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선 진보와 보수, 남녀노소 등 기존의 세대, 성별 구분이 아닌 새로운 영역의 유권자가 등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계적인 기후위기 속에서 생겨난 이른바 ‘기후유권자’다. 이들은 기후위기라는 절대적 의제를 가지고 정치권을 바라보고 총선 출마자를 평가하기 때문에 기존의 진영 논리도, 지형적 특성도 그리 중요치 않다 .
최근에 ‘기후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정치권에서도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을 주요 공약에 배치하고, 기후전문가들을 비례대표로 영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기후유권자의 표심이 선거 당락을 좌우할 정도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극소수의 표 차로 승패가 갈리는 주요 격전지에서는 무시하지 못 할 유권자 카테고리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와 함께 사회적 당면 과제로 커져버린 기후위기에 대한 현실적 대응방안 마련을 정치적 의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62% “기후 대응에 따라 투표 고려”
‘기후위기’라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기후유권자’라는 신조어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올해 초부터로 볼 수 있다. 지난 1월 22일 로컬에너지랩, 녹색전환연구소, 더가능연구소가 공동으로 설립한 ‘기후정치바람’이 ‘기후위기 인식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기후위기 대응을 기준으로 투표하려는 ‘기후유권자’는 전체의 33.5%로 나타났다. 국민 3명 중 1명꼴인 셈이다.
지역별로는 전남(38.1%)과 서울(36.3%), 대전(34.3%), 광주(34.1%) 순으로 비중이 높았다. 특히 서울의 경우 강남·송파·강동의 ‘기후유권자’ 비율은 42%, 광진·성동·용산·중구는 38.2%, 양천·영등포·동작은 37.6%, 노원·도봉은 36.7%로 전체 평균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령별로 보면 30대 이상에선 모두 남성에서 기후유권자의 비중이 여성보다 높았지만 18~29세에선 여성이 남성보다 2.0%포인트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유심히 볼 것은 응답자의 62.5%가 “기후대응 공약이 마음에 드는 후보에 대해서는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투표를 고민하겠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기후 공약에 상관없이 평소 지지하던 정당 후보에 투표하겠다”는 응답은 절반보다 적은 24.6%에 그쳤다.
이 조사는 기후정치바람이 지난해 12월 1일부터 27일까지 17개 시·도 1만7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성별과 연령, 광역단체별 가중치를 고려해 실시한 대규모 설문조사여서 인구사회학적 분석이 가능한 지표로 평가받고 있다.
‘기후’가 격전지 당락에 영향 미칠까?
하지만 기후유권자들이 선거에서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을 표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기관들이 기후유권자의 분포를 조사해 발표한 사례도 이번이 처음인데다가, 이들이 실제 얼마나 기후공약에 따라 투표권을 행사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이 끝나고 나서 본격적 분석이 이뤄져야 ‘기후’가 총선 투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좀 더 분명해질 전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몇천 표 차로 승패가 결정되는 격전지에서는 기후유권자의 표심이 일종의 캐스팅보트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기후정치바람의 조사에 참여한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교 교수는 주간조선과 통화에서 “정치학에서 보면 최소한 10가지 이상의 여러 가지 변수들이 투표에 영향을 미친다”며 “최근 미국의 한 조사 연구에 따르면 바이든과 트럼프가 맞붙은 지난 미국 대선에 대해 우리와 비슷한 조사를 한 결과, 60% 조금 넘는 유권자들이 기후를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대선 이후 2년 정도 지나 추적 분석을 해보니 기후 변수가 실제 미국 투표에 영향을 준 정도가 3% 정도로 파악됐다. 그런데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과 트럼프의 격차가 3% 정도였다. 그러니까 기후가 결과적으로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경우도 지난 21대 총선에서 3% 미만으로 승패가 갈린 격전지는 전국적으로 19곳이나 된다. 여야 모두 격전지로 인식하고 있는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만 8곳에 이른다. 그다음 대전을 포함한 충청 지역에서도 6곳이 3% 미만으로 승부가 갈리는 혈투가 벌어졌다. 정치권에서 3%대 표심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후 전문가들 속속 여의도 입성 준비
기후가 선거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면서 정치권도 발빠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실 환경은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던 단골 공약 분야였는데, 이 환경 공약의 범위가 기후로 더 확장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와 관련 국민의힘은 지난 2월 기후 및 에너지 공약을 발표했고, 더불어민주당 역시 지난 3월 20일 ‘기후위기 극복과 RE100 국가실현을 위한 민주당 10대 공약’을 내놨다.
거대 양당에서 ‘기후’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비례대표 라인업에서도 알 수 있다. 국민의힘 비례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는 김소희 기후변화센터장에게 비례대표 7번째 순번을 부여했고, 에너지경제연구원 소속 정혜림 전 연구원을 21번째 비례 후보로 영입했다. 민주당은 지난해 12월 기후환경 전문가인 박지혜 변호사를 1호 영입인재로 선발했다. 박 변호사는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 의정부갑에 출마했다.
한편 기후정치바람에 따르면 이번 총선을 앞두고 ‘기후정치 유권자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기초지자체는 서울 동작, 은평, 성북구, 경기 파주, 광명, 가평·포천, 안양·군포·의왕, 충남 천안, 서산·태안, 당진, 강원 원주, 춘천, 삼척, 경북 울진, 경남 진주 등 약 20곳 정도다. 뿐만 아니라 지난 3월 14일에는 ‘청년층 기후유권자’들의 선언 발표가 있었고 이어 3월 26일에는 60대 이상 연령층이 중심이 된 기후유권자들의 입장 발표도 이어질 예정이다. 환경·기후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런 이슈가 부상하는 기초지자체들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관후 교수는 “인구절벽, 저출산, 고령화 같은 이슈 다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가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조사 결과도 이번에 얻었다. 기후·환경에 대해 사회적 의제화는 많이 돼 있는데 이제 정치적 의제화로 넘어가는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기후가 이제는 사회적 캠페인이나 인식을 넘어서 실제 투표로 이어지는 의미 있는 변수가 되는 시점에 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면서 “올해부터 앞으로 최소 4년 이상 해마다 기후유권자 관련 조사를 실시해 2026년 지방선거와 2027년 대선까지 기후 이슈를 계속 부각시켜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