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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어느 금요일 아침. 어머니는 남편을 출근시키고 자녀까지 학교에 보낸 후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향했다. 4인 가족이 주말을 나기 위해선 싱싱한 식재료를 든든하게 공수해야 한다. 전통시장 골목을 돌면서 대파는 어느 가게 것이 더 싱싱한지, 두부는 어떤 게 단단한지 직접 만져보며 확인한다. 정육점에서 “오늘 삼겹살 좋아요!” “두 근 사면 반 근 더!” 외침에 따라 고기도 사고 곁들일 나물거리도 챙긴다.

양손 무겁게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쉴 틈도 없이 부엌은 이내 전쟁터가 된다. 당장 손질해야 할 재료들이 눈덩이처럼 쌓여 있다. 오늘 저녁에 먹을 것을 제외한 재료를 소분해 냉장고에 보관도 해야 한다. “이건 간장 두 숟갈, 설탕은 반 숟갈만....” 레시피(조리법)는 어머니의 ‘손맛’에 있다. 이날 온 가족이 함께 먹는 따뜻한 저녁 밥상은 낮부터 이어진 어머니의 가사노동과 시간의 결과물이다.

2025년 어느 금요일 저녁. 맞벌이 부부가 퇴근길에 온라인으로 저녁거리를 주문한다. 집에 오니 이내 초인종이 울린다. 현관 앞에는 신선한 식재료와 밀키트(meal-kit)가 담긴 박스가 즉시 배송돼 있다. 언박싱을 하니 두 명이 한 끼 식사로 먹기 충분한 스테이크용 소고기부터 양념까지 모든 재료가 정갈하게 소포장돼 있다. ‘10분 조리’ 레시피 카드에 따라 뚝딱 레스토랑 못지않은 스테이크를 완성한다.

막힐땐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어 레시피 영상을 참고해 그대로 따라할 수도 있다. 함께 별도로 구매한 스테이크에 곁들일 가니시용 채소와 과일도 손질돼 왔기 때문에 간단한 세척만 하고 곧장 그릇에 올리면 요리는 끝이다. 레스토랑간편식(RMR)이 식탁에 오르는 건 흔한 일이 됐다. 젊은 부부는 잘 구워진 스테이크에 와인을 페어링해 즐기며 함께 여유로운 주말을 맞이한다. 밥상 차림을 위한 노동의 시간은 줄었지만 선택지는 늘었다.

 

간편식, 레토르트 넘어 RMR·밀키트 다양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가정간편식(HMR) 시장 규모는 2017년 3조4000억원에서 2023년 6조5300억원까지 6년 새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업계에서는 올해 약 7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일찌감치 간편식 시장이 발달한 일본 대비 5분의1 수준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조사에 따르면 일본 간편식 시장 규모는 237억달러(약 33조원)다.

전 세계로 보면 간편식 시장의 성장 가능성은 더욱 크다. 시장조사업체 비즈니스리서치인사이트는 글로벌 HMR시장 규모가 지난해 1339억달러(약 187조원)에서 오는 2033년에는 2894억달러(약 403조원)까지 두 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봤다. 공통적으로 고령화와 맞벌이 및 1인 가구의 증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온라인 구매와 배달 수요 증가, 시대 흐름에 따른 라이프스타일 변화 등으로 간편하고 빠른 식사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분석이 따른다.

국내 간편식 시장은 1~4세대를 거쳐 현재 5세대를 향하고 있다. 과거 1세대(1980~2000년)는 레토르트 식품 위주였다. 식품 공장 등에서 조리·가공한 식품을 알루미늄 따위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밀봉한 후 레토르트 솥에 넣어 고온에서 가열·살균한 제품이라서 이 같은 명칭이 붙었다. 1981년 오뚜기가 국내 첫 레토르트 제품으로 선보인 ‘3분 카레’와 ‘3분 짜장’, 1996년 CJ제일제당이 국내 최초로 선보인 즉석밥 ‘햇반’이 대표적이다.

