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무원 이모(20대)씨는 야간 당직 때마다 정치적 주장 일색의 민원 전화를 받는다. 보통 30분 이상 이어지는 막무가내식 통화에 이씨는 “수화기를 그냥 책상 위에 내려놓고 버틴다”고 털어놨다. 그는 “매일 이 같은 민원 전화가 한 통 이상씩 온다”며 “어느 날은 정부 여당 지지자, 또 어떤 날은 야당 지지자다. 정책 민원도 아니고, 업무와는 관련 없는 정치 이야기를 한참 동안 쏟아낸다”고 말했다.
공무원 최모(20대)씨 역시 무분별한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최근 지역사랑상품권 할인 정책과 관련된 민원이 폭증했다고 말했다. “정부 예산 추경으로 상품권 할인율이 올라가면서 수요가 몰렸는데, 경쟁이 치열해 구매에 실패한 시민들이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붓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최씨는 “‘왜 내가 못 샀냐, 니들이 책임져라’라며 고성을 지르는 식이 이어져 정신적으로 소진된다”며 “민원이라기보단 화풀이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모든 민원 ‘일단 접수’
공무원, 경찰, 교사 등 공공부문 일선 인력들이 악성 민원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며 극심한 감정노동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단순 문의나 건의가 아닌, 공공행정으로 인해 발생한 고통이나 부당함에 대한 문제제기에 해당하는 ‘고충민원’은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집계한 고충민원 분야별 접수현황을 보면, 교통·환경·복지·보건 등 17개 항목 가운데 매년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한 것은 ‘기타’ 항목이었다. 특히 2024년 기준 교통 분야 민원이 1441건으로 가장 많았지만, ‘기타’로 분류된 민원은 2만7031건에 달해 약 18.7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분류되지 않는 민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에 대해 한 관계자는 “내용이 복합적이거나 감정적, 정치적 성격을 띤 민원이 다수 포함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에는 단순 폭언과 욕설을 넘어 허위 주장이 섞이거나 정치적 성향을 띠는 민원이 증가하는 양상이다.
우리나라 민원 처리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국민신문고를 중심으로 통합 운영된다. 국민신문고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가 전자민원 플랫폼으로, 경찰·지자체·교육청·공공기관 등 거의 모든 행정기관의 민원을 한 곳에서 접수·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민원인이 온라인으로 신청서를 작성하면 자동으로 관련 기관에 분류·이송되며, 처리 상황은 문자나 이메일로 실시간 안내된다. 이 시스템은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 ‘전자정부법’ 등에 근거해 운영되며, 동일하거나 반복적인 고질 민원은 국민권익위원회가 직접 조정·관리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론 ‘조정 요청’ 수준에 머물 뿐, 공통된 기준이나 일관된 대응 체계는 사실상 부재한 실정이다. 국민권익위가 시정 권고 또는 의견표명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민원의 종료와 제한과 같은 강제적 제재 권한은 부여되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시스템은 무분별한 악성 민원을 걸러내지 못한 채 한국사회를 ‘민원공화국’으로 만들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간 공공기관 민원담당자 109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6.3%가 최근 3년 내 악성 민원을 겪었다고 답했고, 한 명이 평균 5.5명의 악성 민원인을 상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응답자의 90.8%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했으며, 실제 법적 조치로 이어진 경우는 불과 4.9%에 그쳤다. 경찰청에 따르면, 민원인에 의한 ‘위법행위’는 3년 만에 4배 이상 증가했다. 2021년 2997건에서 2022년 5218건, 2023년 1만323건을 거쳐 2024년에는 1만2601건으로 급증했다. 이 가운데 폭언이 전체의 87.4%를 차지하며, 폭행·기물파손·스토킹 등 신체적 위협을 동반한 사례도 꾸준히 늘고 있다.
지자체마다 AI 기반 스마트 행정 전화 등 악성 민원 전용 대처 매뉴얼을 만들고, 안전요원 배치 등 대응 매뉴얼 강화에 나서고 있지만, 현실적 효과와 통일성 부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행정안전부는 2022년 ‘민원처리법’과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통해, 민원공무원의 보호를 위한 조치를 법적 의무로 명시했다. 이에 따라 2023년부터 모든 행정기관은 민원실에 CCTV, 비상벨, 안전가림막 등 안전장비를 설치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하도록 규정됐다.
그러나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박정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9월 10일 각 지자체로부터 제출받은 지자체별 ‘안전요원 배치 현황’ 자료에 따르면, 행정복지센터 내 직원 보호를 위한 안전요원 배치 실태는 지역별로 극심한 편차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권 5개 자치구 96개 센터에는 45명의 안전요원이 배치됐지만, 광주 동구는 13개 센터 모두에 인력이 전무했고, 남구는 17명의 요원이 9개 센터를 담당하고 있는 반면, 광산구는 21개 센터 중 단 1곳에만 1명이 배치됐다.
해외는 직원 안전 확보가 우선
해외 선진국은 정책 기반의 일관된 대응 체계를 구축해, 민원인을 통제 대상이 아닌 민원 ‘과정’ 자체를 관리 대상으로 삼고 조직과 직원의 안전을 확보하고 있다. 반복적이고 집착적인 민원을 공공 행정 시스템 안에서 통제 가능한 행위로 정의하는 것이다. 또한 악성 민원을 방치할 경우 공직사회의 신뢰와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인식 아래, 민원 과정을 공공 자산으로 보고 이를 관리하는 관점이 제도 전반에 반영돼 있다.
예컨대 영국은 ‘비합리적 민원행위’에 대한 대응 절차를 공식 정책으로 문서화해 운영하고 있다. ‘비합리적 행동’과 ‘지속적인 민원 행동’은 구분하여 관리하는데, 이는 반복성과 행위 강도를 기준으로 한다. 비상식적 민원인에 대한 대응 절차는 ‘비공식 경고→공식 서면 경고→연락 제한→주기적 재검토’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이에 따라 민원인의 현장 방문을 제한하거나 특정 시간대에만 응대하는 출입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조치가 발동될 경우 그 사유와 기간, 이의 신청 절차를 포함한 서면 통지가 제공된다. 모든 제한 조치는 정기적인 검토를 통해 지속 여부를 판단하며, 민원인은 필요 시 이의제기나 옴부즈만제도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호주 역시 ‘연락관리계획’ 제도를 통해 악성 민원인의 연락을 특정 이메일, 우편 등 제한된 방식으로만 허용하거나, 대리인을 통해서만 연락하도록 하는 조치가 가능하다. 폭언, 스토킹, 위협적 행동 등 실제로 직원의 안전을 위험에 빠트리는 경우에는 서비스 접근을 완전히 차단하거나, 출입 금지명령 등 법적 조치를 통해 대응할 수 있다. 이 조치는 공식 서면 통지 이후 이루어지며, 필요 시 경찰 등 외부 기관도 연계할 수 있다. 특히 특정 케이스마다 정책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으며, 지침을 사용자인 공무원이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이 제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