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남중국해 세컨드토마스숄에 배치한 시에라마드레 군함. photo 뉴시스
필리핀이 남중국해 세컨드토마스숄에 배치한 시에라마드레 군함. photo 뉴시스

지난 6월 4일 아시아타임스는 남중국해에서 미·중 간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필리핀이 갑자기 전쟁의 한복판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1914년의 순간’이 들이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14년의 순간’은 1차대전 직전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전쟁 당사국들이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전쟁 속으로 걸어 들어간’ 상황을 뜻한다. ‘투키디데스 함정’ 이론이 강조하듯 무력시위나 군사 위협 같은 중대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늘 하던 방식(business-as-usual)’이 대규모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일상화된 중국의 필리핀 괴롭히기

실제 남중국해 일대에서 필리핀을 중심으로 새로운 위기가 조성되는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의 ‘일상적 괴롭힘’이다. 어선들을 겁박하여 쫓아내기, 물대포로 다른 선박들 공격하기, 중국 해안경비대와 해군 함정들이 떼를 지어 다른 나라 선박을 ‘질식시키기’ 등의 괴롭힘은 지난 10년 동안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중 경쟁보다 남중국해의 이러한 상황이 분쟁의 도화선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평가한다.

중국은 올봄부터 필리핀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조업하는 필리핀 선박들에 대한 괴롭힘의 강도를 한 단계 더 높이기 시작했다. 필리핀 서부 해안에서 약 105해리(약 200㎞) 떨어진 작은 섬인 ‘세컨드토마스숄’(대만·필리핀·베트남·중국이 서로 영유권 주장)에 위치한 필리핀 전초기지에 대한 보급을 100척 이상의 중국 해안 경비대와 소위 ‘해양 민병대’ 소속 함정들이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최근 들어 세컨드토마스숄 일대에 배치된 중국 해군 함정의 숫자가 2배로 증가하기도 했다. 또 필리핀에 더 가까운 또 다른 작은 환초인 ‘사비나숄’ 주변에서도 중국은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괴롭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필리핀은 중국이 여기에도 또 다른 인공섬을 건설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중국 해안경비대 함정이 시에라마드레 군함에 접근하는 필리핀 보급함정에 물대포를 쏘고 있다. photo 뉴시스
중국 해안경비대 함정이 시에라마드레 군함에 접근하는 필리핀 보급함정에 물대포를 쏘고 있다. photo 뉴시스

필리핀의 폐군함 ‘알박기’

현재 세컨드토마스숄에는 ‘시에라마드레’라는 이름의 필리핀 해군 소속 군함이 있다. 이 군함은 1944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전차상륙함(LST)으로 건조했지만, 지금은 선체가 완전히 녹슬어 구멍이 숭숭 뚫린 폐기물에 불과하다. 필리핀은 1999년부터 이곳에 좌초된 시에라마드레함을 명분으로 10명 안팎의 해병대원을 상주시키고 있다. 폐기된 군함을 지킨다는 옹색한 명분으로 필리핀이 병력을 주둔시키는 이유는 중국 때문이다. 중국은 1995년부터 영유권 분쟁 지역인 스프래틀리군도에 위치한 ‘미스치프리프’라는 이름의 암초에 일방적으로 군사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자 필리핀은 이에 맞서 미스치프리프에서 불과 40㎞ 떨어진 세컨드토마스숄에 1997년 시에라마드레호를 고의로 좌초시켰고 이 폐선을 필리핀 해군의 정식 군함으로 등재했다. 이후 시멘트·철강·케이블 등으로 시에라마드레를 모래톱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해 8월 홈페이지의 대변인 명의 입장문에서 스프래틀리군도에 좌초된 시에라마드레함을 즉시 예인하라고 필리핀에 요구했다. 그 일대의 분쟁 수역을 총 한 방 쏘지 않고 차지하려던 중국 입장에서는 시에라마드레의 ‘알박기’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월 19일 시에라마드레에 주둔하던 필리핀 해병대원들이 근처에 나타난 중국 해안경비대 소속 고무보트 함정에 총기를 겨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필리핀 당국에 의하면 자국 해병대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공중 투하한 보급품을 중국군이 탑승한 고무보트가 시에라마드레에서 5m 떨어진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여 가로채려 했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자국 해병대가 무기를 꺼내든 것은 자위를 위한 ‘예방적 조치’이며, 이는 ‘교전규칙의 일부’라고 덧붙였다.

