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에 전시된 수술로봇. photo 뉴스1
서울 도봉구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에 전시된 수술로봇. photo 뉴스1

K-팝, K-무비, K-푸드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세계가 주목하는 한류가 있다. 바로 K-메디컬(의료)이다. 한국의 의료 수준은 이미 세계 정상급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고난도 수술과 첨단 치료에서 한국은 선진국을 따라잡았고, 일부 분야에서는 앞서 나가고 있다. 우수한 의료 인력, 비교적 저렴한 진료비, 체계적인 진료 시스템, 짧은 대기 기간이 어우러져 한국은 세계 의료관광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통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작년 한 해 동안 의료관광 목적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은 202개국 117만명이었다. 2023년 61만명에 비해 약 2배 증가했다. 국가별로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60%(70만2000명)이고 미국인 8.7%(10만2000명), 대만인 7.1%(8만3000명) 순이다. 태국인 등 동남아시아인도 9.6%(11만2000명)에 이른다. 진료 분야는 피부과(56.6%)가 가장 많고, 성형외과(11.4%), 내과 통합(10%), 검진센터(4.5%) 순이다. 

이들 외국인 환자는 단순히 ‘싸고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을 찾지 않는다. 한국 의료가 제공하는 높은 치료 성공률과 회복률, 그리고 데이터 기반의 체계적인 관리가 그 배경이다.

해외 의사들도 선진 의료 기술을 배우러 한국을 찾는다. 과거에는 주로 동남아·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 의사들이 한국을 찾았지만,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 의사들의 발걸음도 이어진다. 암, 뇌질환, 대동맥혈관질환 수술이나 로봇수술 등 첨단 치료의 현장을 참관하고 배우기 위해서다. 다국적 제약사들도 임상시험을 할 때 한국 의료기관을 빠뜨리지 않는다. 임상시험 환자 모집 속도, 철저한 데이터 관리,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연구 시스템 덕분이다.

이러한 의료 발전은 단순히 병원 수익이나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차원을 넘어, 한국을 세계 최장수 국가 반열에 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2023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3.5세로, 일본에 이어 세계 2위다. 1983년 67.7세에 불과했던 평균수명이 40년 만에 16년이 더 늘었다. 같은 기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이 73~74세에서 81.1세로 늘어난 것을 고려하면, 한국인의 수명 연장 속도는 그야말로 ‘압축 성장’이라 할 만하다.

 

1980년대, 한국 의료의 대전환기

한국 의료는 1980년대에 대전환 계기를 맞았다. 후진국형 의료에서 선진국형 의료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1981년 가정의학과를 한국에 처음 도입한 윤방부 세브란스병원 명예교수는 “1980년대는 한국 의료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중간다리였다”며 “경제 발전이 이뤄지면서 의사들이 해외로 나가 선진 의료 기술과 제도를 배워 왔고 최신 의료기기들이 도입되기 시작해, 이후 한국 의료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제도적 기반은 건강보험이었다. 1977년 대기업 근로자를 대상으로 시작된 직장의료보험은 1989년 전 국민 건강보험으로 확대됐다. 이로써 보편적 의료보장이 시작돼, 누구든 필요할 때 병원에 가서 비교적 값싼 비용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됐고, 이는 국민 건강 향상과 의료 인프라 확충을 가속화했다.

병원 시설과 장비도 급속히 늘었다. 전국적으로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이 신설·확장되었고, CT와 MRI 같은 첨단 영상장비가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이전에는 엑스레이와 임상 증상에 의존하던 진단이 정밀 영상진단으로 바뀌면서 치료의 정확성과 속도가 크게 향상됐다. 심장수술, 장기이식 같은 고난도 수술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위·대장내시경이 점차 확산되어 조기 위암·대장암 진단이 가능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87년 프랑스에서 세계 첫 복강경 수술이 시행되자, 이듬해에 이 기술과 장비를 발 빠르게 도입해 최소침습수술의 문을 열었다.

