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CEO(왼쪽)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0월 3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photo 뉴스1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왼쪽)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0월 3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photo 뉴스1

젠슨 황 엔비디아 CEO(최고경영자)는 야망이 큰 기업인이다. 그는 전 세계 AI(인공지능) 생태계를 주도하고 싶어 한다. 특히 그의 표현대로 AI 플랫폼 전환에 필요한 소프트웨어·AI기술·제조업 등을 고루 갖추고 있는 한국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나라다. 젠슨 황은 이번 한국 나들이에서 26만장의 GPU(그래픽처리장치)를 공급하겠다는 ‘깜짝 선물’을 했다. 올해 2분기 기준으로 전 세계 GPU 시장의 94%를 장악하고 있는 엔비디아가 마치 한국을 향해 “AMD든 뭐든 다른 곳에서 만든 GPU는 사용하지 말라”든가 “한국업체인 퓨리오사 등이 개발 중인 NPU(신경망 처리장치)도 쳐다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비쳤다. 마치 한국 정부가 만들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을 찬양하는 ‘한국의 차세대 산업혁명’이란 3분16초짜리 영상물을 엔비디아 공식 유튜브에 올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최근 한국 방문을 통해 젠슨 황은 두 가지를 분명히 했다. 첫째, 엔비디아의 초기 사업인 게임용 그래픽카드는 용산전자상가를 비롯한 한국 게임업계가 살렸다는 점이다. 회사가 어려울 때 한국의 PC방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젠슨 황은 15년 전까지 직접 용산전자상가를 자주 방문하면서 한국 게임시장의 트렌드와 잠재력을 파악했다. 둘째, 고(故) 이건희 회장이 자신에게 보냈다는 게임 관련 편지 내용을 공개하고 아들인 이재용 회장과는 치킨을 뜯는 격의 없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삼성전자와의 일체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젠슨 황은 자신의 AI 황제 야망을 한국과 삼성전자를 통해 이루겠다는 포부를 밝힌 셈이다.

젠슨 황은 지난 10월 30일 저녁 서울 강남구에 있는 깐부치킨 삼성역점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만나 치맥을 하며 흥겨운 저녁 식사를 했다. 겉으론 가벼워 보였지만 사실 차세대 AI 반도체와 자율주행, 로봇 분야를 잇는 거대 협력의 판이 짜이는 순간이었다. ‘지포스(GeForce) 25주년’ 무대에 오른 젠슨 황은 “1996년 제이(이재용 회장)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편지 덕분에 한국에 오게 됐다”며 “당시 이건희 회장이 보낸 편지에는 ‘한국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비디오게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비디오게임 올림픽을 열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이재용 회장도 “25년 전 삼성 GDDR D램을 써서 지포스256이 출시되면서 양사의 협력이 시작됐고 젠슨과 저의 우정도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왼쪽)가 지난 10월 31일 경북 경주시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 서밋에 참석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 부터 SK하이닉스의 HBM4 반도체 웨이퍼를 선물로 받고 있다. photo 뉴스1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왼쪽)가 지난 10월 31일 경북 경주시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 서밋에 참석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 부터 SK하이닉스의 HBM4 반도체 웨이퍼를 선물로 받고 있다. photo 뉴스1

젠슨 황, 올 1월 “삼성, 디자인 새로 해야” 

엔비디아 입장에서 삼성전자는 가장 큰 파트너다.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와 달리 종합 전자업체다. 반도체와 휴대폰부터 로봇을 거쳐 가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전자업체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AI가 활용될 분야가 한두 개가 아니다. 미래 AI 생태계를 확실하게 주도하고 싶은 엔비디아 입장에서 삼성전자는 결코 놓칠 수 없다.

