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3일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때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 올라가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 photo 뉴시스
2015년 9월 3일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때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 올라가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 photo 뉴시스

중국 당국이 오는 9월 3일 이른바 ‘항일전쟁 및 반(反)파시스트전쟁 승전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베이징 천안문 열병식에 이재명 대통령 참석을 타진 중이다. 대통령실은 지난 7월 2일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 참석 여부와 관련해 한·중이 소통 중에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 당국은 아직 정식 초청장은 보내지 않았으나, 10년 전인 2015년 9월 3일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때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전례를 따라 이 대통령의 전승절 열병식 참석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같은날 류진쑹(劉勁松) 중국 외교부 아주사장(국장)이 방한해 정병원 외교부 차관보를 예방했는데, 이 같은 사항이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히 오는 9월 3일 이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나란히 천안문 성루에 오를지 여부는 이재명 대통령의 이른바 ‘셰셰(謝謝)외교’의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중국 당국은 히로히토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이 아닌, 일본 도쿄만의 미 해군 미주리호 함상에서 태평양전쟁 항복문서를 정식 접수한 다음날인 매년 9월 3일을 이른바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다. 사실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를 접수한 것은 장제스의 국민당이었으나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자신이 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

2015년부터는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까지 개최했다. 2012년 시진핑 첫 집권 이후 열린 최초의 천안문 열병식으로, 매년 10월 1일 건국기념일인 ‘국경절’에 개최하던 열병식 관례를 깼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국경절 열병식과 달리 이 자리에는 박근혜 당시 한국 대통령을 비롯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최룡해 당시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현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 등 국내외 정상급 인사들도 시진핑, 후진타오, 장쩌민 등 전·현 중국 최고지도자들과 나란히 섰다.

10년 전 전례에 따라 중국 측은 2차 대전 당시 일본 및 그 동맹국과 맞서 싸웠던 각국 정상들에게 전승절 열병식 참석을 타진 중이다. 게다가 이번 천안문 열병식은 2022년 시진핑 집권 3기 개막 이후 처음 열리는 열병식이다. 2019년 10월 1일 국경절 70주년 천안문 열병식 이후 6년 만에 열리는 열병식이기도 하다. 이 같은 의미를 고려해 크렘린궁은 “푸틴 대통령이 오는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방중한다”는 일정을 일찌감치 발표했다. 앞서 지난 5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80주년 열병식 때 시진핑 주석이 직접 참석해 체면을 살려준 터라 푸틴이 직접 답방하기로 한 것.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초대장을 보낼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미국은 2차대전 때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민당 장제스를 지원하면서 일본에 맞서 싸운 바 있다. 당시 미·중 간의 역사적 우의를 앞세워, 자신의 생일날 워싱턴에서 열병식을 개최하는 등 독특한 취미를 가진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초청장을 보낸다는 방침이다. 물론 이 같은 초대장은 미국 입장에서 아시아 최대 동맹국인 일본 입장을 고려해 수용하기 힘들지만, 중국으로서는 일단 찔러봐서 나쁠 것이 없는 셈이다.

 

11월 ‘경주 APEC’과 맞물린 일정

정작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으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다. 초청장을 받아들이자니 트럼프 미국 대통령 눈치가 보이고, 거절하자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전승절 열병식 두달 뒤인 11월 초에는 당장 한국 경주에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도 예정돼 있다.

특히 우리 측은 경주 APEC을 계기로 시진핑 주석의 방한과 함께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타진 중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전승절 열병식에 불참하거나 대참자를 보낼 경우, 중국 역시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때 한 단계 격을 낮춰 리창(李强) 국무원 총리를 보낼 가능성도 점쳐진다.

물론 역대 APEC 정상회의에는 미국 대통령이 오는 관계로 중국 역시 ‘1인자’인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직접 참석해 왔다. 지난해 11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때도 시진핑 국가주석이 직접 날아갔다.

하지만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국제사회에서 당연한 외교관례는 점차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일례로 시진핑 주석은 7월 6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시진핑 주석은 2012년 집권 후 단 한 차례도 브릭스 정상회의에 빠진 적이 없다. 하지만 최근 브릭스 회원국인 인도와 브라질이 친미 행보를 보이자 ‘몽니’를 부린 것.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캐나다 G7 정상회의에 초대받아 이재명 대통령과 조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재명 대통령으로서는 10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천안문 성루에 무턱대고 올라갈 수도 없는 형편이다. 당시 한·중 관계를 고려해 천안문 성루에 오른 박 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 바로 옆자리를 배정받는 등 각별한 예우를 누렸다. 참가 정상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의 바로 옆에 섰다. 그 결과 같은해 11월 ‘한·일·중 정상회의’를 3년 만에 서울에서 재개하는 등 외교적 성과까지 챙겼다. 

하지만 천안문 성루에 오른 이듬해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1월)에 이어 한국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공식화하면서 한·중 관계는 곧장 최악의 수렁 속에 빠졌다.

 

트럼프ㆍ시진핑, 둘 다 잡을 수 있을까

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오는 9월 3일 전승절 전에 이 대통령이 방중을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 전승절 열병식에 불참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먼저 중국을 찾아 시진핑 주석과 만나는 것.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아직 외교부 장관은 물론 주중 한국대사도 공석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오는 7월 말에서 8월 초에는 이 대통령이 미국을 찾아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방미 직후 연거푸 중국까지 찾기에는 물리적 시간 자체가 촉박한 셈.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방한한 이후 문재인·윤석열 전 대통령의 거듭된 방한 요청에도 한국을 한 번도 찾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이 대통령이 먼저 선뜻 중국행 비행기를 타기도 곤란한 상황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이 같은 상황을 의식해 임기 중 중국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물론 “한·중 간 지도자 교체주기가 다른 만큼 상호 방문횟수를 따지는 것은 실익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한 전직 외교관은 “시진핑 주석을 잡기 위해 또다시 천안문 성루에 올라갈 경우, 다자회의를 싫어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경주 APEC를 보이콧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