1980년대는 질병 구조가 크게 바뀐 시기이기도 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기생충 왕국’으로 불렸다.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결핵, 장티푸스, 콜레라, 홍역, 마마 등 각종 감염병이 주요 사망 원인이었다. 다행히 1980년대 들어 경제 발전과 함께 수세식 화장실 보급, 상·하수도 확대, 주거환경과 위생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감염병은 빠르게 줄었다. 대신 암, 뇌혈관질환, 심혈관질환 증가가 속도를 붙였다. 국가 의료 체계도 달라진 질병 구조에 맞춰 1980년부터 국가 암등록사업을 시작했고, 1989년에는 국립암센터 설립 논의가 시작돼 2000년 개원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시동을 건 K-메디컬은 30~40년 만에 세계 정상급으로 발돋움했다. 성과는 암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국가 암통계에 따르면 1995년 모든 암 5년 생존율은 42.9%에서 2022년 72.9%로 크게 증가했다. 난치암으로 분류되는 췌장암 5년 생존율도 같은 기간 10%에서 16.5%로 증가했고, 간암(11.8%→39.4%), 폐암(12.5%→40.6%)도 5년 생존율이 증가해 치료의 희망을 보았다. 장진영 서울대병원 간담췌외과 교수는 “수술한 췌장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은 2000년 이전엔 9% 수준이었지만 2022년엔 45%로 크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암 정복을 위해 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이지만 한국의 암 생존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지난 9월 5일 서울 동대문구 서울한방진흥센터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 photo 뉴스1
지난 9월 5일 서울 동대문구 서울한방진흥센터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 photo 뉴스1

암 치료의 새로운 국면

암 환자 생존율의 개선은 효과적인 항암제 사용, 수술 기술 발전, 조기 발견 증가 덕분이다. 1980년대까지 항암제는 화학항암제뿐이었다. 화학항암제는 무한 증식하는 암세포의 특성을 활용해 개발된 약으로, 암세포뿐 아니라 머리카락, 골수, 위장관 세포도 함께 파괴해 탈모, 빈혈, 구토 등 다양한 부작용을 일으켜 환자를 이중으로 힘들게 한다.

1990년대 표적항암제가 등장하면서 암 치료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표적항암제는 유전자 돌연변이나 단백질 과발현이라는 암의 특성을 이용해 특정 유전자나 단백질을 표적으로 공격하는 약이다. 화학항암제가 융단폭격이라면 표적항암제는 정밀 유도탄인 셈이다. 표적항암제는 1997년 림프종 치료제, 2001년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를 시작으로, 유방암·폐암 등 고형암 치료제 출시가 이어져 암 환자 생존율을 크게 끌어올렸다. 국산 표적항암제도 개발됐다. 김동욱 의정부을지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2012년 만성골수성백혈병 국산 표적항암제 ‘슈펙트’ 개발을 이끌었고, 조병철 세브란스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2021년 폐암 국산 표적항암제 ‘렉라자’ 개발을 주도해 세계 의료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0년대 들어 또 하나의 혁신 신무기인 면역항암제가 등장했다. 면역항암제는 면역세포의 공격을 회피하는 암세포의 ‘거짓 신호’를 차단해, 면역체계가 다시 암을 공격할 수 있게 한다. 펨브롤리주맙, 니볼루맙 같은 약제는 반응이 좋은 환자에게 장기 생존의 길을 열어줬다.

최근에는 항체-약물 접합체(ADC)라는 더 정교한 무기까지 등장했다. ADC는 항체에 화학항암제나 방사성동위원소를 실어 암으로 나른 뒤, 암세포 내부에서 작동하게 함으로써 암을 효과적으로 공격한다. 마치 트로이 목마처럼 은밀히 적진 안에 들어가 적을 초토화하는 개념이다.