그렇다면 최근 수년간 젠슨 황이 AI 가속기의 필수 부품인 HBM(고대역폭메모리) 수주를 놓고 삼성전자와 일종의 ‘밀당’을 벌이는 것 같기도 했고, 보기에 따라서는 삼성전자에 대한 ‘군기잡기’로 비치기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젠슨 황은 최근 수년간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을 거의 SK하이닉스로부터만 공급받았다. 보통 GPU 1개에 8개의 HBM이 들어간다. ‘삼성전자에 대한 엔비디아의 품질 승인이 임박했다’는 추측기사들이 난무했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이었다. 당시 시중 루머에는 ‘젠슨 황이 “삼성의 HBM과 엔지니어들을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당신들의 고객이지 직원이 아닌데 자꾸 전화로 물어보고 일을 요청하지 말라”고 강하게 질책했다’는 내용이 나돌기도 했다.

젠슨 황은 지난해 3월 엔비디아 주최 ‘GTC 2024’ 현장에서 삼성전자 부스를 찾아 HBM3E 12단 제품에 ‘젠슨 승인(Jensen Approved)’이라는 사인을 해서 “삼성전자가 곧 HBM을 납품하는 모양”이라는 기사가 나왔으나,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지난해 5월 24일 로이터발(發)로 나왔던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HBM 퀄테스트(품질 검증)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뉴스의 파장은 컸다. 삼성전자의 HBM3(4세대)와 HBM3E(5세대) 8단과 12단 제품이 발열과 전력소비 문제로 엔비디아의 납품 조건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보도였다. 삼성전자는 부인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올해 1월 7일 미국 CES 현장에서 젠슨 황은 “삼성전자의 HBM 납품 테스트는 잘되고 있나”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자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HBM을 납품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큰 확신을 갖고 있다. 엔비디아가 사용한 최초의 HBM 메모리는 삼성전자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위대한 회사다”라고 치켜세웠다. 기자들이 다시 “그렇다면 왜 그리 오래 걸리나”라고 묻자, 젠슨 황은 “삼성전자는 새로운 디자인을 설계해야 한다. 매우 헌신적이다. 나는 그들이 해낼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다시 대답했다. 삼성전자가 곧 HBM을 납품할 듯이 칭찬을 늘어놓아 한껏 기대감을 부풀게 했으나 말미에는 “삼성전자는 디자인을 새로 해야 한다”라는 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게 만들었다. 발열 문제 등 하자가 심하니 제품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이 때문에 국내 증시는 요동을 쳤다. 사실 젠슨 황 입장에서는 그동안 엔비디아가 원하는 HBM 스펙을 맞추는 회사가 SK하이닉스 한 곳뿐인 점이 못마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납품업체가 여럿이어야 생산 관여도 가능하고 단가 인하도 쉽지 않겠는가. 젠슨 황의 눈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삼성전자의 ‘모자라는’ 기술력이 그저 아쉬운 상황이었다.

 

젠슨 황, 2018년 삼성전자 방문 

재계에서는 그동안 젠슨 황이 삼성전자에 계속 딱지를 놓은 배경을 두고, 2018년 젠슨 황이 삼성전자로부터 문전박대당한 일을 거론하곤 한다. 그 당시의 개인적 서운함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삼성전자는 오래갈 파트너인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부러 약간의 군기를 잡겠다는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추측의 영역이다. 업계에서 들리는 얘기는 이렇다. 2018년 젠슨 황은 삼성전자를 극비리에 방문해 양사의 협력을 다각적으로 강화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의 HBM 개발’이란 타이틀은 SK하이닉스에 빼앗겼지만, 엔비디아와 손을 잡고 이를 서버용 컴퓨터에 공급하는 것은 앞서나가던 상태였다. 가령 HBM2까지만 해도 엔비디아와 삼성전자의 관계는 공고했다. 그래서 젠슨 황은 삼성전자와 엔비디아가 같이하는 HBM 개발을 더 높은 수준에서 확대하고, 8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1m) 이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개발을 같이하며, 엔비디아의 컴퓨팅 플랫폼인 CUDA(쿠다)를 같이 키워 나가자는 등의 내용을 제안했다. 그러나 삼성전자 측은 젠슨 황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삼성전자는 2017년부터 시작된 검찰의 국정농단 수사 여파로 이재용 회장이 사법처리 이슈 외에 다른 문제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룹 수뇌부 역할을 하는 사업지원TF에서는 웬만한 이슈는 뒤로 미루고 ‘현상유지(Status Quo)’ 하는 것이 최우선 경영방침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젠슨 황은 이재용 회장을 만나지도 못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엔비디아가 그래픽카드로는 세계적 명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당장 회사 경영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칠 인물로는 판단하지 않았다. 젠슨 황을 만난 인물도 고위임원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젠슨 황은 “어떻게 삼성전자에는 나하고 장기 전략을 얘기할 사람이 이렇게 없나”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당시 삼성전자의 회사 경영진은 수사와 재판을 받는 난국이었지만, 반도체 시황은 좋았다. 2017~2018년에는 D램 가격이 다시 급등하면서 만드는 대로 제품이 팔리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D램보다 3배 이상 많은 웨이퍼(Wafer)를 사용해야 하고 시장 규모도 크지 않은 HBM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2017년 10월부터 반도체 사업부인 DS(디지털솔루션)부문을 맡은 김기남 부회장은 2018~2019년 무렵 HBM 개발팀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돌연 해체했다. 회사 관계자는 “기존 D램이 시장에서 수익을 내고 있는 판국이라, HBM은 비용 대비 성능이 떨어지고 성장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었다”면서 “당시 HBM을 개발하던 연구개발 인력 중 적지 않은 수가 SK하이닉스로 이직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엔비디아, 새로운 협력 관계 