얼마 후 이번에는 시에라마드레 소속 해병대원 중에서 환자가 발생하여 필리핀 군이 의무후송을 시도하자, 중국군이 또다시 방해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싱가포르 라자라트남 국제대학원의 콜린 코 교수 같은 전문가는 이를 가리켜 “중국이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에 하지 않았던 행동”이라며, “중국이 (필리핀을 겨냥한) 보복조치의 도구상자(toolkit)를 확장하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무력행사에 이르지 않는 모든 것들로 도구상자를 확대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이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에 건설한 인공섬. photo 뉴시스
중국이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에 건설한 인공섬. photo 뉴시스

중국 표준지도의 황당한 영유권 주장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중국이 지난해 8월 말 ‘표준지도’란 것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중국은 인접국가들과 영토 분쟁을 벌이는 지역을 ‘몽땅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새 지도는 남중국해 거의 전 지역을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소의 혀(a cow’s tongue)’처럼 생긴 점선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역사상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규모의 영유권 주장이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국제무역의 규모는 매년 약 3조달러에 이른다. 또한 중국의 표준지도라는 것은 브루나이·말레이시아·필리핀·대만·베트남 등이 주장하는 영유권과도 겹쳐 있다. 이 지도에 표시된 점선은 중국이 그동안 ‘9단선’이라 불러온 점선에다 대만 주변에 점선 하나를 더 추가하여 ‘10단선’으로 만든 것이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그레고리 폴링 같은 남중국해 분쟁문제 전문가는 “남중국해에서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대만 일대보다 더 높다”며 “비록 핵전쟁으로까지 비화되지 않더라도 무력충돌이 벌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난해 12월 9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012년 4월 초~7월 말 벌어진 ‘스카보로숄’ 사태 때 필리핀이 어떻게 중국에 대응했는지를 조명했다. 당시 필리핀은 일단 불법조업을 벌이는 것으로 의심되는 중국 선박들을 쫓아내기 위해 군함을 보냈다. 이에 중국 선박들이 구조신호를 보내자 중국은 해양 감시선을 보내 대응했다. 쌍방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한 필리핀·중국 간 협상도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필리핀은 아세안(ASEAN) 등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청했다. 반면 중국은 양자 간 해결을 압박했다. 당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동맹조약상 의무를 언급하면서도 중국과의 갈등 고조를 원치 않음을 암시했다.

결론적으로 스카보로 위기는 필리핀의 대중국 정책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필리핀은 자국 EEZ에서 벌어지는 중국의 불법행위에 대한 공개적 비난, 호주·인도·일본 등 우방국들과 안보 파트너십 강화, 국방정책 혁신 등에 나섰다. 지난해 2월 14일에는 필리핀 정부가 성명을 통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지역에서 중국 해안 경비정이 필리핀 해안 경비정을 군용 레이저로 공격했다”고 비난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 성명에 의하면 레이저 공격으로 인해 필리핀 경비정(말라파스쿠아호)에 탑승한 일부 승무원이 일시적으로 실명했으며, 자국 EEZ 내에 위치한 세컨드토마스에 접근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성명은 중국 선박이 레이저를 2회 번쩍인 것 외에도, 필리핀 함정의 우현으로부터 불과 140m 떨어진 곳에서 ‘위험한 기동’을 했다고도 항의했다. 

지난 4월 워싱턴DC에서 열린 미국·필리핀·일본 3국 정상회담. photo 뉴시스
지난 4월 워싱턴DC에서 열린 미국·필리핀·일본 3국 정상회담. photo 뉴시스

필리핀의 전략 ‘대놓고 망신주기’

AP통신에 따르면 필리핀 정부는 분쟁 해역에서 중국의 행동에 대해 2022년에만 약 200건의 외교적 항의를 제기했다. 이에 대하여 SCMP는 필리핀의 대중국 전략이 ‘대놓고 망신주기(name and shame)’로 방향을 설정하자 대담한 전략에 중국이 흠칫 놀란 것 같다는 평가도 내렸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이 세컨드토마스 사건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 경제적 보복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필리핀 통계청이 발표한 ‘무역 및 투자 데이터’에 따르면 필리핀과 중국의 무역은 증가 추세다. 지난해 8월 세컨드토마스 부근에서 중국 해경이 필리핀 보급선에 물대포를 발사하여 일촉즉발의 위기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후 필리핀의 대중 무역이 20% 이상 반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상반기 0.38%에 불과했던 중국의 필리핀 투자도 지난해 3분기에는 6.76%로 급증했다. 또한 필리핀은 지난해 10월 재생에너지 산업 분야의 중국 장비 제조업체 두 곳으로부터 40억달러 상당의 투자를 유치했다. 더욱이 필리핀 외무부는 자국이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에 참여하고 있으며, 중국의 공식 자금을 지원받는 인프라 프로젝트가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앞으로 관건은 중국이 필리핀에 보복하기 위해 무역·투자를 어느 정도까지 무기화할 의향이 있느냐다. 그러나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보면, 경제난에 시달리는 중국이 갈수록 신뢰도와 매력이 떨어지는 무역 및 투자 파트너로 비치기를 원치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필리핀을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의 강력한 후원국을 자처하는 자국의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필리핀을 겨냥한 무역과 투자의 무기화는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지난해 초 남중국해 분쟁이 발발한 이후 필리핀이 중국으로부터 심각한 경제적 보복조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국이 추진하는 강압적 ‘회색지대’ 전략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미국에도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4월 26일 기사에서 “중국 억제를 위해 태평양에 새로운 무기·함정·군사기지로 이뤄진 그물망을 구축”하는 미국의 군사적 동향을 분석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제1도련선(쿠릴열도에서 필리핀까지 연결)과 제2도련선(일본 중부에서 파푸아뉴기니까지 연결)은 중국이 태평양 지역으로 도약하기 위한 ‘디딤돌’인데,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대만, 필리핀에 이르는 섬들을 연결하여 중국 해군이 제1도련선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양한 워게임 시나리오에 의하면 중국이 대만 침공을 결행하는 순간 미국이 개입하여 대만 점령을 막을 수 있는 ‘기회의 창’은 길어야 2주일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 4월 24일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950억달러 규모의 해외원조 패키지(우크라이나·대만·이스라엘 지원용)에 ‘태평양억제구상(PDI)’ 항목으로 81억달러의 추가 예산이 할당되었는데 PDI의 목표 역시 대중국 견제다.

