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이재명 대통령(가운데)이 성남시장일 때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2017년 2월 8일 당시 이 대통령의 자서전 출판 기념간담회에 김 후보자(왼쪽 셋째)가 참석한 모습. photo 뉴시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이재명 대통령(가운데)이 성남시장일 때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2017년 2월 8일 당시 이 대통령의 자서전 출판 기념간담회에 김 후보자(왼쪽 셋째)가 참석한 모습. photo 뉴시스

“2000년, 김영훈은 철도노조 공투본(공동투쟁본부)에 있었습니다. 당시 철도노조는 간선제로 위원장을 뽑던 시절이라, 직선제를 이끌어내고 간선제 지도부 선출을 저지하려고 대의원대회가 열리는 경북 울진 백암온천 호텔로 공투본이 쳐들어갔습니다. 김영훈이 가서 이렇게 얘기를 하더군요. ‘봐라, 또 간선제로 지도부를 뽑으면 철도 민영화까지 갈지 모른다. 어용노조를 없애야 우리에게 생존의 길이 열린다.’ 그 연설을 찍은 영상이 전국 기관차 사무소, 차량 사무소에 뿌려지자 대세가 바뀌고, 나중에는 직선제를 지도부가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갔지요.” (당시 ‘철도노조 민주화 투쟁’ 현장에 있던 철도노조원)

김영훈(57)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철도 기관사 출신으로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옛 ‘동지’들의 시선은 엇갈렸지만 ‘말을 잘하는, 설득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만은 공통적이었다. 이에 특유의 온건한 성향이 더해져 김 후보자는 노동계에서 손에 꼽는 경력을 지니게 됐다는 평가다. 김 후보자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민주노총 수장이었고, 조합원 2만명이 넘는 철도노조 위원장도 두 차례나 지냈다. 모두 치열한 정파 간 다툼을 통해 만들어지는 노동계의 요직인데, 김 후보자는 정파색을 띠기보다는 온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강성일 땐 강성인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다.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내부 반발을 무릅쓰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중단한 것(2012년), 철도노조 위원장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이어지는 총파업을 이끈 것(2016년)이 그의 대표적 장면으로 꼽힌다. 그가 임명되면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한국 노사관계 컨트롤타워의 수장이 된다.

 

‘울진 연설’로 알려져… 총파업으로 구속도

1968년 부산 출신으로 동아대를 졸업한 김 후보자는 1992년 철도청(지금의 한국철도공사)에 입사해 기관사가 됐다. 그가 처음 노동조합 지도자급 인사가 된 것은 2000년 32세 나이로 철도노조 부산기관차지부장을 맡으면서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본래 철도노조는 ‘3중 간선제’라는 묘한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철도노조는 1945년 설립 이래 조합원이 위원장을 직접 뽑은 역사가 없었다. 조합원이 지부(지역) 대의원을 선출하고, 지부 대의원이 조합(중앙) 대의원을 선출하고, 조합 대의원들이 위원장을 뽑았다. 간선을 두 차례 거치는 까닭에 반발이 심했다.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민주화 투쟁’이 벌어졌는데, 김 후보자는 이 대목에서 활약해 이름을 알렸다. 2000년 1월 대법원이 철도노조의 간선제가 무효라고 판결하자, 김 후보자를 포함한 ‘공투본’은 당시 지도부가 간선제를 시도하며 열었던 대의원대회를 ‘봉쇄’했다. 바로 이때 김 후보자가 울진에서 열린 대의원대회 현장에서 했던 연설 영상이 전국 철도노조 지부로 뿌려졌다. 이 사건 이후 직선제가 관철됐고, 김 후보자는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직접선거로 뽑게 된 지부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철도노조는 2002년 한국노총 소속에서 민주노총 소속이 됐고, 김 후보자는 2004년 철도노조 위원장에 오른다. 2006년 3월 그는 KTX 승무원 비정규직 문제로 총파업을 이끌었는데, 이때 파업을 4일 만에 철회했지만 업무방해죄로 구속됐다. 당시부터 철도노조 소속인 한 조합원은 “이때 김 후보자는 회사로부터 해고 처분을 받은 뒤 법정투쟁을 통해 해고 무효가 됐다”면서도 “하지만 다른 지도부는 거의 다 해고됐다”고 했다. 

 

李와 2014년 첫 인연

2010년 민주노총 위원장이 된 김 후보자는 임기 후반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여부를 결정하게 됐다. 민주노총은 본래 노동자의 독자정치세력화를 기치로 한다. 1997년 권영길 당시 대선 후보부터 이어지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이 오래된 ’정치 방침’이었다. 그런데 2011년 NL(민족해방·친북) 계열이 장악한 민주노동당과 고 노회찬·심상정 전 의원 등이 이끄는 진보신당, 친노계의 국민참여당이 통합진보당 이름 아래 3자 합당을 선언했다. 민주노총 내에서 “국민참여당은 노동자정당이 아닌데 어떻게 배타적 지지를 할 수 있느냐”는 일종의 노선투쟁이 일어나게 됐다.

이때 김 후보자는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철회를 결정한다. 그는 NL이 포함된 민주노총 내 ‘국민파’의 지지를 받고 당선됐지만 이것으로 NL의 거센 반발에 휩싸였다. 진보진영의 명망가 A씨는 주간조선에 “당시 전국회의(민주노총 국민파 세력의 핵심 정파)가 말도 못하게 김 후보자에게 고통을 줬다”며 “건설노조의 모 지역 위원장은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때 창문으로 뛰어내리겠다는 식의 협박도 했다”고 회고했다.

A씨는 “맹탕인 줄 알았던 사람인데 통진당 지지 철회를 밀어붙이는 강단이 있어 놀랐다”며 “김 후보자에게는 인사청문회에서 사상과 관련한 공격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다만 김 후보자는 이후에도 분류하자면 국민파와 중앙파(정의당 계열) 모두와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민주노총 임기를 마친 뒤 다시 철도노조 위원장이 된 김 후보자는 2016년 철도노조의 ‘74일 총파업’을 이끌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공공기관에 성과연봉제 도입을 추진했는데 철도공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철도노조가 9월 말부터 총파업에 돌입하자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다른 산별노조가 공동파업에 가세했다. 이때 농민 백남기씨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건과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의혹이 겹쳤고, 철도노조가 광화문 일대에서 매 주말 진행하던 집회가 정권 퇴진운동(탄핵 촛불집회)과 결합하게 됐다. 파업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마무리됐고,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던 성과연봉제가 폐기되며 파업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바로 이 탄핵 정국에서 민주당 정치인 최초로 박 전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 29일 열린 촛불집회 연설 발언에서였는데, 당시 총파업을 이끌던 김 후보자도 이 대통령과 같은 연단에 올랐었다. 둘 사이의 인연은 이미 2014년부터 있었다고 알려졌다. 이 대통령이 성남시장을 지내던 시절 김 후보자가 기초자치단체의 노동정책에 대한 자문을 요청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독서회’ 성격의 공부모임에 함께 참여했고, 2017년 민주당 대선 경선, 2022년 본선에서 모두 이 대통령을 도왔다.

노동계에서는 김 후보자 인선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이다. 민주노총 지도부 출신의 한 인사는 “합리적이고 균형감각이 있는 인물로, 비교적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앞선 A씨도 “그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인물로 숙의 과정을 중시할 것”이라며 ”이를테면 노조 시절 SR과 철도공사의 통합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국토부 소관의 일인 만큼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비정규직보다는 대기업 노조 위주의 정책으로 일관할 것이 우려된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경총(한국경영자총연합회)과 한경협(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영계는 별다른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