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서도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던 코카콜라에 일격을 가한 중국 토종 음료가 있다. “전 세계 부동의 1위 코카콜라의 아성을 무너뜨린 대사건이 중국에서 일어났다.” 2008년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보도한 이 사건의 주인공은 중국의 지방 브랜드에 불과했던 ‘왕라오지(王老吉)’. 이 음료는 지난 2008년 단일품목으로 중국에서 매출 100억위안을 돌파하며 코카콜라의 불패 신화를 깨버렸다. 중국에서 코카콜라 판매량의 2배가 넘는 600만t의 차(茶)를 판매하며 코카콜라를 따돌리고 중국 음료 시장의 최강자로 등극한 것이다. 코카콜라를 앞지른 2008년 이후 중국 음료 시장에서 10년 연속 1위를 달리는 왕라오지의 현재 로망은 전 세계에서도 코카콜라를 따라잡는 것이다.
2008년 이후 10년 연속 중국 1위 음료
현재 왕라오지는 ‘중국 소비자 만족도 1위’ 음료로 평가받으며 인민대회당 연회전용 차 음료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이제 중국의 고급 연회석에서 마오타이, 중화 담배와 함께 더불어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됐다. 2014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허브티 브랜드’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른 왕라오지는 1828년 농부였던 왕택방(王澤邦)이 창시했다. 중국의 국민음료로 등극한 왕라오지는 본래 차게 마시는 ‘량차’의 시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량차는 끓인 차를 식혀 시원한 상태에서 마시는 냉차라는 개념보다는 몸의 열을 내린다는 차의 기능성을 부각해 붙여진 이름이다. 왕라오지도 덥고 습한 광둥(廣東) 일대에서 해열과 해독을 위해 마시는 대용차(代用茶)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실제 과거 광둥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왕택방이 만든 차를 마시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나라 도광제(道光帝)는 의사도 아니었던 왕택방을 국의로 임명했다. 왕택방은 더 많은 사람에게 차를 알리기 위해 1837년 량차 전문점을 열었다. 그가 만든 왕라오지는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아편을 단속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광둥에 내려온 흠차대신(欽差大臣) 임칙서(林則徐)도 왕라오지 덕을 봤다. 풍토병에 걸려 더위를 먹고 기침을 호되게 하던 그에게 명의가 처방한 약을 여러 날 복용시켰지만 효과가 없다가 우연히 왕라오지를 마시고 나서야 병세가 좋아진 것이다. 그가 왕택방에게 상을 내렸다는 일화도 있다.
광둥에서 대를 이어 점포를 늘려가던 왕라오지는 왕택방의 손자가 1870년 홍콩에 량차 전문점을 열면서 국제무대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홍콩의 왕라오지는 왕택방의 5대손인 왕건의(王建儀)가 운영하며 30여 국가에 왕라오지 상표를 등록했다. 1949년 신중국이 대륙에 들어서자 광둥의 왕라오지는 국유화된 후 광약집단(廣藥集團)에 귀속됐다. 중국과 홍콩이라는 이질적인 정치체제 속에서 왕라오지의 소유권자가 둘이 된 것이다.

왕라오지는 몸의 열을 식혀주는 약효가 뛰어난 차였지만 광둥성을 넘어 전국에 알려진 것은 홍콩 자본이 투입된 이후다. 196년을 이어온 장수기업임에도 전국적인 유명 브랜드로 올라선 시점은 불과 22년 전부터다. 지방 브랜드에 불과했던 왕라오지가 코카콜라를 넘어 중국 1위의 음료로 성장한 계기와 동력이 중국 내 상표 소유권자인 광약집단이 아니라 홍콩 자본 덕분이었다는 얘기다. 왕라오지를 성장시킨 회사는 홍콩 홍도집단(鴻道集團)의 진홍도(陳鴻道)가 왕택방 5대손인 왕건의와 의기투합해 1990년에 설립한 자회사 가다보(加多寶)다.
사실 중국판 왕라오지는 국유화 이후 적자가 누적되던 상태였다. 광약집단은 직원 월급을 지급하기도 힘든 상태에서 그 당시 국영기업답게 팔리거나 말거나 타성적으로 왕라오지를 생산했다. 풍찬노숙하던 왕라오지를 찾아온 홍콩회사 가다보는 구세주였다. 가다보는 중국 진출을 위해 중국 국내 상표 소유권자인 광약집단과 1995년부터 15년 동안 ‘왕라오지’ 상표를 빌려 독점 사용하기로 계약했다.