이런 미국의 전략을 감안하면 필리핀이야말로 중국 견제에 필수적이다. 사실  필리핀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미국의 조약동맹국이다. 필리핀은 일본의 필리핀 점령 10주년이 되던 1951년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지만 1991년 상원이 미군기지 조차(租借) 연장안을 부결시켰다. 그러자 미국은 이듬해부터 필리핀 주둔 미군을 철수시켰다. 양국은 2014년 4월 미군의 군사기지 접근과 이용을 보장하는 10년 기한의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에 서명했고 미군은 22년 만에 다시 필리핀에 주둔을 시작했다. 2014년 합의에 따라 미군이 무기한 주둔할 수 있는 필리핀 군사기지는 당초 4개였는데, 지난해 새로운 EDCA 체결로 미군 병력·무기의 접근이 추가로 허용되어 필리핀 내 미군 기지가 9개로 늘어났다.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최근 필리핀이 9개 기지 외에 추가로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4개의 추가적 기지 제공 결정이 “남중국해 일대의 영유권 분쟁 지역에서 중국의 공격적 행동으로 인해 촉발된 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중국에 분명한 대립각을 세웠다.

 

대만서 140㎞ 떨어진 ‘필리핀 선봉부대’

필리핀 내 9개 미군기지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북부 카가얀주에 위치한 카밀로 오시아스 해군기지, 랄로 국제공항, 멜초 델라 크루즈 육군기지 등 3개소다. 지도에서 보면 카가얀주는 대만으로부터 불과 400㎞밖에 떨어지지 않아 유사시 신속하게 대만에 미 증원군을 파견할 수 있다. 특히 3개 기지는 유사시 항공기·함정 및 지상발사 미사일로 필리핀~대만을 연결하는 해협에 얼씬거리는 중국 함정·선박을 공격할 수 있다. 4개의 미군기지 중 한 곳인 발라바크섬은 중국과 필리핀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스프래틀리군도에서 지근거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다. 2023년 미국은 9개 필리핀 기지의 ‘인프라 투자’에 1억달러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올해에는 더 많은 자금이 할당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월 필리핀에서 가장 북쪽인 바타네스주의 마불리스에 위치한 해군부대를 방문한 길베르토 테오도로 국방장관은 이 시설을 ‘필리핀 선봉부대(spearhead of the Philippines)’라 불렀다. 대만 남단에서 이 부대까지 거리는 불과 140㎞다. ‘선봉부대’의 창 끝은 명백히 중국을 겨냥한다. 필리핀 국방장관이 공개적으로 중국에 도발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마르코스 대통령도 “만일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전적으로 중립적(totally neutral)’ 입장을 취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중국은 적잖게 당혹했을 것이다. 불과 한 달 전에 중국을 국빈 방문한 마르코스가 “전면적인 전략적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고, 양국이 “새로운 황금시대에 돌입할 것”이라고 말했던 뉘앙스와 전혀 딴판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필리핀의 ‘반중국 행보’가 중국이 그어 놓은 ‘잠재적 레드라인’을 넘어서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는 중국과 표면상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대만 문제에 대해서는 ‘엇갈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5월 워싱턴DC를 방문한 마르코스 대통령은 대만과 관련하여 미국이 추진하는 ‘통합 억제(integrated deterrence)’ 전략에 필리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필리핀 군 지휘부 인사들이 대만 유사시 미국·필리핀의 연합작전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과 달리, 마르코스 대통령은 필리핀의 국방태세가 주로 ‘방어적’이며 특정국, 즉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전략가들은 중국이 바시해협, 남중국해, 대만해협을 갈수록 ‘통합 전구(戰區)’의 일부로 취급하고 있다면서 필리핀도 이에 상응하는 전략적 대비태세와 포괄적 대응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스쿼드(Squad)’의 탄생이다. 지난 4월 워싱턴DC에서 역사상 최초의 미국·일본·필리핀 3국 정상회담이 열렸고 이 회담 직후 미국·일본·필리핀·호주가 참여한 4국 해군이 남중국해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공식적으로는 ‘해양협력활동(Maritime Cooperative Activity)’이라고 불리는 이 훈련은 지난해 11월 남중국해, 특히 세컨드토마스숄 일대에서 발생한 해상폭력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특히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지난 5월 초 호주·일본·필리핀 카운터파트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공식적으로 4국 모임을 가리켜 ‘스쿼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스쿼드’라는 새로운 개념에는 부분적이나마 ‘쿼드’ 회원국인 인도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깔려 있다. 