삼성전자와 대화가 결렬된 엔비디아는 대신 SK하이닉스와 접촉했고 두 회사는 HBM 개발에서 공고한 파트너십을 맺게 됐다. 파운드리를 하는 대만 TSMC와의 연계도 자동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SK하이닉스는 지금까지 엔비디아에 다양한 버전의 HBM을 공급하면서 역대급 경영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엔비디아~SK하이닉스~TSMC’ 체인은 AI 시대에 가장 막강한 동맹군이 되었다. 특히 2022년 챗GPT가 세상에 나오면서, 엔비디아와 젠슨 황은 그저 탁월한 게임용 그래픽카드 업체에서 일약 AI 시대의 황태자로 격상했다. 그래서 최근 수년간 삼성전자의 가슴앓이는 심했다. 가정법이지만 만일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와 보다 일찍 확실하게 손을 잡았다면, HBM 때문에 수년간 벌어졌던 마음 고생도 없었을 것이고, 파운드리에서도 엔비디아 물량을 받아 지금처럼 대만 TSMC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은 막았을 것이다.

다행히 삼성전자는 1~2년 전부터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수뇌부를 교체하는 등 잇단 강경 드라이브를 걸었다. 지금은 엔비디아의 HBM 공급망에 본격 진입할 준비를 마쳤다. HBM3E에 대해서는 퀄 테스트를 통과했고, 이전 세대 제품과는 설계와 기능이 확연히 달라 거의 신제품으로 취급받는 HBM4에 대해서는 삼성전자가 1c(6세대 10나노급)라는 탁월한 기술을 바탕으로 엔비디아의 낙점을 받을 것으로 보는 관측이 많다. 젠슨 황은 “엔비디아의 신형 GPU인 루빈은 예정대로 내년에 생산에 들어가 하반기에 출시할 것”이라며 “실리콘이 확보돼 있고 시스템도 갖춰져 있고 생산 준비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젠슨 황의 발언을 종합하면, SK하이닉스 외에 삼성전자도 루빈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삼성전자가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시장조사업체인 트렌드포스의 전망은 냉정하다. “HBM4가 주류로 부상해도 현재 시장 주도권을 잡은 SK하이닉스가 50% 이상의 점유율로 선두를 유지할 것이다.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은 수율(收率·생산품 중 정상품의 비율)과 생산능력을 더욱 개선해야 한다.” 다만 HBM4에서 막상 뚜껑을 열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어쨌든 이번 젠슨 황의 방한으로 삼성전자는 젠슨 황과 사이에 있었던 모든 오해나 앙금을 말끔히 씻었다. 그리고 AI 시대의 그랜드 협력을 위한 시금석을 놓았다. 삼성전자와 엔비디아의 새로운 협력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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