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코로나 이후부터 북한은 사실상 완전한 쇄국상태로 전환했다. 북한을 떠난 이탈주민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외국인이 북한에 입국하는 숫자 역시 2010년대 초반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김일성 시대 초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북한 당국이 발행한 지도 같은 가장 기본적인 자료조차 필자와 같은 북한 연구자에게는 매우 소중하게 여겨진다. 북한의 모든 지도는 당 중앙기관의 직접적 통제를 받으며, 또한 지도는 북한 지도부의 정책과 심리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서다.
최근 ‘레딧(Reddit)’이라는 미국 소셜미디어(SNS)에서 ‘2024년 북한판 세계 정치지도’가 공개됐다. 이 지도를 처음 공개한 사람은 중국인으로, 중국 인터넷을 통해 레딧에 업로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지도는 지난해 4월 북한의 공식 지도출판사에서 발행된 것이다.
남북으로 분리된 한반도
지도에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등 김씨 일가 3대(代)가 방문한 지역이 오각형 아이콘으로 표시되어 있고, 그들이 남긴 발언 등이 인용되어 있어 지도에 특정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최근 공개된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한반도의 모습이다.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 즉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는 구역은 명확하게 ‘한국’으로 표기되어 있다. 2024년 이전까지 북한은 예외없이 한반도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로 그려왔다.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기 전까지는 서울을 ‘수도’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3년 12월에서 2024년 1월 사이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통일을 포기하고 민족 개념을 폐기한다고 선언한 이후부터 북한은 사실상 대한민국을 별개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울릉도, 독도, 제주도, 그리고 마라도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북한은 ‘독도는 조선 땅’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독도(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조)는 ‘조선’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번 지도에는 그러한 표현이 없다. 이제 북한이 한국을 자신들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고 별개의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만큼, 향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등 관계개선을 위해 ‘독도(조)’가 아니라 ‘다께시마(우리 표기법은 다케시마)’란 표현을 사용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지도에서 보이는 우크라이나도 관심을 끈다. 지난 11년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두 번의 중요한 사건을 벌였다. 첫 번째 사건은 2014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러시아군이 크름반도를 점령하고 병합한 것이다. 그해 러시아가 지지하는 세력은 동부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를 점령하고,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를 세웠다.
두 번째 사건은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려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 9월에는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 루한스크주, 자포리자주, 헤르손주 등 총 4개주를 러시아에 합병한다고도 선언했다. 물론 러시아는 이들 4개 주의 일부만 점령했을 뿐, 100% 실효지배하는 주는 하나도 없다.
그간 북한 김정은 정권은 러시아의 푸틴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2022년 러시아에 병합된 크름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 4개주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해 왔다. 지난해 4월 발간된 이 지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년이 지난 시점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지도에서 크름반도는 러시아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지만, 정작 우크라이나 동부 4개주 전체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영토로 표기돼 있다.
사실 북한 당국은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보인 바 있다. 2014년 크름반도 병합 직후 북한은 이를 공식적으로 러시아 영토로 인정했지만,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중앙년감’의 유럽 지도에서는 크름반도를 러시아 땅으로, 아시아 지도에서는 우크라이나 땅으로 각각 다르게 표기했다. 이는 유럽 지도 제작을 담당한 부서에는 당 중앙의 지도변경 지시가 하달됐지만, 아시아 지도를 담당한 부서에는 그런 지시가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10월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전에 제작된 이 지도 역시 비슷한 까닭으로 추정된다. 북한 당국이 해당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했지만, 출판사나 지도제작 부서에까지 구체적인 지시가 하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북한 당국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대외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실제 러시아군이 거둔 ‘성과’에 대해 그다지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대만과 관련한 표기 역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19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대만을 단 하루도 실효 지배한 적이 없지만, 건국 초기부터 현재까지 대만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해 왔다.
북한은 그간 같은 공산주의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장을 지지해 왔으며, 이번 지도에서도 대만은 중국 영토로 표기돼 있다. 실제 대만 국민들도 북한을 방문할 때 국적을 ‘중국 대북(中國 臺北)’이라고 표시한다. 이는 올림픽에서 대만팀이 사용하는 ‘차이니즈 타이베이(Chinese Taipei)’라는 명칭과 유사하다.
한국·일본·미국 같은 색깔
한국과 일본, 미국을 동일한 색깔로 표시한 부분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지도를 그릴 때 지켜야 할 대원칙 중 하나는, 국경선이 있는 나라는 서로 다른 색깔로 구분해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색으로 표시하면 국가 간 구별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4년 북한에서 제작한 지도는 이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모두 회색으로 표시돼 있어, 동아시아 지리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이 보면 두 나라를 같은 국가로 오해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미국 역시 동일한 색깔로 표시돼 있다. 이러한 색깔에는 정치적 의미가 명확히 담겨 있다. 북한이 규정하는 ‘주적’은 바로 ‘미제 승냥이, 일제 군국주의자 그리고 한국 괴뢰’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을 일본과 같은 색깔로 표현한 것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하던 일제강점기 지도를 연상시킨다. 당시 일본제국의 일부였던 조선반도는 일본 본토와 같은 색으로 그려졌다. 북한 내부에서도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과거 김정일의 어린 시절 이야기 가운데는, 지도상에 조선반도가 일본 본토와 같은 색으로 표시된 것을 보고 분노한 김정일이 조선반도를 다른 색깔로 칠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이 한국과 일본을 같은 색깔로 표현한 것은 ‘우리는 자랑스러운 자주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너희 한국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와 다름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