 

수술법과 방사선치료의 혁신

암 수술 기술은 정상 조직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암 수술은 암을 최대한 떼어내는 데 급급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환자의 삶의 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작된 유방 보존술, 항문 보존술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최소침습수술의 대명사인 복강경 수술이 개발되어 1990년대 본격화됐고, 2005년 이후에는 로봇수술이 시작됐다. 로봇수술은 전립선암, 자궁내막암, 두경부암 등 수술 치료가 까다로운 부위의 암 치료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거의 모든 암 수술로 사용의 폭을 넓히고 있다. 김세헌 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로봇수술 덕분에 두경부의 기능을 살리면서 종양만 정밀하게 제거할 수 있게 됐다”며 “세계에서도 대한민국의 두경부암 수술 성적이 최고라고 인정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세계 최초로 하인두암과 후두암 로봇수술을 시행했다.

방사선치료는 전통적인 일반 방사선치료에서 양성자치료에 이어 중입자치료까지 폭이 넓어졌다. 일반 방사선치료는 암세포뿐 아니라 주변 정상 조직까지 손상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를 개선한 양성자치료는 에너지가 종양 부위에 집중돼 정상 조직 손상을 최소화한다. 더 나아가 2023년 세브란스병원은 중입자치료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중입자치료는 탄소 같은 무거운 입자를 이용해 살상력이 강하고 정밀한 치료가 가능하다. 전립선암부터 시작해 췌장암, 폐암, 간암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되어 그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한국은 암 조기 발견에서도 세계적 수준이다. 암은 조기 발견 여부가 생사를 가른다. 2022년 기준 모든 암의 4기 5년 생존율은 27.1%이지만 1기는 92.1%에 이른다. 특히 대장암은 1기의 경우 5년 생존율이 94%로 매우 높지만 4기는 20.6%로 낮고, 위암은 1기일 경우 97.4%지만 4기는 7.5%만이 5년 이상 생존한다.

조기 발견 증가는 내시경검사, 종양표지자검사, 초음파검사, CT·MRI 검사 등 다양한 진단법의 발전 덕분이다. 상당수의 암은 효과적인 조기 검진 수단이 마련되어 있다. 위암은 1~2년에 한 번 위내시경검사를 하고, 대장암은 5~10년에 한 번 대장내시경검사를 하면 대체로 조기 발견이 가능하다. 폐암은 방사선 노출량이 일반 CT의 10분의1인 저선량 흉부 CT 검사가 효과적이고, 유방암은 유방 엑스레이 촬영 검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것만으로도 초기에 찾아낼 수 있다. 전립선암은 혈액 검사를 통해 PSA(전립선특이항원) 수치만 확인해도 70~80%의 정확도로 암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국가건강검진에는 PSA 검사가 없지만 종합건강검진에는 포함돼 있다.

 

치매, 뇌졸중, 심근경색 치료

치매와 뇌혈관질환, 심혈관질환은 주요 사망 원인 질환들이다. 인구 고령화와 식생활 변화로 이들 질환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다행히 이들 질환에 대한 치료법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의 70%를 차지한다. 2023년 한 해 동안 62만4187명이 알츠하이머병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는데 이는 10년 전에 비해 3배에 이르는 인원이다. 알츠하이머병은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과 타우 단백질이 축적되어, 기억과 학습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작동을 방해해 발생한다. 현재까지는 아세틸콜린의 분해를 줄여 증상을 완화하거나 베타 아밀로이드 축적을 방해해 병의 진행을 늦추는 방식으로 치료하지만 근본적인 치료제는 개발되어 있지 않다. 최근 2종의 알츠하이머병 치료 주사제 레카네맙과 도나네맙이 출시되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뇌졸중 중 뇌출혈은 치료법이 마땅치 않지만 환자 수가 많은 뇌경색은 3개월 사망률 5%로 생존율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뇌혈관을 막고 있는 혈전을 녹이는 혈전용해제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고, 2015년부터 혈전을 끄집어내는 혈전제거술까지 개발되어 활발히 시행되고 있는 덕분이다. 혈전제거술 덕분에 뇌경색 발생 후 병원에 도착해야 하는 골든아워도 기존 4시간30분에서 6시간으로 늘었다.