1999년 가다보는 광둥성 둥관시 장안진에 첫 번째 공장을 지었다. 왕라오지를 중국 전역에 알리기 위해 가다보는 6년 동안 대규모 투자를 했지만, 판매 실적은 크게 호전되지 않았고 연 매출 1억위안에 머물렀다. 왕라오지는 광둥과 저장 남부지역에만 알려진 지방 브랜드가 되어 전국 브랜드로 좀처럼 뜨지 못했다.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가다보의 진홍도는 중국에서 음료와 스낵으로 연 매출 200억위안을 올리는 펩시를 주목했다.
펩시는 중국에서 채널과 지역을 세분하여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벤치마킹으로는 한계를 느낀 진홍도는 펩시의 임원 6명을 고액연봉을 주고 모셔왔다. 이후 펩시의 독특한 마케팅 체계를 복제해 적용했다. 졸지에 6명의 임원을 빼앗긴 펩시는 본사 차원에서 왕라오지를 아예 인수할 작정을 하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륙의 코카콜라를 꿈꾸는 진홍도는 펩시의 후한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오히려 가다보 직원을 펩시로 보내 선진 판매기법을 배우게 하며 내부강화에 힘썼다.
내부 전열을 가다듬은 가다보는 기후와 음식문화 차이가 커서 그동안 뚫지 못했던 북방시장 진출 계획을 세우다가 자신들이 간과한 왕라오지 확장 한계요인을 찾아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중국인의 상식에 반하여 왕라오지는 너무 달았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약과 차 사이에서 그동안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 약점을 뒤늦게 깨달은 가다보는 기능성 음료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펩시의 게토레이 판매전략을 숙지한 가다보는 아팠을 때 치료를 위해 마시는 약이 아니라 평소 매운 음식을 먹거나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몸에 열이 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는 건강 기능성 음료로 왕라오지의 콘셉트를 바꿨다.
‘열나기 전에 왕라오지를 마시자’라는 명확한 기능성 음료 개념을 가진 광고 문구를 가다보는 2002년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약에서 차로 새롭게 포지셔닝한 왕라오지는 2002년 매출액 1억8000만위안으로 전년도 대비 80%의 신장률을 보였다. 왕라오지 탄생 174년 만에 최고 매출을 올린 것이다. 행운도 따랐다. 2003년 광둥에서 발생한 사스가 중국 전역을 휩쓸자 몸에 열을 내리는 왕라오지가 사스와 함께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2003년 6억위안의 매출로 뛰어오른 왕라오지는 2004년에는 매출 14억3000만위안을 기록했다.
쓰촨대지진 때 1억위안 기부로 국민음료 돼
량차 시장을 독주하는 왕라오지를 견제하려고 코카콜라는 홍콩에 있는 건강공방(健康工房)을 인수해 미려원(美麗源)과 청량원(淸凉源)이라는 량차를 만들어 중국 시장에 출시했다. 하지만 코카콜라보다 더 오래된 배합비법을 가진 왕라오지를 가로막기에는 코카콜라의 차에 대한 내공은 너무나 빈약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개념으로 펩시의 지원사격도 있었다. 강력한 지원군을 확보한 왕라오지의 매출은 2007년에는 50억위안을 기록하며 코카콜라를 바싹 추격하게 됐다.
2008년 5월 규모 8.0의 대지진이 쓰촨성에서 발생했다. 사망자만 6만9000명이 넘는 대참사였다. ‘2008 대지진 모금 연회’ 생방송에 나온 가다보는 무려 1억위안을 기부했다. 광둥 지방의 지역 음료 회사에 불과한 가다보가 중국에 진출한 세계적 대기업들을 전부 제치고 최고의 지원금을 쾌척한 것이다. 이후 중국 전역에서 ‘왕라오지를 보이는 대로 모두 마셔버리자’라는 응원 글이 쇄도했다. 코카콜라 브랜드 가치의 800분의1에 불과했던 왕라오지는 그해 여름 천하무적 코카콜라를 2위로 밀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