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도 신기하지 않아요? 대통령이 정국 구상 겸 휴가를 갔고 그 사이 김경수 전 지사 복권 이야기가 나왔는데, 휴가 첫 방문지가 통영이잖아요.”
국민의힘 한 당직자는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와 메시지에 정치적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투로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여름 휴가 첫날인 지난 8월 5일 경남 통영중앙시장을 찾았다. 대통령의 휴가는 ‘정국 구상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휴가를 떠난 대통령이 자신의 머릿속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 중에는 8·15 광복절 특별사면 명단도 들어있었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휴가를 보내는 동안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복권 이야기가 정치권을 세차게 때렸다. 김 전 지사의 고향은 경남 고성이다. 통영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이웃한 곳을 윤 대통령이 찾은 셈이다.
김 전 지사는 지난 8월 13일 정부 발표로 공식 복권됐다. 이번 복권으로 그는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친노(친노무현계)와 친문(친문재인계)의 적자라는 유산도 지녔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한 죄인이라는 오명도 가진 정치인이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드루킹 사건을 “사실상 국기 문란과 비슷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한국의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되게 약하다. 갈등을 풀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굉장히 떨어진다. 대신 절차적 민주주의는 후발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국가다. 대통령선거를 통해 권력교체가 주기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모범적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파괴한 행동이었다.” 이런 상반된 평가를 모두 껴안은 김 전 지사는 이번 복권으로 정치적 재기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윤·한 모두에게 이용된 ‘김경수 복권’ 카드
현직 정치인 중 김 전 지사의 포지션은 독특하다. 민주당은 ‘노무현 시대’를 거치며 호남 정당을 벗어나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전국 정당으로 변모하는 데 성공했다. 민주당의 이념적 스펙트럼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중도에서 보다 왼쪽으로 지평을 넓히며 지지 기반을 확장해온 게 사실이다. 진보정당의 의제를 끌어와 내부에서 소화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점도 이때부터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를 그대로 물려받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지평을 넓힌 이와 이를 계승한 이의 조합에서 보듯 친노와 친문은 지금의 민주당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이다. 그리고 민주당 진영의 잠룡 중 유일하게 김 전 지사만이 이 두 세력을 모두 꿰뚫는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아끼는 핵심 측근이다. 양 진영을 모두 아우르며 교집합의 중심에 선 김 지사를 두고 친문 진영에서는 차기 혹은 차차기 대선 후보감이라고 봤다. 친문 지지층을 승계할 수 있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평가대로 비문 정치인들에게서도 호감을 살 수 있는 카드라는 것이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드루킹 사건’이다. 2021년 7월 21일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서 그의 정치생명도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성폭행 의혹으로 차기 구도에서 이탈한 뒤 그다음 주자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온 친문 진영은 좌절했다.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김경수의 복권’은 여야 양측에서 어느 정도의 파열음을 냈다. 다만 여당 내 소리가 더 컸다. 총선 뒤 윤 대통령과 손을 맞잡으며 당정일체를 강조하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김 전 지사 복권에 강한 불만을 표했고 대통령실은 그런 한 대표의 태도에 “선을 넘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대표의 불만을 두고는 해석이 분분하다. 가장 손쉬운 해석은 정치공학적 풀이법이다.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을 내세우며 외연 확장을 꾀하는 한 대표의 시도에 김 전 지사 복권이 걸림돌이 되기에 불만을 가졌다는 얘기다.
이는 대선을 중심에 둔 관점인데, 그것보다는 오히려 윤 대통령과 한 대표 모두 자신의 정치적 입지 확장에 김 전 지사 복권을 활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계파색이 옅은 한 국민의힘 의원의 풀이는 이랬다.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도, 한 대표도 김 전 지사가 복권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이번 광복절 사면 대상자 중 정치인은 29명이다. 이 중 야권 인사는 김 전 지사가 유일하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 등으로 유죄를 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도 이번에 사면·복권됐다. 같은 사건에 연루돼 유죄를 받은 조현오 전 경찰청장도 복권됐다. 박근혜 정부 인사들도 명단에 올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조윤선 전 정무수석이 사면·복권됐고, 화이트리스트 사건의 현기환 전 정무수석,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이 복권됐다.