인도는 올 1월로 계획되었던 쿼드 정상회의 연기,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규탄을 위한 유엔 총회 결의안 기권, 서방 측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와 돈독한 무역관계 유지, 미국의 선호에 반하는 러시아제 S-400 방공미사일 구매 등 쿼드의 결속력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들을 취해왔다. 일부 전문가들은 쿼드보다 스쿼드가 보다 효과적인 메커니즘이 될 수 있다고도 본다. 의심할 여지 없이 스쿼드는 필리핀에 대한 중국의 적대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필리핀 편에 서서 힘을 실어주는 시의적절하고 필요한 조치라 할 수 있다. 필리핀은 중국의 불법적인 해양 영유권 주장에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해 왔으며 상황의 안정적·효과적 관리를 위해 나름 가능한 모든 정치적·군사적 조치를 강구해 왔다. 처음에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성향에 회의적이었던 바이든 행정부도 이제 필리핀을 ‘중요한 민주주의 파트너’로 간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스쿼드 개념과 관련하여 2가지 중요한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선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필리핀은 대중국 봉쇄를 겨냥한 광범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에 다른 파트너들과 함께할 수 있는 군사적 역량이나 경제적 능력·의지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필리핀이 ‘아세안 중심성’에 충실하다는 점도 주목된다. 미·중 전략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 아세안이 지역협력 과정에서 중심적·주도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필리핀의 입장이다. 그런데 ‘아세안 중심성’의 핵심은 내정 불간섭, 컨센서스 기반의 의사결정, 미·중 사이에서의 균형 유지 등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리핀이 유의미한 방식으로 지역적 책임을 맡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곤란하다. 

둘째, 스쿼드에 주목하면서 쿼드를 비효율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많다. 세 번째 집권에 성공하여 ‘모디 3.0’ 시대를 개막한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러시아와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독자노선’과 함께, 잠재적 적대국인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여 미국 주도의 쿼드 참여를 외교정책의 초석으로 삼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인도 정부는 연기되었던 쿼드 정상회담을 올 하반기에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과 맞짱뜨면서 스타가 된 마르코스

이런 상황에서도 필리핀을 자극하는 중국의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놀랍게도 중국은 지난 6월 7일 필리핀에 세컨드토마스숄에 정박한 군함에 식량을 전달하거나 인원을 대피시키려면 “사전에 중국에 통보하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필리핀은 ‘황당·무뇌(無腦·nonsense)·수용불가’라며 중국의 주장을 일축했다. 특히 필리핀은 응급환자 수송을 방해한 중국군의 행동을 “국제해양법 위반뿐 아니라 기본적 인권도 무시한 야만적·비인도적 만행”이라고 규탄했다. 이처럼 필리핀이 중국과 맞짱뜨기를 주저하지 않자 마르코스 대통령은 일종의 ‘깜짝스타’가 되었다. 사실 40년 전 그의 부친이 권좌에서 축출된 후 마르코스 가문은 미국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었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대통령에 취임한 지 6개월 만에 기존의 유화적·굴종적 대중국 정책을 전면 수정하여 친미 노선으로 방향을 180도 바꿨다. 자국에 대한 무역의존도를 ‘무기화’하여 입맛에 맞지 않는 약소국들에 대한 괴롭힘을 일삼던 중국이 필리핀 응징·보복에 주저하는 모습은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다. 

미국에서 마르코스의 신분이 ‘떠오르는 스타’로 수직 상승된 것도 역설적이지만 중국 덕분이다. 어느덧 필리핀은 ‘불침 항공모함’으로 불리는 대만을 좌우로 연결하는 제1도련선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중심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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