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0일 전 야구선수 임혜동씨가 김하성 공갈 혐의와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석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해 12월 20일 전 야구선수 임혜동씨가 김하성 공갈 혐의와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석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한때 한국야구에서 에이전트는 믿지 못할 존재로 여겨졌다. 에이전트가 정식으로 인정받기 전인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활동한 일부 에이전트가 남긴 ‘흑역사’ 탓이다. 여러 거물급 선수의 에이전트를 맡았던 A씨가 대표적이다. A씨는 과거 스포츠매니지먼트사 대표로 이승학, 김일엽(전 롯데)의 미국 진출과 2005년 구대성의 뉴욕 메츠행을 주선했다. 2008년 12월엔 FA(프리에이전트)로 국외 진출을 시도한 김동주(전 두산)의 에이전트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A씨의 일처리 방식은 종종 구설수를 빚었다. 금전 유용 의혹을 둘러싼 구대성과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다. 2005년 구대성의 가족은 “A씨가 ‘미국 현지 생활에 필요하니 돈을 송금해달라’고 요구해 보낸 1억1250만원을 몰래 인출해 유용했다”고 폭로했다. A씨가 수차례 반환을 약속했고 갚겠다고 공증까지 해놓고 연락을 끊었다는 주장이었다. A씨가 미국행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진 야구선수 B씨 역시 2000년대 초반 억대 대출을 받아 A씨에게 빌려줬으나 이를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KBO리그에서 뒤늦게 공인 에이전트 제도가 정식으로 도입되자 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는 불량 에이전트가 나오는 걸 막기 위해 다양한 방지책을 마련했다. 2018년부터 도입한 공인 에이전트 자격심사와 자격시험이 대표적인 예다. 선수협은 에이전트 희망자의 채무 관계, 전과, 구단 혹은 언론사와의 이해관계를 면밀하게 조회한 뒤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라이선스를 발급했다. 한 번 시험에 합격해도 2년간 실제 대리인 업무를 하지 않으면 라이선스가 취소되는 규정도 마련했다. 규정을 어기거나 물의를 빚은 에이전트는 자격 정지 내지 자격 취소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김하성·류현진 협박한 에이전트

여기에 몇몇 뜻 있는 에이전시 대표들이 공인대리인 제도의 정착과 산업화를 위해 노력한 것도 한몫했다. 한 야구 관계자는 “리코스포츠의 이예랑 대표, 스포츠인텔리전스의 김동욱 대표 등은 과거 에이전트 업계의 나쁜 관행을 멀리하고 정직하고 깔끔한 일처리로 좋은 평판을 쌓아 왔다”면서 “선수들의 신뢰는 물론 구단으로부터도 인정받는 에이전트”라고 평가했다. 지방구단 관계자도 이들에 대해 “구단 입장에선 정말 상대하기 힘든 에이전트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꼼수를 쓰지 않기에 믿음이 가는 상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리코스포츠의 경우 2015년 이후 소속 야구선수들의 계약 총액만 2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코는 구단들이 ‘샐러리캡’ 문제로 허리띠를 졸라맨 올겨울에도 철저한 준비와 전략으로 총 500억원대 규모의 계약에 성공했다. 리코 소속인 이정후는 1억1300만달러의 초대형 계약으로 미국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고 고우석은 최대 940만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했다. 이들 에이전트의 활약으로 ‘에이전트는 선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에이전트의 위상을 땅으로 떨어뜨릴 만한 사건이 올겨울 스토브리그에서 발생했다. 메이저리거 김하성과 류현진을 협박한 전 야구선수 임혜동 사건이다. 사건은 김하성이 지난해 11월 과거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 후배이자 소속사 로드매니저였던 임혜동을 공갈 협박으로 고소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김하성은 임혜동에게 두 차례에 걸쳐 각각 2억원씩 총 4억원이란 거액을 전달했지만 이후로도 임혜동의 협박이 계속되자 결국 고소를 택했다. 폭로 공방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임혜동이 다른 메이저리거 류현진을 협박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류현진은 임혜동에게 3억원이 넘는 거액을 뜯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은퇴 선수 임혜동은 단숨에 모든 야구계가 주목하는 이름이 됐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김하성과 류현진은 메이저리거의 유명세를 악용한 공갈 협박과 금품 갈취 사건의 ‘피해자’란 사실이다. 사건이 알려진 초기 대중의 관심은 김하성과 류현진이 협박을 당한 피해 사실보다 ‘거액의 돈을 내줘야 할 정도의 약점이 있었나’라는, 말초적인 지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을 종합하면 김하성과 류현진이 임혜동에게 잡힌 ‘약점’은 개인적이고 사소한 갈등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김하성은 술자리에서 벌어진 사소한 다툼이 빌미가 됐다. 류현진 역시 술자리 장난으로 꼬투리를 잡혔다는 보도가 나왔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뛰고 있는 김하성 선수는 공갈·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등 혐의로 임혜동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photo 뉴시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뛰고 있는 김하성 선수는 공갈·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등 혐의로 임혜동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photo 뉴시스

