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5 신한 SOL뱅크 KBO 한국시리즈 5차전 LG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에서, 4 대 1로 승리하며 통합 우승을 차지한 LG 선수들이 염경엽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photo 뉴스1
지난 10월 31일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5 신한 SOL뱅크 KBO 한국시리즈 5차전 LG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에서, 4 대 1로 승리하며 통합 우승을 차지한 LG 선수들이 염경엽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photo 뉴스1

2025년 한국과 미국 프로야구 우승팀이 모두 가려졌다. KBO리그에서는 LG 트윈스가, 메이저리그에서는 LA 다저스가 정상에 섰다. 특히 다저스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월드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역대급 명승부 끝에 극적으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LG는 최근 3년 중 2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명실상부 KBO리그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2016년 이후 매년 우승팀이 바뀌는 전력 평준화 흐름 속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복수 우승을 달성했고, 7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다저스 역시 1998~2000년 뉴욕 양키스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새로운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두 팀은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다. 리그를 대표하는 빅마켓 구단이자 부자 구단이며, 수많은 스타 선수를 배출한 인기 구단이다. 자금력에 더해 탄탄한 선수 육성 시스템과 리그 최고의 분석 시스템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전력을 구축했다는 점도 닮았다. 두 팀 모두 당분간 왕조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항상 강팀이었을 것 같은 LG와 다저스에도 불과 몇 년 전까지 우울한 시절이 있었다. LG는 1994년 우승 뒤 무려 29년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패한 뒤로는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조차 실패하며 긴 암흑기를 보냈다. 암흑기 LG는 지지리도 선수를 못 키우는 팀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국내에서 가장 야구 잘하는 선수들이 모인 서울을 팜으로 쓰면서도 팀 성적은 신기할 정도로 바닥을 기었다.

같은 서울 연고의 두산이 화수분 야구로 성공하고 키움이 강정호, 김하성, 이정후 등을 배출하는 동안, LG에서 제대로 키워낸 선수는 오지환 정도가 유일했다. 박병호, 양석환, 김상현 등 재능 있는 선수를 뽑고도 키우지 못해 다른 팀에서 스타가 되는 일이 반복됐다. 2013년 김기태 감독 체제에서 2위로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 두산에 업셋을 당했다. 2019년엔 류중일 감독 체제에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1승 3패로 탈락했다. 2020년 준플레이오프에선 두산 베어스에 패하며 또 탈락했다. 류지현 감독 체제에서도 2021년과 2022년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우승 적기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2022년 정규시즌 구단 역대 최다승을 기록하고도 플레이오프에서 키움 히어로즈에 1승 3패 리버스 스윕을 당하는 충격을 겪었다. ‘저주’라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흑역사였다.

지난 10월 31일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5 신한 SOL뱅크 KBO 한국시리즈 5차전 LG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에서, LG에 1 대 4로 패배하며 준우승한 한화 선수들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photo 뉴스1
지난 10월 31일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5 신한 SOL뱅크 KBO 한국시리즈 5차전 LG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에서, LG에 1 대 4로 패배하며 준우승한 한화 선수들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photo 뉴스1

염경엽의 와신상담

염경엽 감독은 어떤가. 염 감독은 과거 LG 코치 시절 ‘팀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오해와 비난에 시달렸다.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감독 시절엔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로 약체 팀을 강팀으로 만들었지만,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으로 좌절했다.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감독 시절에도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특히 2019년엔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다 정규시즌 마지막 날 1위를 놓치고 충격의 플레이오프 전패를 당했다. 2020년에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경기 도중 쓰러졌고, 건강 문제로 감독직에서 내려왔다. 이후 현장을 떠나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냈다.

이번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김현수 역시 한때 ‘가을맹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큰 경기에 약한 선수로 여겨졌다.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0.048을 기록하며 5차전 1사 만루에서 병살타를 친 기억이 오랫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LG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2019년 포스트시즌에서도 부진해 ‘역시 가을야구에 약한 선수’라는 이미지만 강화됐다.

다저스 역시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1988년 우승 뒤 32년간 월드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2013년부터 새 구단주 그룹 체제에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며 강팀으로 거듭났지만, 2017년과 2018년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그쳤다. 2020년 코로나19 단축 시즌에서 거둔 우승은 ‘진정한 우승’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평가절하됐다. 그 뒤로도 매년 포스트시즌에 올라가놓고 탈락을 거듭했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도 숱한 비난에 시달렸다. 정규시즌에서는 뛰어난 운영을 보이면서도 포스트시즌만 되면 이해할 수 없는 투수 운용으로 경기를 망친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한국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돌버츠’라고 불렸다. 로버츠 감독으로는 절대 우승할 수 없다는 비난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강팀 만들기 위해 꾸준한 투자

그러나 두 팀은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도전하고 경험을 쌓아가며 점점 강해졌고 가을야구 근육을 키웠다. 좌절하지 않고 강팀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LG는 국내 최고 수준의 선수 육성 시설을 갖추고, 스카우트와 전력분석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김현수, 박해민, 김진성 등 모범적인 베테랑을 영입해 팀 문화를 바꿨다.

