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씨소프트는 한국 게임사의 상징 같은 존재다. 1998년 리니지로 시작해 PC방 문화를 만든 장본인이자 한국 게임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란 점에서 그렇다. 리니지로 ‘온라인 RPG’라는 개념을 정착시켰고, 과금 모델과 서버 운영 구조를 표준화했다.
그러나 지금의 엔씨소프트는 과거 성공의 기억에 묶여 있다. 안정적 수익 기반인 리니지는 여전히 돈을 벌지만, 노후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엔씨소프트의 본업인 게임 개발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신작 게임 ‘아이온2’와 AI 신사업은 엔씨소프트가 베팅한 미래다. 아이온2의 완성도는 높은 것으로 전해지며 내부 기대감도 상당하다. 하지만 출시 전까지 결과를 속단할 순 없다. 오랜 기간 절치부심한 AI신사업은 유망하지만, 매출 규모를 키우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재도약의 발판을 제대로 딛는다면 새로운 신화를 쓰겠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밝은 미래를 기대하긴 어렵다.
한때 “리니지 덕에 먹고산다”던 엔씨소프트는 2020~2022년 실적이 정점을 찍은 뒤 뚜렷한 하향 곡선을 그렸다. 최근 7년간 연결기준 재무제표를 보면 2018년 1조7151억원이던 매출은 2022년 2조5718억원으로 고점을 찍었지만 지난해 1조5781억원에 그치며 1조원 가까이 빠졌다. 올해 예상 매출은 1조5700억원 수준으로 2조원 벽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수익성 하락은 한층 극명하게 나타났다. 2018년 6149억원이던 영업이익은 2020년 8248억원으로 고점을 찍었지만 지난해엔 1092억원 적자를 냈다. 이에 따라 2018년 35.85%에 이르렀던 영업이익은 조금씩 감소해 지난해 마이너스(-)6.92%까지 감소했다. 이 기간 당기순이익률 역시 24.57%에서 5.96%로 큰 폭으로 감소했다. 엔씨소프트의 실적 감소는 리니지 IP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란 구조적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리니지M, 리니지2M, 리니지W 등 리니지IP에 바탕한 모바일 게임 3종은 2022년 매출 1조8600억원을 넘었지만 지난해엔 9000억원에 그쳤다. 리니지 주 이용층의 고령화로 점차 매출이 줄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2023년 출시한 기대작 TL(쓰론 앤 리버티)과 TL글로벌 등도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았다.
현금흐름표는 한층 명확한 지표다. 2020년 7076억원에 이르던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2023년 1399억원, 2024년 1070억원 등으로 점차 감소했다. 2년 평균은 1200억원 수준으로, 7년 전인 2018년과 비교해 3분의1 수준이다. 주력 사업의 현금 창출력이 급격히 떨어졌으며 실질적 재무 건전성이 악화하는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다만 단기금융상품을 처분한 영향으로 2024년 말 가용 현금은 오히려 늘었다. 2023년 1조1674억원이었던 단기금융상품이 지난해 1782억원으로 줄어든 대신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1조2604억원으로 전년(3651억원) 대비 245% 증가했다. 엔씨소프트는 확보한 현금을 신규 장르에 대한 IP 확보와 퍼블리싱 투자 등에 활용할 방침이다.
내부 분위기는 무겁다. 엔씨소프트에 10년 이상 재직한 한 직원은 “회사가 리니지의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리니지M 이후 완전히 새로운 장르나 사업모델(BM)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결국 리니지식 모델로 되돌아간다”고 했다. 젊은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게임을 만들려는 의지가 꺾인다”는 말이 나온다. “리니지 안에 생각이 갇힌 임원들이 여전히 의사결정을 쥐고 있기 때문이라는 불만도 있다”라고 말했다.