믿고 따라 이적했던 에이전트에 뒤통수

‘대수롭지 않은’ 일을 빌미로 한 협박에 두 선수가 순순히 거액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에이전트’가 있었다. 김하성 협박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지난 1월 18일 임혜동에 대한 구속 영장을 신청하면서 동시에 김하성의 전 소속사 팀장인 에이전트 C씨를 피의자로 입건했다. 경찰은 C씨가 임혜동과 선수 협박을 공모하고 갈취한 돈을 나눠 가졌을 가능성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야구계에선 김하성의 약점인 ‘병역 특례’를 공략하도록 임혜동에게 조언한 게 C씨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임혜동은 2021년 2월 김하성과 술자리에서 몸싸움을 벌인 뒤 김하성을 협박했는데 당시 김하성은 샌디에이고와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시점이었다. 김하성 측 설명은 코로나19 방역 지침 위반으로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받은 병역특례가 취소된다면 미국 진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압박감 때문에 합의금을 건넸다고 한다. 한 야구 관계자는 “그동안 임혜동의 행보를 봐선 병역특례를 빌미로 한 협박이 본인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 같지 않다. 김하성을 잘 아는 누군가의 코치를 받았을 것”이란 의견을 내놨다. 경찰은 C씨가 류현진 협박에도 가담했는지 여부를 살피는 중이다. C씨는 소속사에서 류현진의 국내 매니지먼트 업무도 담당해 왔다.

C씨의 피의자 입건 소식이 전해진 뒤 에이전트 업계를 잘 아는 관계자는 “언젠가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을 보였다. 과거 다른 에이전시 소속일 때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C씨의 전력 때문이다. 앞의 관계자는 “C씨는 원래 대형 에이전시 업체 D사 팀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야구계는 물론 연예계에도 넓은 인맥을 자랑해 ‘마당발’로 통했다. 내로라하는 스타 선수들이 C씨와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냈다. 김하성을 비롯한 여러 대형 스타 선수를 담당하며 나름 영향력 있는 에이전트였다”고 전했다. 선수들과 관계 형성 능력이 뛰어나 C씨를 친형보다 더 믿고 따른다는 선수도 많았다.

하지만 에이전트로서 C씨의 도덕성과 처신에는 문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선수협 출신의 야구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워낙 세간의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과거에도 여러 차례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서 “몇 해 전에는 김하성 등 소속 스타 선수들이 골든글러브 부상으로 받은 고가의 글러브를 몰래 처분했다가 들통나 큰 문제가 됐었다”고 전했다. 당시 선수협은 C씨에게 ‘6개월 자격정지’ 징계를 내렸다. 

이후 C씨는 D사에서 자신이 관리하던 선수 여러 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현 소속사로 이직했다. 김하성도 이때 함께 소속사를 옮겼다. 그러나 믿음의 대가로 김하성이 얻은 건 협박과 수억원의 갈취였다. 김하성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야구인은 “형처럼 믿고 따랐던 에이전트에게 배반당한 사실을 알게 된 뒤 김하성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모든 걸 손바닥 들여다보듯 다 아는 에이전트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에이전시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김하성은 결국 지난해 9월 소속사에서 나와 가족들과 1인 기획사를 설립했다. 그럼에도 협박이 계속되자 결국 김하성은 스크래치를 감수하고 사건을 공론화하는 길을 택했다.

 

“선수협이 제때 못 걸러내 선수가 피해”

C씨의 피의자 입건 소식이 알려진 뒤 야구계와 에이전트 업계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일부에서는 ‘에이전트 무용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구단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고 선수의 힘이 약한 KBO리그에서 에이전트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많은 인력과 풍부한 정보를 보유한 구단을 선수 혼자서 상대하는 건 역부족이다. 에이전트 업계를 잘 아는 관계자는 “선수가 계약이나 금전 같은 복잡한 문제로 시간과 정신을 소모하지 않고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에이전트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했다. 

에이전트는 야구 규약과 계약서 조항, 옵션의 유불리 등을 살펴 선수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한다. 구단 혹은 다른 상대와 법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선수 측을 대변하며 세금신고 등 세무 관련 문제를 돕는다. 선수의 가치를 높여 더 좋은 계약과 스폰서를 따내는 것도 에이전트의 업무다. 하나같이 선수 혼자 해결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앞의 관계자는 “물론 스타 선수에게도 에이전트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소외되고 힘없는 선수들에게 더 필요한 존재”라고 했다.

선수협 출신 야구 관계자는 “에이전트 라이선스를 관리하는 선수협이 더 철저하게 ‘불량 에이전트’를 솎아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C씨만 해도 과거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선수들에게 피해를 끼쳤지만 에이전트를 계속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문제 에이전트를 제때 단속하지 못한 결과로 선수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됐다”고 비판했다. 에이전트 업계의 자정 노력도 중요하다. 한 구단 관계자는 “에이전트라면 선수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선수에게 큰 계약을 안겨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이전트 개인의 욕심이 앞서선 안 된다”고 주문했다.

선수들이 에이전트를 선택하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에이전시 업계를 잘 아는 관계자는 “야구 용품 공짜로 준다고, 혹은 술 사준다고 에이전트를 맡기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선수를 술자리에 불러낸 뒤 정체가 불분명한 지인이나 사업가, 연예계 관계자를 소개하는 에이전트도 있다. 이는 선수를 보호해야 할 에이전트가 오히려 선수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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