가을야구에 처음 출전했을 때만 해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맸던 LG 젊은 선수들은 시간이 지나며 어엿한 주전으로 성장했다. 신민재, 문보경, 홍창기, 문성주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201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통한의 견제사로 욕을 먹었던 신민재는 이번 포스트시즌 놀라운 호수비로 여러 차례 팀을 구했다. 201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공기’였던 구본혁은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안정적인 활약으로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5차전에서 문현빈의 번트 타구를 잡아서 처리하지 않고 일부러 흘려보내 파울로 만든 장면은, 2019년 첫 가을야구 때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여유와 노련함이었다.

한때 가을에 약하다고 비난받았던 김현수 역시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0.529, 8타점을 기록하며 MVP에 올랐다. 김현수는 4차전 9회초 3 대 4로 뒤진 상황에서 역전 적시타를 날렸고, 5차전에서도 결정적 타점을 올렸다. 17년 전 병살타의 트라우마를 완전히 씻어낸 김현수는 역대 가을야구 최다안타, 최다타점 기록 보유자다. 김현수는 당시를 떠올리며 “2008년의 나에게 ‘그래 그렇게 못해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다저스 역시 계속된 실패 속에서 배우고 성장했다. 2022년 정규시즌 111승을 거두고도 샌디에이고에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했고, 2023년에는 애리조나에 3연패를 당하며 조기 탈락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쌓이며 단기전 노하우가 축적됐다. 이 시기를 경험한 선수들인 윌 스미스, 맥스 먼시 등은 지금 다저스의 든든한 주전으로 활약하며 우승에 기여하고 있다. ‘돌버츠’라고 욕먹던 로버츠 감독은 지난해 완벽한 불펜 운영으로 팀 우승을 이끌었고, 2025년 월드시리즈에서도 그 진가가 발휘됐다.

거듭된 실패로 쌓은 경험치와 단단해진 멘탈은 선수단 전체의 위닝 스피릿으로 발휘됐다. LG 트윈스는 2차전에서 초반 0 대 4로 끌려가던 경기를 13 대 5로 뒤집고 역전승했다. 4차전에서 1 대 4로 끌려가던 9회초 6점을 뽑으며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모두가 벼랑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다저스도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놀라운 투지와 끈기로 이겨냈다. 7차전에선 3회까지 0 대 3으로 뒤졌지만 결국 역전승을 거뒀다. 야마모토 요시노부는 2차전 완투승 이틀 뒤 18회까지 간 3차전에서 불펜 투입을 자청했다. 전날 밤 6이닝을 던진 뒤 7차전에서도 구원 등판을 자청해 2.2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가장 몸값 비싼 선수 오타니 쇼헤이는 주저 없이 3일 휴식 등판에 동의했다. 타일러 글래스나우는 6차전 3구 세이브 다음 날 연투를 감행했다. 다저스의 심장 클레이튼 커쇼는 “사람들은 다저스가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 얘기하지만, 돈으로는 이런 정신력과 투지를 살 수 없다”고 말했다.

 

한화, 강팀으로 가는 여정의 시작

LG와 다저스의 성공은 올해 준우승으로 실의에 빠진 한화 이글스에도 큰 시사점을 준다. 한화는 오랜 가을야구 탈락 역사를 깨고 올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시즌 막판에는 정규시즌 1위에 오를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가을야구에서 여러 아쉬운 순간을 겪으며 결국 준우승에 머물렀다. 만약 김경문 감독이 10월 1일 SSG전에서 김서현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면? 김서현 살리기를 잠시 뒤로 미뤄두고 다른 대안을 사용했다면?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코디 폰세와 라이언 와이스를 불펜으로 투입했다면?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후반 투수 운영을 다르게 가져갔다면? 과거를 하나씩 후회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하지만 한화 역시 과거 LG가 그랬듯 강팀으로 가는 여정을 막 시작했을 뿐이다. 지난해까지 8위로 6년 연속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던 팀이다. 올해 비로소 리빌딩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승률 0.593에 정규시즌 2위는 1992년 이후 최고 기록이며, 83승은 구단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승이다. 이 자체가 얼마나 큰 변화인가. 문동주는 이미 정상급 투수이자 국가대표 에이스 후보로 성장했다. 문현빈과 노시환도 리그 최고 타자로 자리 잡았다. 김서현과 정우주는 수년 안에 리그를 대표할 잠재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들에게 가을야구는 올해가 처음이었다. 큰 무대에서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물론 시행착오를 줄이고 우승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야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요즘 야구에서 벼락치기로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는 우승팀은 없다. 크고 작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강팀의 문화가 뿌리내리고, 강팀의 DNA가 새겨진다. 클러치 상황에서 황당한 실수로 점수를 내주고 찬스에서 헛방망이만 휘두르던 팀이, 어느새 위기에서 기막힌 호수비와 지능적인 플레이로 상대를 농락하고 찬스에서 상황에 딱 맞는 타격을 해내는 팀으로 달라진다. 코너에 몰린 절박한 순간 초인적인 힘을 끌어내고, 전날 선발로 나선 투수가 다음 날 구원 등판을 자청해 팀을 구하는 투지가 생긴다.

이런 것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LG가 그랬고 다저스가 그랬다. 염경엽 감독이 그랬고 김현수가 그랬다. 실패의 순간을 경험으로 소화하고, 좌절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바꾸고, 비난을 견디며 더 단단해진다. 강팀과 강팀의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화는 이제 막 그 긴 여정을 시작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강팀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너무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 당연해 보이고, 쉽게 우승한 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실은 오랜 흑역사와 고난 끝에 이뤄낸, LG와 다저스의 우승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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