여당의 파열음은 민주당으로 옮겨 간다
김 전 지사의 사면이 먼저 이뤄지고 복권이 뒤로 미루어졌을 때부터 ‘복권’이 정치적 복안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지적은 이미 있었다. 차기 대권 잠룡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해, 또는 ‘이재명 대항마’라는 구도가 뚜렷한 한 대표의 위치를 약화하기 위해 김 전 지사의 복권 카드가 쓰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앞선 의원은 이번 사면 복권을 두고 “오히려 보수 내부에 내민 화해의 손짓”이라고 해석했다. “과거 윤 대통령이 수사한 이들이 적지 않은데 검찰에 있을 때 감옥으로 보냈던 이들을 대통령이 돼서 다 제자리로 복귀시킨 것과 다름없다. 사면·복권 뒤에 이명박 대통령과 관저에서 식사를 한 것만 봐도 보수 화합의 의도가 보인다. 야권 분열 시도도 없진 않겠지만 그것보다는 정통 보수에 손을 내민 것이라고 봐야 한다. 여기에 한 대표가 김 전 지사를 타깃으로 삼으면서 모든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고 김 전 지사가 나머지 명단의 방패막이가 됐다. 한 대표가 결과적으로 도와준 셈이다.”
민주당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온다. 이동학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모욕적이고 나쁜 복권”이라고 평가했다. “자신이 잡아넣은 사람을 그냥 풀어주기에 면이 안 서니 김 전 지사를 사면과 복권, 두 번으로 갈라서 활용한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부부 만찬 때 선물 보따리를 가져간 것 아닌가. 모욕적이고 나쁜 복권이다.”
한 대표도 나름 얻은 것들이 있다. 윤 대통령의 그늘 아래 있다가 지금은 독자 영역을 모색하는 위치에 선 한 대표다. 그가 김 전 지사 복권에 반대하며 내세운 건 첫째는 소신이었고 둘째는 당심이었다. 특히 국민의힘 지지층 다수가 김 전 지사의 복권에 회의적인 상황에서 당내 다수 여론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이는 건 당 장악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분히 정무적인 접근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단기적으로는 여당에 파열음을 일으킨 김 전 지사의 복권은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당의 문제가 된다. 그곳에선 김 전 지사가 움직이길 바라는 자, 바라지 않는 자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전 대표가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 복권을 요청했다고 설명하고 여기에 여권 관계자가 “그런 부탁 받은 적 없다”라고 잘라 말하며 진실 공방이 벌어진 것도 김 전 지사라는 존재가 ‘이재명 일극 체제’로 굳어가던 민주당의 당내 역학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친문 세력이 김 전 지사를 구심으로 삼아 재기를 꿈꿀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마냥 허황된 것은 아니다. 친문과 궤를 같이하는 친노의 경우 이런 ‘부활의 경험’을 갖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끝난 뒤 ‘폐족’이라고 언급됐던 친노는 2선으로 후퇴해야 했지만 불과 3~4년 뒤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다. 정부가 빠르게 지지를 잃었다. 둘, 지방선거의 승리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당세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는데, 특히 친노로 분류되는 안희정·이광재·김두관 세 후보가 충남·강원·경남 도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게 컸다. 셋, 당 밖 친노 그룹의 활동이다. 이들 원외 친노는 2012년 총선을 앞두고 ‘혁신과 통합’이라는 그룹을 만들었고 야권이 합쳐야 한다는 대명제 아래 민주당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당의 주류로 복귀할 수 있었고 ‘노무현의 비서실장’이었던 문 전 대통령은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올랐다.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세력화 될 듯”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공고하고 김 전 지사가 뛸 환경과 공간이 없다. 그래도 김 전 지사가 과거의 친노처럼 지리멸렬해 가는 친문·비주류의 구심으로 기능해 이 전 대표의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기대가 당 일각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뒤섞인 전망을 반영하듯 접촉해 본 친문 인사들의 의견도 혼재돼 있었다.