2세대(2000~2013년)는 냉장 죽, 냉동 면·만두 등 냉동식품이 등장하면서 시장을 이끌었다. CJ제일제당 ‘비비고’, 대상 ‘청정원’, 풀무원 등이 대표 인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3세대(2013~2014년) 때부터 국, 탕, 밥, 찌개, 반찬류 등 제품 폭이 넓어지면서 집밥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전통적 식품기업 외에도 이마트와 롯데마트 등 유통업체까지 가세하면서 소비자 선택의 폭이 더욱 늘어났다. 4세대(2015~2019년) 들어서는 다양해지는 수요에 맞춰 즉석섭취식품(RTE), 즉석조리식품(RTC), 반조리식품(RTH), 간편조리식품(RTP) 등 여러 형태로 세분화됐다.

 

맛집 메뉴도 간편 구매·조리로 밥상에 뚝딱

요즘은 5세대(2020년 이후)로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비대면 소비 트렌드 확산과 함께 간편식도 다양한 제품과 관련 서비스 출시가 늘면서 급격하게 시장이 확대됐다. 레스토랑간편식(RMR), 유명 셰프나 맛집 메뉴를 반조리식으로 담은 밀키트, 다양한 브랜드 협업(컬래버레이션) 제품, 해외 요리 등 고급화 및 차별화가 이뤄졌다.

기존 식품회사뿐만 아니라 마트와 편의점 등 유통사들도 PB(자체 브랜드) 상품 간편식을 선보이거나, 전국 맛집 인기 메뉴를 발굴하고 협업해 신제품 출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마트 ‘노브랜드’, 롯데마트 ‘오늘좋은’, 홈플러스 ‘심플러스’, BGF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CU의 ‘팔도한끼’와 ‘편스토랑’ 등이 대표 브랜드다. GS리테일의 GS25, 코리아세븐의 세븐일레븐, 신세계그룹의 이마트24도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유통력을 앞세워 소비자들이 전국 마트와 편의점 또는 온라인 주문·배송으로 쉽고 빠르게 만날 수 있도록 접근성도 높였다.

특히 밀키트는 쿠킹 박스 또는 레시피 박스라고도 불린다. 요리에 필요한 손질된 식재료와 양념, 레시피를 하나의 키트로 구성한 간편식이다. 가정과 캠핑장 등에서 동봉된 레시피에 따라 간단하게 조리만 해주면 훌륭한 음식이 뚝딱 완성된다. 2008년 스웨덴 스타트업 기업 ‘리나스 마카세(Linas Matkasse)’가 정기배송 형태로 처음 선보인 후 미국, 일본, 한국 등 전 세계적으로 확산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밀키트 시장은 2017년 약 100억원에서 2023년 3821억원으로 38배 이상 급성장했다. 2025년에는 7253억원 규모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업계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다시 외식 수요가 늘면서 밀키트 시장 성장 속도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맛 좋고 편리한 밀키트가 식탁에 오르는 게 익숙해지는 등 보편화 추세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형태는 달라져도 ‘따뜻한 집밥’ 마음은 여전

앞으로 우리 밥상은 시대 흐름에 맞춰 계속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 삶의 수준과 정보의 발달로 요즘 소비자들은 맛뿐만 아니라 건강, 친환경, 맞춤형 식단 등 다양한 가치를 중시한다. 그러면서 가사노동은 줄이고자 한다. 이러한 니즈에 따라 간편식 시장은 앞으로도 다양한 상품과 유통 서비스가 출시되고 진화를 거듭하면서 지속 성장할 전망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맞벌이에 따른 가사노동 부담과 양질의 육아 니즈로 영유아 간편식 시장도 빠르게 성장 중”이라며 “늘어나는 1인 가구를 겨냥한 소포장 제품과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초고령사회에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건강식·저염식·연화식 등 맞춤형 제품들도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과거의 밥상은 손이 많이 가지만 정성의 서사가 있었고, 지금의 밥상은 가사노동과 시간을 아껴주면서도 다양성을 담고 있다. 옛날 집밥은 오래 끓인 국물에서 삶의 깊이가 묻어나고, 요즘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따뜻한 집밥을 포기하지 않게 해준다. 어쩌면 두 풍경 모두 ‘가족을 위한 따뜻하고 든든한 사랑’이라는 공통된 마음 위에서, 시대 변화가 빚어낸 단지 달라진 형태의 ‘집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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