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 밥상에는 풍요함이 담겨 있다. 추석 밥상에 오른 음식들은 사실 평상시에는 먹지 못했던 귀한 음식이었다. 21세기 현대인에게 추석 밥상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닌다. 굶주림과 싸웠던 시절의 조상들에게 음식의 풍요는 생존의 축복이었지만, 먹을 것이 넘쳐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건강 딜레마’로 다가온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대인 질병’들이 바로 이 풍요의 밥상을 자양분 삼아 몸속에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먹고 마시는 추석 연휴는 현대인의 질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기름진 음식과 과식, 장시간 앉아 있는 자세, 스트레스 등이 한데 엉키면서 각종 질병의 위험을 키우기 때문이다. 만병의 근원 ‘비만’으로 가는 고속도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2022년 비만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약 130만명으로, 2018년 대비 21.6% 증가했다. 특히 10대 환자 증가율이 5년 만에 182%에 달해 심각성을 더한다. 비만은 단순히 체중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몸에 지방이 축적되면서 호르몬 변화와 염증을 일으키는 질병이다. 민현준 원장(민현준 내과의원)은 “내장지방은 한번 쌓이면 빼기 힘들고 만성질환으로 이어진다”며 “과거에는 지방간을 병으로 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간경화나 간암 발생률을 높이기 때문에 질병으로 분류한다”라고 설명했다.
달콤한 유혹의 그늘 ‘당뇨병’
쫄깃한 송편은 추석의 꽃이다. 깨, 콩, 팥 등 다양한 소를 넣어 빚은 송편은 달콤한 맛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지만, 주재료인 쌀과 설탕은 혈당을 급격히 올리는 주범이다. 여기에 식혜, 수정과 등 달콤한 음료까지 더해지면 혈당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 30세 이상 성인 6명 중 1명(16.2%)이 당뇨병을 앓고 있다. 19~29세 젊은 층 당뇨병 유병률은 2012년 0.9%에서 2021년 2.4%로 2.6배 증가했다.
당뇨병은 전형적인 선진국형 병이다. 의학칼럼니스트 김공필씨에 따르면 1980년대 초만 해도 당뇨병 환자가 입원하면 의사와 전공의들이 구경하러 갈 정도로 희귀 질환이었다고 한다.
간장, 설탕, 갖가지 양념에 푹 졸여낸 갈비찜은 밥도둑이지만, 과도한 나트륨을 포함하고 있다. 맵고 짠 음식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식습관은 고혈압의 주된 원인이다. 2022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30세 이상 성인 4명 중 1명(26.8%)이 고혈압을 앓고 있으며, 이는 2012년 23.3%에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민 원장은 고혈압에 대해 “염분과 가공육은 혈압을 확실히 올린다. 혈압은 겉으로 티가 안 날 뿐이지 심장이나 콩팥 같은 장기들에 장기간 손상이 누적되면서 망가지게 된다”며 “혈관에 찌꺼기가 많이 쌓이면 고혈압이 생긴다”라고 설명했다.
전, 잡채, 갈비찜, 튀김 등 기름을 이용한 음식들이 가득한 명절 밥상은 고지방, 고콜레스테롤의 향연이다. 육류 위주의 식사와 잦은 외식, 그리고 명절 음식은 혈액 내에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을 쌓이게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2년 이상지질혈증 환자 수는 1300만명을 넘어섰다. 2018년 약 900만명이었던 것에 비해 4년 만에 40% 이상 급증한 수치다.
민 원장은 고지혈증에 대해 “고기만 먹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설탕, 술, 야식 같은 것들이 간에서 지방을 새로 합성하게 만들면서 고지혈증이 흔해진 것”이라며 “콜라 같은 단 음료가 중성지방을 가장 빨리 올린다”고 말했다.
‘영양실조’가 사라진 시대
인류의 역사는 곧 질병과의 싸움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끊임없는 영양 결핍과 싸워야 했고 춘궁기에는 보릿고개를 넘으며 굶주림에 허덕였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던 농경사회와 산업화 초기에는 콜레라, 천연두, 결핵 등 전염병이 창궐하며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질병들은 대부분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유례없는 ‘풍요의 시대’를 맞았다. 냉장고에는 늘 신선한 음식이 가득하고,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음식을 집 앞까지 배달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굶주림과 전염병의 위협은 크게 줄었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바로 ‘풍요’가 낳은 새로운 질병, 너무 많이 먹는 ‘생활습관병’이다.
풍요가 낳은 질병은 그 뿌리가 하나다. 현대사회에서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은 독립적인 질병이 아니다. 한국영양학회 홍경희 홍보이사는 이 모든 만성 질환의 뿌리가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사증후군(Metabolic Syndrome)을 지목했다. ‘대사’는 먹은 음식을 몸이 에너지와 재료로 바꾸는 과정이다. 이것이 제대로 안 되면 여러 질병이 동시에 발생한다. 홍 이사는 “옛날에는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을 따로 봤는데, 결국 뿌리는 하나”라며, 이는 “대사적 문제가 나타나는 증상들의 ‘증후군(증상의 집합)’이라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사증후군은 혈당과 혈압이 높고, 혈액 중 지질이 많으며, 복부 비만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은 ‘비만’, 특히 복부 비만에 있다는 것이다.
홍 이사는 “달고 짜게 먹는 것이 직접적 원인이 되는 게 아니라, 비만, 특히 복부 비만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복부 비만이 인슐린 저항성을 가져오면서 당뇨로 이어지고, 뱃살만 빼도 혈압이 내려가는 현상도 이 때문이다. 즉 “당뇨병이나 고혈압 식사 요법의 1순위는 ‘달고 짠 음식을 피해라’가 아니라 ‘뱃살 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부 비만은 단순히 체중이 늘어난 것과 다르다. 우리 몸의 체지방은 내장 주변에 쌓이는 내장지방과 피부 아래의 피하지방으로 나뉘는데, 질병을 유발하는 것은 주로 내장지방이다.
비만은 정신건강과도 관련이 있다. 오진승 원장(디에프정신건강의학과의원)은 “비만 환자들은 우울증·불안장애·수면장애 같은 정신질환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며 “비만이 자존감을 낮춰 정신건강을 악화시키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 원장은 환자들에게 음식 접근성을 줄이고 건강한 간식을 준비하라고 조언한다. 구체적으로 “배달 앱을 지우고, 집에 정크푸드를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충동적 폭식은 도리어 악순환을 부르기 때문에 계획된 보상 차원의 식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 “건강한 식습관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나 자신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는 것 자체가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