심근경색 환자는 일분일초가 중요하다. 막힌 심장 혈관을 얼마나 빨리 열어주느냐가 생사를 가른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나라 중 하나다. 주요 대학병원들은 응급실 도착 후 60~70분 안에 스텐트를 삽입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가이드라인 목표인 90분보다도 짧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한국 심혈관 중재술의 성공률은 98% 이상으로 세계 최상위권이다.

 

후진국형에서 선진국형 질환 증가

한국의 질병 지도는 지난 40년간 크게 달라졌다. 후진국형에서 선진국형으로의 변화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이 주요 원인인 감염병은 감소하고, 수명 증가와 서구식 식생활이 주요 원인인 당뇨병·심뇌혈관질환 등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윤건호 가톨릭대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명예교수는 “1980년대 초 내가 전공의였던 시절에는 당뇨병 환자가 입원하면 의사와 전공의들이 구경하러 갈 정도로 희귀 질환이었다”고 회고했다. 현재 우리나라 당뇨병 환자는 600만명이고, 고위험군까지 합치면 1000만명을 넘는다. 당뇨병의 사촌인 비만 인구는 1600만명으로 추산된다. 뇌졸중도 과거에는 혈관이 터지는 뇌출혈이 많았지만, 지금은 혈관이 막히는 뇌경색이 80%를 차지한다. 영양 부족에서 영양 과잉으로의 식생활 변화가 가져온 결과다.

암 지도도 달라졌다. 우리나라 연간 암 발생자 수는 1999년 10만1856명에서 2022년 28만2047명으로 180% 증가했다. 같은 기간 주요 암 발생 현황을 비교해보면 암도 후진국형에서 선진국형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주요 암의 발생 변화를 살펴보면, 1위였던 위암은 2만901명에서 2만9487명으로 29% 증가했고, 2위였던 간암은 1만3262명에서 1만4913명으로 불과 12% 증가하는 데 그쳤다. 위암은 헬리코박터균과 냉장고 미보급으로 인한 짠 음식 섭취가 주요 원인이고, 간암은 B형 간염 바이러스가 주요 원인이라 후진국형 암으로 분류된다. 같은 기간 자궁경부암은 HPV(인유두종바이러스) 백신 접종 덕분에 4489명에서 3174명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반면 대장암은 9784명에서 3만3158명으로 290% 급증해 갑상선암에 이어 2위 암이 되었다. 유방암은 5890명에서 2만9528명으로 400% 늘었고, 전립선암은 1454명에서 2만754명으로 무려 1300%나 폭증했다. 이들 암은 고령화, 육류 섭취 증가, 비만이 주요 원인으로, 전형적인 선진국형 암에 해당한다.

 

만성질환 시대의 과제

오늘날 한국인의 사망 원인 1위 질환은 암(인구 10만명당 166.7명)이다. 그러나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알츠하이머병, 당뇨병, 고혈압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암 사망자를 능가한다. 이들 질환은 수명 증가와 함께 잘못된 생활습관이 장기간 누적되어 발생하는 만성질환이다. 급증하고 있는 대장암·전립선암 등 상당수의 암도 만성질환이므로 암과 싸우는 전략이 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세계적 암 권위자인 김의신 교수(MD앤더슨 종신교수)는 “암도 이제는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만성질환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비만은 만성질환의 출발점이다. 비만은 당뇨, 고혈압, 이상지질혈증뿐 아니라 각종 암의 위험을 높인다. 최근 체중을 20%나 줄여주는 비만치료제가 주목받고 있지만, 근본 해법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식습관 개선과 꾸준한 운동이 지속 가능한 해결책이다.

한국 의료의 눈부신 발전은 경탄할 만하지만 첨단의료가 모두의 건강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윤방부 교수는 “병 치료에서 첨단 의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이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나만의 건강 루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며 “음식을 골고루 적절히 먹고, 적절히 운동하는 것이 첨단의료 시대에도 유용한 건강 원칙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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