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13일 인도에서는 3곳의 반도체 공장이 한날한시에 착공식을 갖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됐다. 북서부 구자라트주 돌레라의 12인치 웨이퍼 공장과 사난드 반도체 후공정(OSAT·패키징 및 테스트) 공장, 이곳에서 동쪽으로 2000여㎞ 떨어진 북동부 아삼주의 모리가온 OSAT 공장이 동시에 착공식을 가진 것이다. 착공식은 세 공장을 화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함께 진행됐고, 수도 뉴델리에 있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도 화상으로 연설했다.
세 공장 중에서도 인도에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은 돌레라의 12인치 웨이퍼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28나노급 구형 반도체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파운드리 공장으로, 인도 최초의 상업용 반도체 제조공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장 3곳 동시 착공식
이 공장은 인도 타타그룹 산하 타타일렉트로닉스가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PSMC의 기술 지원을 받아 건설하는데, 오는 2026년부터 월 5만장가량의 12인치 웨이퍼를 생산하게 된다. 이 웨이퍼를 바탕으로 전기차와 전자제품, 통신장비, 방위산업 등에 필요로 하는 28나노급 이상의 구형 반도체를 생산하게 된다.
이 공장의 투자금액은 총 110억달러에 이른다. 인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반도체 인도 프로그램(SIP· Semicon India Program)’에 따라 전체 투자 금액의 70%를 지원하고, 나머지는 타타그룹이 조달한다. 대만 PSMC는 지분 참여는 하지 않는 대신, 기술 제공에 따른 기술료를 받는다. 지분 100%를 국내 기업이 갖는 인도 독자의 반도체 공장이 탄생한 것이다. PSMC 프랭크 황 회장은 대만 언론 인터뷰에서 “차이잉원 총통이 직접 불러서 인도 반도체 공장에 기술 지원을 해주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구자라트주 사난드에 들어서는 반도체 후공정 공장은 인도 기업인 CG파워와 일본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 태국 스타스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이 합작으로 9억2000만달러를 투자해 전력용 반도체를 생산할 것으로 전해졌다. 타타그룹 산하 TSAT가 32억6000만달러를 들여 건설하는 아삼주 후공정 공장은 자동차와 가전산업에 필요한 반도체 제품을 생산한다. 두 곳의 후공정 공장은 돌레라 공장에서 생산된 반도체 웨이퍼를 자르고 전기 배선을 연결해 각종 기기에 탑재할 수 있도록 최종조립(패키징)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인도 안에 웨이퍼 제조부터 최종 제품 패키징까지 반도체 일관 생산라인이 구축되는 셈이다. 세 공장의 총 투자 규모는 152억달러에 달한다.

2026년 28나노 반도체 생산
인도는 1960년대부터 반도체 산업 진출을 시도해왔지만, 그동안은 중앙정부의 의지 부족, 기술력 부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번번이 좌절했다.
이런 인도가 다시 반도체 산업 진출을 꿈꾸게 된 계기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고 할 수 있다. 팬데믹 이후 대만·중국 등 기존 반도체 생산국이 생산에 차질을 빚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차량용 반도체 등 구형 반도체 제품 공급 대란이 일어났다. 특히 도시 전체를 봉쇄하는 중국의 과도한 제로코로나 방역정책이 글로벌 공급망에 큰 충격을 줬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 생산기지를 둔 서방 제조업체들은 중국 외 다른 지역에 생산기지를 추가로 건설하는 ‘차이나+N’ 전략을 본격화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가 새로운 반도체 생산기지 후보로 떠오른 것이다.
미·중 기술 경쟁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이 대규모 국가 자본을 투입해 단기간에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 하자, 미국이 인도를 대항마로 내세운 것이다. 강도 높은 대중 반도체 제재를 통해 중국 반도체 산업이 서방의 첨단 기술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한편으로, 인도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미국을 국빈 방문한 모디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신기술과 반도체, 인공지능(AI) 분야에 걸쳐 양국 간에 강력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양국은 반도체 공급망 안전을 위한 노력을 배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디 총리는 이런 세계적 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모디 총리는 자신이 내건 제조업 육성 정책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를 본격화하기 위해 2020년 3월 ‘전자제품·반도체 제조 촉진 방안(SPECS)’을 발표했다. 재정을 투입해 반도체산업과 전자제품 제조업을 적극적으로 키우는 방안이었다. 이어 2021년 12월에는 반도체 분야에 투자하는 국내외 기업에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내용의 ‘반도체 인도 프로그램(SIP)’도 내놨다. SIP에 따른 총 지원금 한도는 100억달러로 잡았다.