김택진 단독 경영체제 종료
엔씨소프트는 칼을 빼들었다. 지난해 말 VIG파트너스 출신 박병무 대표를 영입하면서 1997년 창립 이래 김택진 대표의 단독 경영체제를 처음으로 깼다. 박 대표는 하버드대 로스쿨, 1985년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를 지낸 인물이다. 이후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 대표, 뉴브리지캐피탈 코리아 사장, 하나로텔레콤 대표를 역임했다. 박 대표 취임 후 엔씨소프트는 곧장 복지 축소와 비용 절감, 구조조정을 통한 조직 효율화 등에 나섰다. 지난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약 900명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났고, 6개 자회사를 분사시키며 본사 인원은 5000명에서 3000명 수준으로 줄었다. 단기간 인건비와 관리비 절감 효과는 분명했다. 2025년 1분기 매출은 줄었지만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다만 이 효율화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박 대표는 김앤장과 사모펀드 VIG파트너스 출신으로, 구조조정과 비용 효율화에 강점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엔씨가 당면한 과제는 리니지 중심의 사업 구조를 재편하고, 대체 IP를 키우며, AI 사업을 고도화하는 일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창의성과 모험이 필요한 단계라 볼 수 있다. 엔씨소프트가 최근 저녁 식대 감축 등 눈에 띄는 비용 절감 조치를 시행하면서 내부에선 사기가 꺾였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게임 업계 한 관계자는 “(박 대표의 리더십이) 단기적인 재무 안정에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인재 유출과 조직 사기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게임 산업은 인적 자본이 핵심인 만큼 효율성보다 동기부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엔씨소프트의 승부수는 신작 ‘아이온2’다. 11월 13일 지스타 무대에서 공개 예정인 이 작품은 단순한 신작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아이온2는 2008년 출시된 ‘아이온’의 정식 후속작이자 리니지에 이은 두 번째 핵심 IP로 게임 사업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을 거의 유일한 카드로 평가된다. 엔씨소프트는 아이온2를 한국과 대만에서 먼저 출시하고, 이후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시키겠다는 포부다. 내부적으로 2026년 매출 목표 2조원 중 6000억~1조원을 신작에서 내겠다는 계획인데 그 대부분을 아이온2가 담당할 것으로 예상한다. 착한 사업모델(BM)로 과거 리니지식 ‘확률형 아이템’ 방식도 벗어난다. 과도한 뽑기(P2W)를 지양하고, 캐릭터 외형과 스킨, 배틀패스 중심으로 수익 구조를 설계했다. 단기간 매출 폭발 후 급락하는 패턴을 피하기 위해 이용자 유지율 중심의 장기 운영 전략을 택했다. 기술적으로는 언리얼엔진5를 기반으로 제작했고, 오픈월드 구조에 ‘비행’ 요소를 강화해 기존 아이온의 핵심 경험을 확장했다. 덕분에 그래픽 품질은 현존 모바일 대규모 다중 사용자 롤플레잉 게임(MMORPG) 중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초기 테스트 단계에서 반응은 나쁘지 않다. 포커스그룹테스트(FGT)에서 이용자 만족도가 높았고, 플레이 완성도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아이온2의 흥행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업계에서는 “아이온2가 실패하면 엔씨소프트는 더 이상 믿을 카드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지적했다. 신작 성패가 회사 전체의 실적 회복과 시장 신뢰 회복을 좌우하는 상황인 셈이다. 엔씨소프트는 “지금 내부 분위기는 고무적”이라며 “아이온2 출시와 AI 사업의 성과가 동시에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단순 후속작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리빌딩 타이틀”이라고 홍보팀은 설명했다. 회사 내부에서는 아이온2가 흥행에 성공할 경우 2025년 실적 반등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4년 뚝심 ‘AI 신사업’ 꽃 피울까
AI 솔루션 사업의 성장은 엔씨소프트의 희망이다. 엔씨소프트의 AI 기술력은 이미 국내 최상위 수준으로 평가된다. 엔씨소프트는 2011년 업계 최초로 AI 연구조직을 설립했으며 2023년에는 흩어져 있던 조직을 대표 직속 리서치본부로 통합했다. 지난해 엔씨소프트에서 분사한 자회사 NC AI엔 약 200여명이 재직 중이며 이 중 160~170명 정도가 연구자 혹은 디벨로퍼 개발자로 구성됐다. NC AI는 패션·미디어·커머스 등 다양한 산업을 겨냥한 AI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AI SaaS는 복잡한 AI 모델과 인프라를 직접 구축하지 않아도 인터넷만으로도 다양한 AI 기능을 쓸 수 있는 서비스다. 자연어 처리, 이미지 생성, 음성 인식, 예측 분석 등 기능을 API나 웹 인터페이스 형태로 손쉽게 접목할 수 있어 대기업은 물론 스타트업·중소기업까지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AI SaaS 시장은 2034년까지 2조9731억달러(약 400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엔씨소프트가 전면에 내걸고 있는 AI 사업 모델은 바로 ‘버티컬 AI’다. 버티컬 AI란 거대언어모델(LLM) 등의 범용 거대 모델을 기반으로 두고, 그 모델을 업계 특성에 맞게 세밀하게 조정해 현업에서 바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 방식을 뜻한다. NC AI는 게임 개발 과정에서 축적한 AI 기술을 바탕으로 멀티모달 AI 모델 ‘바르코(Varco)’를 선보였다. 바르코 3D를 통해 게임 속 3D 캐릭터를 자동생성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대사를 쓰고 NPC 대화도 생성할 수 있다. 최근 공개한 바르코 비전 2.0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동시에 이해해 처리할 수 있는 멀티모달 모델로 업그레이드됐다. 여러 장의 이미지를 분석하거나 스마트폰, 노트북 등에서 작동할 수 있게 최적화됐고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도 지원한다. 특히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바로 패션 산업이다. 이미지 생성 AI인 바르코 아트를 활용하면 3초 만에 수십 종의 의류 디자인을 자동 생성하는 등 신상품 기획, 디자인 프로세스 등 자동화가 가능하다.
NC AI 관계자는 “국내 1위 사업군들 중 글로벌에서도 1위를 할 수 있는 제조나 K컬처, 유통 등 산업들이 AI를 통해 주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1년부터 쌓아온 AI 연구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런 콘셉트를 발전시키고 있다. 여러 사업군의 기업들이 실제로 NC AI 고객으로 참여하고 있어 현금화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엔씨의 AI 도전은 리니지를 대체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시장을 개척 중인 것에 가깝다. 아직은 매출 비중이 미미하지만, 먼 미래에 AI 플랫폼 기업 엔씨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