간제 근로자 등도 마찬가지다. 노동시간 감소로 소득이 줄어들 수 있어서 직격타를 맞게 된다. 따뜻한 아랫목과 그렇지 않은 냉골이 확연히 구분되는 현 노동시장의 해결법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다양한 층위의 경제 주체들 사이에 얽혀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고 지원하며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가 주4.5일제가 해야 할 숙제다. 조정과 타협이라는 점에서 결국 정치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건 당연한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