SIP를 도입한 지 1년 반 만인 지난해 6월 첫 성과가 나왔다. 미국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이 모디 총리의 고향인 구자라트주에 27억5000만달러를 들여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이 공장은 지난해 9월 첫 삽을 떴다. 마이크론은 이 공장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 최종 제품을 생산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2년여가 지난 올해 2월 말에는 돌레라 공장 등 3곳의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이 인도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그로부터 불과 2주 만에 세 공장이 동시에 착공식을 가진 것이다. 인·허가 절차가 번거롭고 느린 것으로 악명 높은 인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모디 총리는 이날 착공식 연설에서 “인도는 과거의 사상과 방식을 포기하면서 큰 진보를 이뤄냈다”면서 “정부는 신속하게 결론을 내리고 정책을 결정하고 있으며 단 1초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반도체는 21세기 과학기술 발전에 있어서 핵심 작용을 하는 산업”이라면서 “자력갱생과 현대화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인도 자체적인 반도체 제조·설계 능력을 대폭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반도체 공급망 중국 대체 의도”
중국은 인도 반도체 산업의 빠른 진전에 긴장하는 모습이다. 인도가 미·중 기술 경쟁과 대중 반도체 제재를 이용해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반도체 생산 기지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중국 궈간(國觀)싱크탱크 남아시아연구센터의 허옌 소장은 “미국과 일본의 대중 반도체 견제 전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어부지리를 노리겠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인도가 독자적인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나서는 건 반도체가 제조업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인도에는 전자제품과 휴대전화, 자동차 등을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의 생산기지가 속속 들어오고 있다. 그에 따라 반도체 수요도 급증하는 추세이다.
인도 전자·반도체협회는 2021년 270억달러였던 인도의 반도체 시장 규모가 2026년에는 640억달러로 증가하고, 2030년에는 1100억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본다. 인도 자체적으로 반도체 공급망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으면 제조업이 필요로 하는 반도체를 대부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인도 정부와 업계의 판단이다. 일본 닛케이아시아는 “인도 정부는 2025년까지 연간 매출액 4000억달러가 넘는 전자산업 허브가 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면서 “반도체산업은 제조업 허브가 되기 위한 기초”라고 보도했다.
반도체산업은 한국과 대만, 미국 기업이 장악한 첨단 반도체 분야와 중국이 주력하는 레거시(legacy·구형반도체) 분야로 구분할 수 있다. 첨단과 구형을 나누는 경계선은 28나노급 기술이다. 삼성전자가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첨단 반도체 분야가 익숙하지만, 제조업 현장에서는 구형 반도체가 폭넓게 쓰인다. 자동차용 반도체는 28나노급, 디지털카메라에 들어가는 화상처리 칩은 30나노급, 전력용 반도체는 50나노급 기술로 제작된다. 방위산업 분야에서는 50나노급보다 더 오래된 기술이 쓰이기도 한다.
풍부한 인력이 강점
아쉬위니 바이쉬나우 인도 전자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3월 초 자국 매체 인터뷰에서 “5년 내에 한국과 대만, 중국의 반도체 패권에 도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인도 반도체산업이 단기간에 한국과 대만 중심의 첨단 반도체 분야에 도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자국 제조업이 수요로 하는 28나노급 이하의 구형 반도체 산업 육성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13일 착공한 돌레라 공장도 28나노급 아래의 구형 반도체 생산을 목표로 한다.
반도체산업 분야에서 인도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은 값싸고 풍부한 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반도체 설계 분야 엔지니어 숫자는 12만5000여명으로 이 분야 전 세계 인력의 20%를 차지한다고 힌두스탄타임스는 보도했다. 매년 반도체 분야의 대학 졸업생도 8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반도체 강국들이 고질적 인력난에 시달리는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다.
반면 반도체 제조 분야는 그동안 기반이 거의 없었다. 모디 총리가 동시에 3개 공장 착공식을 가진 것은 이렇게 낙후한 반도체 제조 분야를 단시일 내에 키우겠다는 뜻이다.
인도가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서면서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도 속속 인도로 몰리고 있다. 미국 반도체 기업 AMD가 인도 벵갈루루에 대규모 디자인센터를 설립하기로 했고, 세계 3위 파운드리업체인 미국 글로벌파운드리도 인도 현지 생산공장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미국 반도체 장비 기업인 어플라이드 머티리얼도 4억달러를 투자해 인도 현지에 엔지니어링센터를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와 미국 퀄컴 등도 인도의 고급 반도체 인력 확보를 위해 현지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