“본인이 결정할 문제니까 내가 가타부타할 것은 아닌데, 어떤 형태로든 선거에 나오지 않겠나. 도지사를 한 번 했기 때문에 지방선거보다는 대선에 출마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전 대표는 재판을 받고 있는 처지고 만약 유죄가 확정되면 피선거권이 박탈된다. 조국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이 오면 김경수도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다. 정치인 김경수의 역량이 그렇게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전 대표 재판 결과에 따라 그것도 결정된다고 봐야 한다.” (전 민주당 중진의원 A씨)
“김 전 지사는 중요한 정치적 자원이다. 그만한 역량과 경력이 있다. 김경수라는 유력한 인물이 정치를 재개할 수 있는 상황이 됐으니 이재명 대표와 결이 달랐던 정치세력이 결집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력화되지 않을까.”(전 민주당 핵심당직자 B씨)
“김 전 지사와 연락을 해보진 않았다. 이제 막 복권됐는데 선거에 나올지 안 나올지 어떻게 알겠나. 11월에 귀국한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들어올 거다. 그 이후 상황들이 어떻게 돌아갈지 봐야 하기 때문에 (그의 대선 출마를)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다.” (민주당 전 의원 C씨)
민주당 내에서는 김 전 지사의 성격이나 당내 정치 환경으로 볼 때 그가 곧장 정치 행보를 재개할 가능성을 낮게 본다. 김 전 지사는 진중하다. 과거 문 전 대통령은 김 전 지사를 “사려 깊고 침착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그의 성품은 때로 권력의지가 약하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이 전 대표와 충돌할 여지가 적다고 보는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반대로 이런 김 전 지사가 기지개를 켤 수 있는 경우의 수도 있다. 대외 환경의 변화다. 하나는 정치적 명분이다. 차기 당 대표가 유력한 이 전 대표 쪽과 노무현의 가치나 문재인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서로 충돌할 때다. 최근 실용주의로의 전환을 꾀하는 이 전 대표의 감세 기조도 그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충돌 지점 중 하나다. 대선까지 긴 호흡으로 내달리는 이 전 대표가 앞으로 꾀할 변화 중에서 김 전 지사나 친문 진영의 임계치를 넘어서는 것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전 대표의 경쟁력이다. 이는 사법리스크와 연결된다. 이 전 대표가 받고 있는 재판 가운데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은 이르면 10월에 1심 결과가 나온다. 만약 여기서 유죄 판결이 나오고 그의 경쟁력에 빨간불이 들어온다면 김 전 지사 입장에서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민주당의 한 수도권 재선의원은 “김 전 지사의 스타일이라면 경쟁보다는 협력이다. 적이 없는 스타일이라 이 전 대표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은 걸로 안다. 김 전 지사의 강점은 이 대표의 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
김 전 지사의 강점은 PK라는 지역 기반이다. ‘PK 출신 후보’는 민주당 대선 승리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반면 이 전 대표는 상대적으로 PK 소구력이 약하다. 이 전 대표에 대한 비토가 상대적으로 강한 곳이 PK다. 전국적으로 민주당이 압승한 4월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PK에서 지역구 40곳 가운데 34곳을 지켜내며 직전 총선보다 오히려 1석 더 얻어내는 결과를 냈다.
이곳에서 민주당 주류를 차지하던 친노·친문 대신 최근 치러진 부산·경남·울산 시도당위원장 경선에서는 친명 인사들이 승리를 거뒀다. 민주당 시도당위원장은 광역단체장 외 지자체장, 기초의원, 광역의원 등의 공천에 관여할 수 있고 시도당 조직을 관리한다. 지역 조직 기반에 핵심적 역할을 하기에 사실상 대선 레이스를 위한 복선이 깔린 셈이다. 이 때문에 PK에서도 중앙당의 주류 교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예상이 많지만 김 전 지사 복권으로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민주당 부산시당 관계자는 “김 전 지사는 드루킹 때문에 부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아까운 사람이라는 평가도 지역에서 적지 않게 듣는다”며 “잠잠했던 연락도 최근 다시 받기 시작했다. 김 전 지사가 복권된 이후부터 친노·친문 쪽 사람들이 어떻게 돼가는 거냐며 지역 정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변방으로 밀려난 호남의 대안 될까
호남의 선택에 주목하는 시선도 있다. 민주당의 ‘PK 출신 후보’는 대선 승리에 중요한 요소지만 하나가 더 추가돼야 한다. ‘호남이 간택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최근 이 지역에서는 ‘호남 정치 변방론’이 화두다. 호남이 민주당에서 변방으로 밀려 존재감을 찾기 힘들다는 지적은 최근 10년간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호남 출신 당 대표나 최고위원이 단 2명에 불과하다는 점이 방증한다. 이는 민주당 당원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다. 선거권을 가진 권리당원 124만명 가운데 호남 비중은 33%다. 인구 비중에 비하면 많은 편이지만 수도권은 그보다 더 많은 39.7%다.
이 전 대표는 지난 8월 4일 열린 호남지역 당대표 순회경선에서 낙승을 거두며 대세론을 재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광주(25.29%)·전남(23.17%)·전북(20.28%)의 지역 투표율이 모두 20% 초중반에 그쳤고 이곳에서의 득표율이 상대적으로 저조해 누적 득표율 90% 선이 무너졌다. ‘호남의 경고’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과거 홀대받거나 실망할 경우 호남은 대안을 찾아 헤맸다. 2016년 총선 때는 안철수의 국민의당에, 지난 4월 총선에서는 조국의 조국혁신당에 정당 투표를 몰아줬던 곳이다. 2002년 하위권이던 노무현 후보의 바람을 만든 곳도 호남이다. 김 전 지사에게 호남이 관심을 보일지 주목받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의 한 인사는 “김 전 지사는 종속변수다. 스스로 뭘 하기보다 주변 환경이 그를 끌어내야 움직일 것”이라며 “여론조사에서 드러내는 경쟁력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김경수’라는 이름이 얻을 숫자가 유의미하다면 상황이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다다. 독일에 체류 중인 김 전 지사는 11월쯤 귀국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