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표의 피습은 충격적 정치 테러다. 하지만 테러 자체보다 병원 이동이 더 화제다. 이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은 지역 의료 충실화를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럼에도 막상 사건이 터지자 응급 헬기를 타고 ‘(수술을) 더 잘하는’ 서울의 병원을 찾았다. 이것이 지방 의료 홀대·불신으로 비쳤다. 평소 주장이 그저 “(···)인 척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마침 ‘(···)인 척하는 것’의 실상과 사회적 영향을 진지하게 논한 철학적 담론이 있다. 바로 저스틴 토시와 브랜던 웜키의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2020)이다. ‘그랜드스탠드(grandstand)’란 진정성이 결여된 가운데 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인 방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들은 주로 ‘도덕적인 척하는 말이나 행동’을 다룬다. 그런 도덕적 그랜드스탠딩은 오히려 도덕을 망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도덕적인 이야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도덕성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이야기를 무책임하게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모욕하고 위협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나쁜 짓을 덜 의심받게 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한다. 도덕적인 이야기도 오용되면 희화화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도덕적으로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들을 오히려 훼손시킨다.

인정욕구로 말미암아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랜드스탠딩을 한다. 문제는 아예 명성이나 지위를 얻기 위해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타인이 자신을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믿어주기를 원한다. 또한 실제로 자기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도덕적 자기 고양을 통해 그랜드스탠딩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그래서 그랜드스탠딩은 의식적으로 하는 경우보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실제로 그랜드스탠딩은 어떻게 이뤄질까. 도덕적 토론에 끼어들어 “나도 그렇다”고 힘을 보탠다. 점점 더 강렬한 주장을 펴서 극단으로 치닫는 경쟁을 벌인다. 과도한 잣대를 들이대어 문제를 날조해 내기도 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조롱하고 묵살한다. 나아가 분노, 모욕, 허세 등 강렬한 감정 표출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과시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그랜드스탠딩은 쟁점을 도덕적으로 극단화해 합리적·논리적 토론 자체를 아예 가로막는다.

그랜드스탠딩은 단순히 짜증만 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양극화, 냉소주의, 분노, 피로 등 사회적 손실을 초래한다. 무엇보다 그랜드스탠딩은 끝없는 시비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집단 간 양극화를 초래한다. 이러한 정서적·도덕적 양극화는 상대편을 비인간화한다. 더구나 양극화는 집단 내에서도 격렬하게 벌어진다. 집단 안팎에서 점점 더 극단적인 견해가 득세한다.

또한 그랜드스탠딩은 도덕적 이야기에 냉소를 품게 한다. 정작 올바르고 진정성 있는 도덕 담론이 설 자리를 앗아간다. 이런 가운데 도덕적 이야기는 그저 추잡하고 지저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자신이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전쟁터 쯤으로 비칠 뿐이다.

끝으로 그랜드스탠딩은 사소한 일을 놓고 과도한 분노를 분출하여 분노 피로 현상을 초래한다. 이로 인해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게 만든다.

특히 그랜드스탠딩은 중도파를 도덕적·정치적 담론에서 이탈하게 만든다. 결국 정치 담론이 활동가들에 의해 더욱 확고하게 장악되어, 도덕적 그랜드스탠딩은 점점 더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물론 중도파도 도덕적 이야기를 피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난장판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당신은 어느 편이냐는 사회적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드러내고자 타인의 도덕적 실수를 과도하게 맹렬히 공격한다. 왜곡과 날조, 조롱과 모욕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도덕적으로 훌륭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도덕적 담론을 이기적으로 오용하여, 그것의 순기능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비록 인정욕구라는 허영심에 기반할지언정 그랜드스탠딩은 도덕적 가치를 확증·확산시키는 순기능이 있다. 실제로 허영심이나 이기심이 공적으로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에서 남발되는 도덕적 그랜드스탠딩은 대체로 해롭다. 그것은 더 나은 자리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이기적 투쟁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보다 그랜드스탠딩으로 악명 높은 집단은 없다. 흔히 유권자들은 정책 능력보다 정치인의 인성이나 도덕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정치는 도덕성 경연장이 되며, 그 속에서 도덕적 그랜드스탠딩이 만연하게 된다. 실제로 그랜드스탠딩은 선거 승리 등 일정한 목적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다. 따라서 그것을 없애기는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인에게는 어느 정도 그랜드스탠딩이 도덕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체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정치적 그랜드스탠딩은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첫째로, 비타협의 문제다. 그랜드스탠딩은 극단화와 날조 등을 통해 집단 양극화를 가속화한다. 그것이 정치 집단 사이의 타협을 이끄는 조건을 악화시켜 극단적 갈등구조를 만든다. 나아가 그랜드스탠딩은 시민들에게 냉소와 공적 도덕 담론에 대한 무감각을 촉진해 시민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둘째로, 현시적 정책의 문제다. 현시적 정책이란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보다 무엇을 표현하는가에 기반한 정책을 의미한다. 이런 정책은 내집단의 가치관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자극적인 호소력을 발휘한다. 한마디로 자기과시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문제는 그런 정책이 현실적으로 별로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만다.

마지막으로, 정치가나 사회활동가들은 문제 해결보다 도덕 논쟁 자체에 사활을 건다. 이 세상에서 도덕 논쟁은 끝이 없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역할을 끊임없이 확대하며 입지나 지위를 지속·강화하려고 한다. 정치나 사회 활동이 도덕적 자질을 과시하는 장이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정치나 사회운동을 자신을 뽐낼 도구로 여기며 더욱 강렬한 도덕 투쟁을 벌인다.

인간의 인정욕구는 제거할 수 없다. 그것의 발로인 그랜드스탠딩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줄여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도덕적인 이야기를 할 때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이것만 철저히 실천해도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과시하기 위해 도덕적인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도덕적인 조롱과 모욕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사회에는 ‘(···)인 척’하며 도덕적으로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허세가 돈벌이가 되고 명성(악명)을 높이는 수단이 되고 있다. 정책적 능력보다 도덕적 허세로 영달을 꾀하는 정치인도 허다하다. 이러한 세태에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병원 이동 논란은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이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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